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235)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235화(203/343)
블로센스 내부 지칭 ‘동화가 또 준이를’ 사건, 그 발생 전까지 시간을 조금 되돌려 보자.
석준은 오랜만에 발동된 광기 때문에―알고 보니 류이든이 석준의 광기를 억제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팀의 고요함을 지킨 셈이다.―미칠 듯한 설명을 시작했다.
덩달아 나까지, 석준과의 대화가 오랜만이라 새삼 즐거워 여러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럼, 얘는 얘를 이겨?”
“네.”
분명 외관상으로는 순진해 보이는 짐승이 방사능 맞은 쥐를 이기다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흑사병이라는 역사적 증거까지 있는데, 거기에 방사능을 추가했잖아. 그럼 인류 괴멸 위기이지 않나.
“주괴에서는 타입이라는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석준은 또 잘 정리된 표를 보여 줬다. 그걸 가방에 넣고 다니는 거, 대견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준아.
표에는 세로축과 가로축에 땅이니 물이니 염병이니 하는 것들이 채워져 있고, 안쪽 칸에는 누가 더 우세한지가 단순한 기호로 표기되어 있었다.
“다 외웠어?”
“네. 엄청 오래 걸렸어요. 자랑스럽고 대견해.”
그러고 석준은 맑게 웃으며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은 참 잘생기고 배우 할 것 같은 상인데, 어쩌다, 우리 준이는…….
“…그것도 잠시 빌려 줘.”
조금 전에 수첩에 관심을 보였을 때처럼 이번에도 석준은 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여깄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중 누구도 준이 취미를 제대로 이해해 주지 못한다.
덕질의 세계는 넓고 심오해서 위즈니와 주괴에 미쳐 있는 석준과 그걸 갖고 주제로 대화하려면 필요한 사전 지식이 너무나 많아서 대체로 ‘아…, 그래!’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속뜻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 네가 좋다면야!’다.
류이든이 석준의 광기를 통제하는 댐이었다면, 내가 그 댐에 있는 수문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적당히 공부하다 보면, 조금 정도는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얇은 표 한 장을 보고 빠르게 규칙을 파악했다. 사진 기억술 같은 게 나한테도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없어서.
[어우, 멍청하네요!]닥쳐. 영생을 사는 존재랑 비교당하기엔 난 아직 인간이라고.
어쨌든 규칙을 세우던 중,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불, 물같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무 상관이 없는데, 페어리는 뭐길래 용한테 강하지.
중세 시대 역사를 따져 보면 고블린도 페어리로 불렸다던데, 고블린이 용을 이기는 민담 따위 들어본 적이 없다.
한 5분쯤 지났을까, 석준이 조용히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재밌나요?”
“…응, 대충은 외운 것 같아.”
재미있네, 외우는 게. 약간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켜.
석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박수를 쳐대며 웃었다. 자기 취미에 동참해 주려는 모양새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얘네들, 타입은 다 적혀 있어?”
“네! 제가 다 적었습니다! 혹시 누가 물어보면, 꼭 말해 주려고…….”
대단해. 아주 자랑스러워. 꼭 루미너스님들에게 말해 줄 거야.
요즘 팬분들이 우리 팀의 근본 광기를 잊고, 나한테 은은한 광기라고 하신대.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니, 네가 있는데.
어떤 분은 네가 가짜 광기고 내가 진짜 광기래. 언제부터 가짜와 진짜의 뜻이 바뀐 건지 모르겠어.
* * *
석준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리듬을 탔다.
박자 떨어지는 모양새가 분명히 힙합인 걸 보니, 랩을 하는 놈은 맞긴 한가 보다. 목화가 알려준 요즘 언어처럼, 힙하다.
물론 내 눈에는 방사능 쥐를 사랑하는 멸종하지 않은 유일한 공룡에 불과하지만.
심지어 그 리듬은 방송국 회의실까지 이어졌다. 누가 봐도 ‘나 신나요.’라는 모양새. 회의 시작 전에 멈춰야겠다.
“왜 그렇게 신났어.”
“형님 때문입니다.”
“염…….”
병을.
“오늘 집 가면 저랑 같이 주괴 극장판 보셔야 합니다.”
“응.”
“게임도 같이 해 주세요.”
“그래.”
“저랑 대전도.”
“물론.”
“끝나면 애니메이션도 같이 감상!”
“…오늘 안에 할 수 있어?”
“형님과 함께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말 좀 천천히 해 줘. 이럴 때만 랩 하는 사람인 거 증명하지 말라고. 애초에 왜 게임이나 만화 감상을 지옥 끝까지 가서 해야 하는 건데.
석준은 헤실헤실 웃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게임기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을 무렵, 깨달았다.
얘, 엄청나게 같이 하고 싶었나 봐.
그러나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놈들이 전부 하나씩은 취미가 있어서 권유하질 못했나 보다.
차라리 이현재가 철면피를 쓰고 류이든에게 ‘해 주세요. 아니면 우리 사이가 나빠질 거예요.’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보드게임을 권했던 것처럼 석준이 그랬었다면 다들 못 이겨서 했을 텐데.
“…그래.”
하자, 망할. 다 해. 수문을 약간 연 게 아니라 댐이 붕괴하는 기분이긴 한데, 어때.
석준은 그 순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작가님이 들어오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머.’라는 짧은 말을 남긴 후, 그대로 문이 닫히고, 나는 미소 지었다.
“준.”
“네!”
“앉아.”
“네!”
어째서 수치는 나의 몫인가. 한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이 타인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상황은 얼마나 비윤리적인가. 요나스, 당신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다시 들어오신 작가님은 침착한 얼굴로 미소를 입에 올렸다.
“안녕하세요, 블로센스 여러분! 가져오신 짐은 저한테 주시면 맡아 드릴게요.”
석준의 보물주머니, 최근 몇 달 동안 모은 스티커 저장고가 작가님 손으로 넘어가고, 나도 작은 클러치백을 건넸다.
그리고 분명히 건네기 전에 안에 수첩이 있는 것까지 확인했다.
* * *
때는 바야흐로 내가 주머니괴물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작업실에는 내가 따로 설치해 둔 모니터가 두 개나 있어서 게임을 화면에 연결해 석준과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얘도 별로네.”
“하지만, 얘, 얘도 귀여운데!”
“그런 건 대전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데이터 쪼가리로 구성된 계산식에 따라 정직한 대미지 산출이 나온다고. 귀여워서 약하게 때려 주는 거라면 인정하겠어.
“…형님, 지금 얘만 서른 번째 잡고 계십니다.”
“원하는 능력치가 안 나와서.”
석준의 설명과 개인적으로 알아본 정보를 토대로 내린 결론, 이 게임의 모든 것은 숫자다.
숫자로 가치를 환산해서 대상을 평가하는 건 현실 세계라면 문제겠지만, 이 게임에선 그게 권장되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다르다.
“이건, 주괴가 아니에요, 형님…….”
“이게 주괴의 본질이야, 준.”
“주괴는 애정으로 아이들이랑 막 놀고!”
“그런 아이들을 싸우라고 부추기는 게임이기도 하지.”
잔인해라. 갑자기 자신의 영역에 침범해서는 폭력을 행사하고 한낱 짐승이라는 이유로 헌법에 보호를 받지도 못한 채 잡힌 뒤 동그란 감옥에 갇혔다.
어떤 주머니괴물은 ‘언어 능력’까지 갖고 있는데 법적인 보호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폭력 행사 후 잡히면 소유물 취급, 반사회적이야.
그렇게 갇히고 나서 잠시 바깥에 나올 때는 계속 훈련, 지치면 쉬고 싶은데 억지로 병원에 데려가 3초 만에 치료 후 다시 훈련.
하는 명령이라곤 상대방을 죽이라는 명령뿐. 주머니괴물이 정신 이상이 발생하지 않는 게 대견할 따름이다.
석준은 내 말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은 모양새였지만, 입을 오물거리다가 기껏 답해 냈다.
“그건 우리 모두의 꿈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내 꿈이지.”
주머니괴물 마스터라는 칭호는 나한테 수여되는 거고, 그 명예를 위해서 주머니괴물은 노동 착취를 당할 뿐이다.
그들은 훌륭한 전사였지만, 콜로세움에 노예를 내보낸 주인만이 득을 보는 시스템, 로마부터 있었던 유구한 시스템이다.
“형님!”
나는 말하면서도 웃음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석준이랑 놀아주는 건, 왠지 모를 추억을 자극하는 맛이 있다. 아직 일을 본격적으로 하지 않아서 목화와 지내는 시간이 길었을 때 이러고 놀았는데.
“그래도, 귀엽네.”
나는 드디어 내가 원하는 수치를 모두 갖춘 녀석이 신나게 웃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체가 흐물흐물한데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렇죠! 제가 또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형님한테 드린 수첩에 있습니다.”
아, 한번 볼까.
나는 클러치백을 꺼내 안을 휘저었다. 그리고, 안에 책 한 권과 반짇고리밖에 없다는 사실에 잠시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클러치백에 관련된 모든 기억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
석준한테 받은 수첩을 넣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연 적이 없는데. 내 기억은 높은 확률로 틀리지 않는다. 대체, 뭐지.
멈춰 있는 나를 보던 석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미소 지었다.
“혹시, 선물?”
준, 꽤 심각한 상황이야. 네가 그렇게 해맑으면, 나는 슬퍼지고 말아.
“음, 준.”
“네, 형님. 기대 중입니다.”
그러지 말라고.
“없어졌어.”
갸웃거리는 석준의 고개. 그리고 아마 나답지 않게 떨리고 있는 나의 눈빛.
클러치백을 내려놓고 나는 석준을 바라봤다.
“네 수첩.”
기억 속에 분명 떨어질 법한 순간은 없지만, 같잖은 변명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우선 사과를 입에 올렸다.
“미안…….”
“…네?”
석준은 이해할 수 없었나 보다. 말의 의미를 고찰하는 철학자나 비평가가 된 것처럼, 내가 뱉은 모든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어떻게 하면 그 모든 스티커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
돈은 많다. 먹지 않아 버려질 빵이 문제긴 하다. 하지만 석준에게 사죄하기 위해서라면 조금쯤은 지구에 민폐를 끼쳐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몸을 일으켜 석준을 마주했다. 석준은 드디어 이해했는지 입을 조금 벌렸다.
나와의 아이컨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찰나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한 방울의 눈물이 석준의 뺨에 흘러내렸다. 눈치 없는 주머니괴물도 스피커를 통해 울음을 흘렸다.
아, 남을 직접 울리는 건, 너무 오랜만인데. 그것도 이렇게나 명확히 내 잘못인 것도.
“내가, 다시 다 사줄게.”
“아, 아아, 아닙니다아…….”
“빵도 내가 다 먹을게.”
“괜찮, 흐어…….”
석준은 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들어가 보겠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끝까지 예의 바르지만, 상심의 정도가 얼마나 큰지는 알 수 있었다.
* * *
나는 한참을 제자리에 앉아 해맑게 웃다가 울고 있는 망할 놈의 괴물 놈을 하염없이 쳐다보다 숙소에 돌아왔다.
잃어버린 게 요즘 유행하는 스티커라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세상 대부분의 물건은 돈으로 구할 수 있고 품귀 현상은 돈만 있으면 뛰어넘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믿음의 증표처럼 주어진 물건이라는 게 문제다.
그러면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가 되고 만다. 다시 사준다고 해도 그 사실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석준의 세계는 순수하고 투명해서, 소중한 물건이라도 신뢰하는 이에게는 믿고 맡길 수 있다. 더군다나 자기 취미에 어울려 주는 게 고마워서 빌려 준 물건이다.
그거 보면서 자기랑 놀아 달라고.
“그, 미안한데, 스티커 얘기 맞지?”
류이든은 내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청…, 큰…, 일인가?”
석준이 방 안에서 이불을 덮어 쓰고 계속 울면서 진행된 설명회.
왜 우는지를 설명하던 내가 신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황당한 눈초리였다. 아무래도 과장됐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현재가 그런 류이든에게 명답을 내놓았다.
“저건 상징적인 거잖아요. 예전에 제가 뭔가 싶어서 잠시 봤을 때 옆에서 벌벌 떨면서 지켜봤어요, 혹시 닳을까 싶어서. 그런 걸 동화 형한테 빌려 줬으면, 저건 단순한 스티커 수첩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 거죠. 예를 들면 어렸을 때 친구랑 같이 모은 돌멩이 같은 느낌.”
이현재는 은은한 미소로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그걸 잃어버린 거구요, 동화 형이.”
요망한 놈.
“…그렇지.”
두 손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 어떤 새끼지. 방송국에 도둑놈이 있었나. 그런데 다른 건 건들지도 않고, 뭐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