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272)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272화(240/343)
타인에 대한 신뢰는 그 근거가 있다면 업무를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다.
타인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을 원초적 공포라고 표현한 영화도 있을 정도고, 화폐를 통해 자리 잡은 사회적 신뢰 체계가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렇게 중요한 신뢰인데, 이 망할 사회가 그걸 허용하질 않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런데 그 사진, 회사 사람이 찍은 거겠지?”
“방송국 사람이 있으면 내가 네 멱살을 잡지도 않았을 테니까.”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유순해졌는지, 언제부터 이렇게 다른 사람을 쉽게 믿었나 싶다.
“정치는 네 전공이잖아.”
소문의 중심에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에게서 정보를 취합하는 데에는 나보다 류이든이 훨씬 유능하다.
나는 천성이 인간 불신에 찌든 데다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는 부정적인 스트레스가 솟아오른다.
만약에 내가 류이든의 역할이었다면 스트레스성 위염과 만성 두통에 시달렸겠지. 작곡에 매진할 수 있는 업무 환경에 감사하다.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니긴 한데, 형.”
류이든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타인의 기대와 자신의 능력을 저울질하는 한 인간의 고뇌가 얼굴에 드러났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지, 이든.
“아니. 다 알아야만 해.”
다시, 타인에 대한 신뢰는 그 근거가 있다면 업무를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런데 내가 가진 근거 중 하나를 네 손으로 부수면 안 되지, 이든.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던 류이든이 울상을 지었다. 이놈의 표정은 믿을 게 못 된다.
“…아마, 사내 정치? 여기저기서 들은 말로 해 본, 추측이긴 한데.”
언제 그랬냐는 듯 웃고 있는 지금만 봐도 확실하다. 만약에 이놈이 울면 그건 분명 정치적 목적이 있을 거야.
“1팀장님이 빡쳤다는 소문이 메인이야.”
“왜?”
“회사 구조를 개편할 예정인데, 제작기획부로 두 팀을 통합한다더라고.”
커피나 마셨다.
대충 두 명이 권력을 나눠 갖다가, 이제부터는 한 명한테 몰아준다는 소리다.
“우리 팀장님이 부장 자리에 앉게 될 예정이라고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1팀장이 질투를 하신다는 소지의 이야기를 들었거든.”
“…애초에, 결과물이 없으니 당연한 귀결이잖아.”
1팀은 걸그룹을 주로 제작했다고 하던데, 소위 히트를 친 그룹은 없었다고 한다.
내가 선배라고 부르는 양반이 우리 회사에선 TOT밖에 없던 것도 그 영향이겠지. 실력 있고 정치 능력 좋은 인간이 권력을 얻는 건 전통에 가깝다.
“노력은 하셨겠지. 무능했을 뿐.”
무능한 인간의 질투만큼 추잡한 게 없다.
유능한 인간이라면 그 질투조차 라이벌 의식이라 표현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질투라는 두 글자가 갖는 민낯만이 드러날 뿐이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꺼져 있는 TV의 까만 화면을 응시했다.
테이블에 커피잔을 놓고 담소를 나누는 류이든과 내 얼굴 모두 평온하기 그지없다.
논란이 터진 인간의 낯짝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노인정에서 바둑 두는 두 사람 같았다.
“좀, 추하네.”
자기 동료 잘나가니 배알이 꼬여서 어떻게든 흠집 하나 만들어 보려고 그 수작을 떤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격이 떨어져서 좀.
아무리 타인의 고통에서 기쁨을 느끼는 건 본능에 가깝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천박하면 인간으로서의 능력이 의심될 따름이다.
“그렇지.”
우리 둘은 동시에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다른 인간들 권력 싸움에 낀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어도, 장해진 팀장님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평온할 수 있었다.
스스로 승리를 쟁취하고 우리의 앞길을 잘 닦아 주실 것이다.
“알아서 잘하시겠지.”
“너도 참 많이 변했어.”
“이건 변한 적 없을걸.”
다만 믿을 근거가 생길 뿐이다.
* * *
장해진은 눈앞의 사내와 마주 앉아 있으니 냉정한 분노가 솟는 걸 느꼈다.
이틀 내내 홀로 무슨 생쇼를 한 건지. 심증은 명확하니 확증만 얻어내면 끝이다.
“물어볼게요.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리에 종이를 내려놓으며 장해진은 웃었다. 물증까지 있다는 뉘앙스.
기획2팀의 막내.
애들 무대 하는 거 따라가서 무대 좀 보고 컨셉 기획 좀 배워 오라고 보내놨더니.
애들이 논란 날 거리가 고작 그 정도라 다행이지, 만약에 한 명이라도 행실이 올바르지 않았다면 별꼴을 다 봤을 것이다.
부하 직원들 관리에 소홀하다는 건 자신의 책임이라 사내 입지에 타격 입어서 짜증 나는 건 둘째 치자. 그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그럼 들어볼까요.”
팀 멤버 중 하나가 다른 멤버의 멱살을 잡았다.
고작 이런 사건은 논란 축에도 못 낀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아이돌들끼리도 당연히 다투지.
그러나 이걸 기사화하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다른 그룹 열애설이 2연타로 터지면서 소란스러운 와중에 이딴 잡스러운 소리를 기사화한다는 건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의도가 불순해, 개X끼들이.
“대체 뭘 원해서 기자분과 협력했는지?”
“저…….”
“그 전에 설명부터 드리자면, 다시는 이 업계에 발을 못 붙일 거예요. 다른 회사에는 제가 직접 독을 풀 거랍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발이 좀 넓어요.”
“그게.”
“변명이 시작할 때 보통 그렇게 시작하던데. 말은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해요. 계약서를 쓸 때 읽으셔서 알지 모르겠지만, 아주 당연하게 계약 위반이에요. 해고는 당연하고 저희 법무팀에서 손수 고소할 거랍니다. 그러면 빨간 줄도 남으실 테니, 다른 업계에 가기 힘드시겠네요? 와, 어쩌죠. 적법한 범위 내에서 한 사람 인생 조질 생각을 하니까 설레요.”
놀랍네.
눈앞의 사내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가득해 보였다. 들킨다는 가정 자체가 없었던 걸까.
아니, 최소한 들키더라도 이런 상황에 놓일 거라는 예측을 못 했던 것 같다.
누군가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어쩜 이렇게 순진할 수 있는지. 등신도 아니고 지켜 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말씀만 하시면 모든 일을 없던 걸로 해 드릴 수 있답니다. 사회 초년생이니까! 실수할 수 있죠! 누구 부탁으로 그런 사진을 찍었는지만 말씀하시면 돼요. 다른 회사 사람이었나요?”
니체 엔터테인먼트는 TOT가 뜨기 전에 X소 기획사였다.
지금도 대형 기획사라기에는 약간 모자란 규모지만, 장해진의 운수가 좋아서 연타에 성공한 덕분에 이름 있는 기획사인 건 틀림없다.
그런데도 회사 내부 꼴은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이제 덩치만 큰 중소 기획사를 벗어나나 싶었는데.
“아니면…, 우리 회사 사람?”
아직 멀었다. 고작 이런 걸 공작이라고 하고 있다니.
부장 자리에 앉으면, 그 인간 인사 평가부터 어떻게든 나락을 보내야겠어.
똑똑.
긴장이 감돌던 방에 대뜸 불쾌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장해진은 눈앞의 사내가 얼마나 귀가 얇은지 파악했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네.”
“해진 씨!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아, 우리의 등신이 여기! 이걸 지키러 와 주다니.
“팀 내 회의 중이라서요, 주 팀장님.”
벌컥.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열리는 문.
우리 회사, 굉장히 좋은 사풍(社風)을 가지고 있다니까.
“아니, 부사장님한테 부탁드렸거든요! 해진 씨 바쁘니까 사소한 사건 조사는 저한테 맡겨 달라고!”
“합리적이네요.”
“…그렇죠?”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니 성질받은 게 티가 났다.
능력도 없는 인간이 창립 초기부터 있었다고 득을 보는 꼴이라니, 환멸이 난다.
“그런데 어쩌죠. 제가 지금 법무팀에 들르면 일이 끝이라.”
그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 부사장님은 이런 정치엔 관심이 없었지, 항상. 그 인격은 존경하지만, 이럴 때는 불편할 뿐이다.
“…그래요?”
“…네?”
어벙한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꼬리를 붙잡아 몸통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 꼬리를 일단 조지자. 저 인간 근처에 줄을 잡은 인간을 하나둘 조지다 보면 꼬리, 팔, 다리, 장기, 하나하나 조지다 보면 몸통이 알아서 넘어지겠지.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쓰는 격이지만, 그걸 통해 다른 닭들을 통제할 수 있으면 득이다.
“에이, 아티스트 이미지 실추가 있었잖아요. 당연한 일이죠.”
* * *
“…팀장님, 괜찮으세요?”
류이든이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장해진 팀장님이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으로 찍으면 심령사진으로 떠돌아다닐 비주얼이었다.
“여러분, 공지사항 두 가지. 큰 소식이랑 작은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으실래요?”
다시 커피. 옆자리에 앉은 채하민이 특유의 오지랖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게 진동으로 느껴졌다.
“작은 소식부터죠.”
“네, 1박 2일로 내부 리얼리티 촬영이 진행되겠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스몰 토크가 단 한마디도 없이 핵심만 전달하는 걸 보면,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신가 보다.
“지난번에 스카이다이빙을 1위 공약으로 내세우셨잖아요? 그래서 기왕 하는 거 판을 키워서 휴양 가는 느낌으로 촬영할 거예요. PD님을 한 분 초빙해서 촬영할 예정이랍니다.”
“오, 혹시 누군지도 알려 주시나요?”
“음, 힌트만 드리자면 동화 씨랑 친해요.”
세상에. 왜 누군지 알 것 같지. 힌트가 아니라 실명제인 것 같은데.
“동화야, 우리 멘탈 수업 하러 가는 거야?”
“너무 싫은걸.”
심바 씨한테 부탁드려서 그놈 목덜미를 물어뜯었어야 하는 건데.
그 인간이 담당하면 휴양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를 요양이 필요한 정신 상태로 만들 것이다. 방송국 놈들에 대한 불신을 극대화시켜 준 은인이니까.
“우선 회의만 대충 해 봤는데, 정말 푹 쉴 수 있을 거예요.”
“팀장님도 같이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까부터 옆에서 염병을 떨던 채하민이 힘겹게 뱉었다.
고갯짓으로 감사를 전한 팀장님은 다시 커피를 마셨다.
“원래 집에 벌레가 들면 잠을 좀 못 자잖아요?”
순간 나와 류이든의 눈이 마주친다. 아마도 다른 멤버들은 못 알아들을 소리였지만, 그 의미는 잘 전해졌다.
팀장님은 그런 우리를 보시더니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다음 큰 뉴스인데요. 여러분들 투어 한번 성대하게 열 예정입니다.”
침묵. 다들 멍하니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같은 표정으로 찬찬히 눈을 끔뻑였다.
류이든은 알고 있었으면서 놀란 척하는 게 볼썽사나웠다.
“…와.”
단말마처럼 터지는 채하민의 감탄.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확확 돌려 주변 사람의 얼굴을 한 번씩 보곤, 내 팔뚝을 부여잡아 팍팍 쳐댔다.
“와! 와! 와! 동화야! 현재야!”
나 한 번, 이현재 한 번, 번갈아 가며 쳐댄 채하민이 이번엔 자기 허벅지를 미친 듯이 찍어대며 기뻐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프다고 뭐라 한마디는 했을 이현재도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와, 팀장님, 감사합니다!”
“…넌, 알고 있, 그래.”
90도로 꺾이는 몸뚱이와 ‘얘는 뭐야’라는 표정으로 질색하는 얼굴.
그런 류이든과 팀장님 사이로 가만히 자기 품에 들고 있던 인형에게 말을 건네는 석준이 보였다.
“나, 성공했어―, 볼티.”
미친놈―‘볼티’는 전기 쥐새끼에게 석준이 지어준 애칭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성능좋음’부터 ‘성능나쁨’까지 다양한 애칭을 지어줬다.―.
환호, 침묵, 감사와 난처함, 그리고 정신적 결함, 이 모든 게 뒤섞인 혼돈 속에서 홀로 군중 속 고독을 느끼는 내가 있었다.
[저와 함께입니다.]너는 나중에 내가 장래 희망까지 조작해 줄게, 기지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