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284)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284화(252/343)
대학원 진학이 내부적으로 확정된 한 여인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마지막 음방 현장은 뛰고 싶어서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현생은, 잠시만.”
어차피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이상 인생이 무언가 꼬일 대로 꼬인 셈이다.
종이 무덤에 갇혀 살 인생이 눈앞에 놓여 있으니까, 애들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말겠다.
이번 활동, 다들 슈트가 너무 잘 어울리니까. 특히 류이든은, 자극이 상당해.
앨범 전체가 하나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는 건 덕후를 들쑤시고, 그 스토리는 이현재 원작에, 대부분의 곡에 지동화 편곡 및 작곡으로 참여.
안무는 채하민이, 랩 라인은 석준이 만들었고, 석준은 지동화를 도와 곡을 제작하기까지.
씨X, 뽕이 찬다. 이 시대 몇 안 남은 가내 수공업의 현장이다. 이 정도 그룹이니까 현생을 갈아 넣어도 만족스러운 거야!
개인 팬덤 문화가 보편화되었다지만, 그녀는 여전히 올팬을 기반으로 한 덕질이 익숙했다.
룸넛판은 악개가 보이면 개 패듯 패는 분위기라 더욱더 만족스러운 덕질의 나날이었다.
“오늘은 팬싸도 간다!”
지난번 앨범 때 가지 못해, 얼마 만인지……. 대학교 졸업 학년은, 왜 이렇게… 대학원, 자신이 골랐다지만…….
우울함과 흥겨움이 어쩜 이리도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는지.
그녀는 리메이크된 공식 응원봉, 소위 ‘광화봉(光花棒)’―아직 정식 명칭은 아니다, 그녀 혼자 밀고 있는 이름이다―이라 불리는 걸 손에 꼭 쥐었다.
꽃의 선을 본뜨고 재구성해 오묘한 생김새의 응원봉, 유리 안에 들어 있는 이 꽃의 색은 멤버들이 하나, 팬이 하나, 투표로 결정했다.
가수와 팬이 하나씩 고른 파란색과 하늘색으로 만들어진 꽃이 반짝거리며 빛난다.
이 광화봉이 담고 있는 개념은 참 단순하고 클래식한데, 보고 있으면 흐뭇해지고 만다.
“…우리가 연분홍 같은 거 골랐으면 장난 없었겠네.”
짙은 파랑과 연분홍이라니.
물론 그랬으면 멤버들이 라이브를 켜서 자기들이 고른 색을 철회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희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보라색! 이라면서.
고작 응원봉을 보면서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나. 색깔도 데뷔곡 생각나서 더 그래.
한편에서 들려오는 환호성, 그녀는 잡생각을 떨쳐 냈다.
리허설을 위해 무대 위로 올라온 멤버들이 우리 쪽을 보고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새벽부터 다들, 너무 고마워요…….”
채하민은 늘 저런 말을 하곤 한다. 심지어 항상 진심인 표정과 어투로.
옆에 같이 나온 지동화는 그럴 때면 늘 고개를 끄덕이며 팬석 구석구석을 눈으로 훑었다. 볼 수 있는 곳까지는 최대한 모든 얼굴을 기억하겠다는 듯이.
그녀는 저 눈이, 너무 좋았다. 거짓 없는 감사의 눈이. 자신이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라고 적혀 있는 것 같은 표정이.
그러고 나면 착장이 눈에 들어온다.
푸른 계열의 쓰리 피스 정장에 가죽 장갑, 은발 대신 검게 물들인 머리와 하얀 피부.
저 사이에 있어서 그렇지, 은근히 피지컬도 좋다. 저게, 옳게 된 아이돌이다.
그녀는 감탄했다. 실물은 언제 봐도 감동을 선사해 준다.
입을 벌리고 피켓과 광봉을 드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모든 순간을 눈에 담다 보면.
문득 눈이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약간 멈칫하는 지동화, 이내 미소로 표정을 바꾸고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지?’
자기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지 의심하다가 이내 집어치웠다.
몰라, 지금은 저 잘생긴 남정네들의 낯짝을 내 뇌 속에 쑤셔 박는 게 더 중요해.
“저희 오늘이 ‘All mine’ 마지막 활동이에요.”
그래서 그녀는 우선 류이든이 마이크를 들고 포문을 연 대화에 집중했다.
* * *
고등학생 때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덕질했고, 대학 초년생 때는 주어진 자유를 모두 덕질에 할애했다.
새벽 방청은 기본이고, 첫콘이 나은지 막콘이 나은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풀로 다 참석했다(티켓팅이 안 되면, 어떻게든 구했다).
비록 구 본진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터지는 바람에 씁쓸한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졸업 학년이 된 지금은, 모든 걸 쏟아붓고 싶어도 그러기 힘들었다.
덕질에 모든 걸 쏟는 것조차 젊음의 전유물이라면, 이제 종이에 갇힐 자신은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할까. 심지어 등록금도 자신이 벌어서 내기로 했는데.
오늘처럼 가볍게 모든 수업을 째는 사치는 앞으로 힘들겠지.
그래서 팬사인회 당첨 날에 사녹도 왔다. 멤버들한테 주기 위한 선물도 한 아름 싸 들고 왔다.
좌석에 앉아 지동화를 열심히 촬영하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앨범과 선물보따리를 들고, 마침내 최애 앞에 섰다.
지동화는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라고 인사드리고 싶은데, 아침에 봬서 그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와.”
팬싸는 오랜만에 오는 거라 얼굴 잊고 있었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역시, 지동화는. 자기 최애는.
아, 고급 레스토랑 홀 매니저가 왜 중요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괜히 블로센스 팬싸 후기에 지동화 기억력 찬양이 올라오는 게 아니다. 처음 보는 이에겐 처음 봬서 반갑다고, 일 년 만에 찾아온 사람에겐 다시 봐서 반갑다고 말하는 지동화는, 미친놈이다.
이런 애가 학계가 아니라 아이돌계에 있다니, 미칠 듯한, 배덕함.
멍해지려는 자신의 정신을 일깨웠다. 소중한 시간을 알차게 쓰려면!
“안 잊어 먹었어? 엄청 오랜만인데.”
그녀는 여유롭게 대화를 꺼냈다.
“음, 감사한 분들 얼굴은 못 잊겠더라고요.”
능숙하게 사인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 지동화, 그녀는 재빨리 선물을 꺼내 들었다.
“이거, 선물.”
종이 뭉치, 약 40장 정도는 되어 보이는 A4용지 묶음. 미리 스프링 제본까지 해 왔다.
지동화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종이를 받아들었다. 아무리 봐도 편지는 아닌 사이즈.
“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소중한 물건처럼 두 손에 꼭 쥐고 있는 지동화, 존나 귀엽다.
“내 졸업 논문 초본.”
자신의 최애가 지동화라 줄 수 있는 선물. 다른 아이돌이었으면 상상도 하지 않았을 짓을 스스로 저지른 걸 보면, 최애 따라서 자기도 미쳐 가나 보다.
표정 변화가 적은 최애는 동공을 한껏 키웠다. 입을 약간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하는 최애. 아, 잘 골랐다, 선물.
지동화는 잠시 표지를 훑어보다 결의에 찬, 진지한 눈으로 답했다.
“꼭, 정독하고 감상평 전해 드릴게요.”
“하하, 이번에 나 대학원 들어가기로 확정했어.”
“언어학은 저는 무지한데, 존경스러워요.”
제목만 읽고 언어학 논문인 걸 아는 순간 무지한 게 아니다.
“석박사 하면 조금 바빠서 자주 못 와도, 늘 응원할 거야!”
지동화는 그에 가만히 앨범을 두 손으로 눌렀다.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다음 차례예요.’라고 말하더라도 보낼 생각이 없다는 뜻인가 보다.
짧게 고민하던 지동화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가 언어학에 더 관심을 갖도록 해야겠네요.”
“응?”
“쓰신 논문이 나오면, 곧바로 읽어 볼 수 있게끔.”
“…….”
“그리고, 다시 오실 날이 있다면 모르는 걸 여쭤보겠습니다.”
아니, 은은한 광기로 자신을 홀리는 건가.
“그땐 잘 가르쳐 주세요.”
그녀는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덕질 N년 차, 팬사인회에서 떨 레벨은 지났는데, 이런 멘트는 처음이다.
게다가 저건 마구잡이로 남발하는 백지수표가 아니라, 정말 자신은 그렇게 하겠다는 확신이잖아.
지동화에게선 꽤 긴 시간이 흐르더라도, 그러니까 자신이 석박사를 마칠 때가 되더라도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자신의 최애가 함부로 말을 뱉지 않는 성격인 걸 잘 알고 있는 그녀는,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지동화, 너, 여자 무서운 줄 모르고! 그러다가 다음 앨범 몇백만 장을 팔려고!
“세종대왕상 소식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땐 제가 사인 받아야겠네요.”
그러고는 능청스럽게 농담까지 던지다니. 무섭다, 지동화.
앨범 산 값이 아깝게 느껴지기는커녕 더 쓰고 싶게 만들다니.
심지어 그럴 의도 전혀 없이 진지하게 자신의 앞길을 응원하면서 그렇게 만들다니.
원래 무자각으로 사람 홀리는 게 제일 무서운 법인데, 자신의 최애는 어느새 이리도 훌륭한 아이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자주 못 보러 갈 테니 미리 응원의 말을 전하러 갔다가 코 꿰여서 이미 다음 앨범 대비 적금 든 썰’을 풀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팬사인회가 끝날 때는 늘 그렇듯, 아쉽다. 팬분들은 항상 익명성을 띠고 있으니까.
요즘은 기술의 발전 덕분에 유버스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창구가 늘었지만, 면대면 대화는 아니니까.
익명성 너머가 항상 그렇듯 거기엔 수많은 사연과 삶이 있으니, 그만큼 응원해 드리고 싶은데, 참 아쉽다. 라디오에 사연을 더 많이 받으면 좋겠는데.
나는 눈앞에 놓인 장기판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장기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생각이다.
“…참, 붉네.”
나는 이렇게 붉은 나무로 만든 장기판을 처음 보는데, 넌 어때, 현재.
“그러게요.”
“피 튀어도 모르겠어.”
“그렇네요.”
“이게, 목화가 보낸 선물이라고.”
이현재는 가만히 손으로 장기판을 톡톡 누르며 웃었다.
“현진이가 갑자기 저한테 이걸 보내더라구요.”
“…응.”
“들어보니까, 목화 형이 동화 형한테 보내는 선물인데 잠시만 숨겨 달라고 했거든요?”
세상에.
“지금, 장기로 싸우자는…….”
“그런 것 같죠?”
대체 어느 형제가 그걸로 싸우는데.
“제가 조금 수소문해 봤는데, ‘소원권’을 걸구 결투를 신청할 거래요.”
역시, 제일 유능해.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으로 뭘 원하는지는 현진이두 모른대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구라 같아서 한번 협박해 볼까 고민 중이에요.”
“그래도 괜찮아?”
“뭐, 어때요. 형을 위해서라면 현진이 정도는 제가 직접 조져 놓을게요.”
이건, 유능하다는 단어로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어쨌든, 들은 바로는 세 가지 종목을 정하구, 2선승 하는 쪽이 소원권을 쟁취하는 걸 구상 중이래요.”
…내 동생도 정말 맛이 갔구나. 이렇게 재롱을 떨다니.
그것도 종목 중 하나는 장기, 만용은 미덕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아 있었으면 목화를 보며 얼마나 고개를 저었을지.
“그리구, 그걸 찍어서 편집한 다음에 X튜브 같은 데에 올릴 거라 하더라구요.”
이현재는 웃었고, 나는 인상을 구겼다.
“왜 그렇게까지…….”
그냥 물으면 대답해 줄 건데, 미친 동생이.
어쩐지 일정표에 뭔지 모를 스케줄이 껴 있더라. 이거였구나.
형제지간 싸움을 아예 X튜브에 박제할 생각까지 하다니, 목화는 어디서부터 뒤틀린 걸까. 내 가정교육은,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형이, 절대 얘기해 줄 리 없다구 생각하나 봐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형은 한 번 숨기기로 마음먹은 이상, 절대 얘기해 줄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두 반드시 뱉어 내게 만들겠다는 생각인 거죠.”
결국 내 업보군, 망할.
“…흐음.”
그럼 답은 간단하다. 모든 종목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얘기해 주는 인간이라는 걸 친히 알려 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