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285)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285화(253/343)
마지막 음방도 끝나고 행사 일정이 있긴 하지만 꽤 여유로운 주간이 시작됐다.
콘서트 때문에 한 주 후면 사라질 평화지만 이현재는 이 한 주를 만끽하려 노력했다.
즐길 때 즐기고, 노동할 때 노동하는 게 삶을 즐겁게 살 수 있는 길 중 하나라는 걸 깨달은 덕분이다.
그런데 그렇게 편안해야 할 나날이었는데,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걸까.
“…자꾸, 한 수 차이로 지네요.”
“나도.”
“나도 그랬어, 현재야!”
장기판 앞에 앉아 있던 이현재, 채하민, 류이든은 괴상함을 느꼈다. 모두 두 수나 한 수 차이로 아쉽게 패배하고 있었으니까.
서로 장기 실력이 비슷한 게 아니다.
분명히 이현재가 훨씬 더 잘하고, 채하민과 류이든 중에선 류이든이 그나마 더 잘한다.
동화 형이 작업실에서 돌아오기 전에 시작됐던 ‘블로센스 배 장기 대회’를 개최하며 확실해진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비슷하게. ‘갖고 노는 거잖아요, 지금.’이라고 조용히 물어보고 싶었다.
어쩌다 이런 대회가 개최되었느냐, 사건은 항상 사소한 일로 시작됐다.
동화 형이 모든 비밀(이현재는 아직도 실감은 안 났다)을 말해 준 덕분에, 각각 숨기고 있던 사실을 툭툭 뱉어냈다.
목화 형의 계획은 무엇인지, 두 회사 사이에 어떤 일정 공유가 이뤄지고 있는지 등등.
그러던 중, 이현재가 지동화가 받은 선물이라며 장기판을 꺼내 보이자, 채하민이 ‘나 장기 잘 둬!’라며 자기 가슴을 팡팡 쳤다.
‘형이…, 장기를요?’
‘현재야아, 나도 상처받아아!’
‘그런 의도가 아니구, 그런 걸 좋아할 줄은 정말 몰랐어서요.’
‘내가 초등학교 장기 일등이었어.’
채하민과 이현재의 대화에 운동을 막 마치고 개운하게 씻고 나오던 류이든이 끼어들며 판이 커졌다.
‘와아, 나도 초등학생 때나 둬 봤던 것 같은데.’
‘저는 룰 정도만 알아요.’
류이든은 그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드디어 반격의 시간!’이라고 소리쳤다.
‘일등은 내가 소원 하나 들어줄게! 장기 대결 한번 하자! 동화한텐 내가 전화해서 사용 허락받을게!’
그렇게 시작된 블로센스 장기 대회, 보드게임에서 이현재에게 지는 것이 일상이었던 류이든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래도 형인데, 한 번은 이기고 싶으니까.
그리고 대회 중반까지, 초등학교 일등이라고 자신 있어 하던 채하민은 천천히 밑천이 드러났고, 룰만 아는 동생을 한 번 이겨 보려 했던 류이든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아아! 너 장기 안 둬 봤다며!’
‘…그래두 보드게임 하던 경력이 있는데요, 형. 추상 전략인데.’
즐거웠다.
이겨서 그런 게 아니라, 오랜만에 이렇게 보드게임을 하고 있으니까.
이현재가 승리에 심취해 류이든에게서 무엇을 뜯어낼지 고민하던 와중, 현관문이 열렸다.
‘아직 해?’
작업을 마쳤는지 진한 다크서클을 자랑하며 오랜만에 숙소에 돌아온 지동화. 약간 피곤한지 나른하게 물었다.
‘서열 정리는 끝났어요. 제가 1등.’
‘상품은?’
‘이든이 형이 소원 들어준다는데요.’
그러자 지동화가 자연스레 반대편 의자에 앉고 슬며시 웃었다.
어째선지 활동기보다 짙은 다크서클을 하고, 지동화는 장기판 위에 말을 올렸다.
‘그럼, 나도 참가할게.’
그리고 다시 현재, 꼴등부터 차근차근 짓밟으며 올라온 지동화가 이현재로부터 승리를 따낸 것이다.
“…형, 농락당한 거죠, 저.”
“음, 글쎄.”
어떻게 저렇게 맨정신이지.
오늘 하민이 형이 꼭 돌아오라고 난리를 쳐서 들어온 거지, 이틀간 작업실에서 살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장기판을 내려다보는 눈이 형형했다. 어떻게 그렇게 집중해서 장기를 두지.
“하민이 형이랑 장기 둘 때두 완전히 집중하는 거 보면서 혹시 했는데, 역시 안 되네요.”
최약체랑 장기를 두는데 아슬아슬하게 두길래 이기나 싶어서 설렜던 과거의 자신을, 한 대 때려 주고 싶다.
“집중 안 하면 쉽게 지는 게임이니까.”
지동화는 한 번 눈을 비볐다.
“그래서, 형, 소원권은 제약 있어?”
“…불공평해, 넌 서른이 넘는데!”
그럼 말부터 높여야지 않을까요, 형, 이현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무룩해진 채하민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원래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르잖아요, 형. 장기 못해도 세상에서 손해 볼 게 없어요.’
“내가 초등학생 때 뒀어도, 이겼을걸.”
남을 능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이 너무나 자명한 진실을 말하는 듯한 태도, 이현재는 사뭇 감탄했다.
저 형, 혹시 연구소에서 실험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 워낙에 비현실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정도 하나쯤은 추가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더 불공평하잖아.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억울하게.”
“근데, 목화 형은 형이 장기 잘 두는 거 모르나 봐요?”
그러지 않고서야 이걸 종목으로 선정할 리가 있나. 저 형보다 잘 두는 사람은 적어도 일반인은 아닐 것 같은데.
“알걸, 아마.”
“네?”
* * *
지목화는 핸드폰 메모장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목적 : 비밀을 지키는 형의 입을 열게 할 것.
공략 지점 1 : 자신과 한 약속은 무조건 지킨다.
공략 지점 2 : 주관은 뚜렷한데 해서 죽을 것 같지만 않으면 그닥 하고 싶지 않아도 분위기에 맞춰 준다.
지목화는 핸드폰을 껐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 필요한 건, 게임에서 지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확언과 마땅히 싸워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의 조성, 이 두 가지.
동화 형과 함께 화보를 찍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순간, 지목화는 모든 계획을 재빨리 실행에 옮겼다.
얼굴은 어머니를 닮았어도 성격은 아버지를 똑 닮아서 행동력이 대단하다던 지동화의 생각 그대로였다.
화보를 찍는 겸, 다른 컨텐츠도 같이 하고 싶다는 의견을 회사에 강력하게 어필하고, 다른 형들께 예의 바르게 싸움을 도와 달라고 부탁드리며 가정 내 전쟁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형은 조금 늦게 나와의 컨텐츠 및 화보 얘기를 듣게 되겠지만, 그때쯤 되면 거부하기 위해 드는 노력보다 ‘그냥 하지, 뭐.’라는 식으로 임하는 게 더 합리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미 분위기는 조성됐고, 이기면 그만이니까.
그러기 위해서 형이 이기고 싶다면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 줘야 한다.
“형, 무슨 고민 중?”
“동화 형 어떻게 이길지 고심 중.”
지목화는 김현진을 절대 믿지 않는다.
자기를 돕겠다며 지원군인 척하지만, 사실 전쟁 상인 같은 인간이라, 자기만 재미 보면 누가 이기든 그리 연연하지 않을 인간인 건 불 보듯 뻔하다.
“너, 장기판은 현재 씨한테 제대로 전해 줬어?”
“당근이지. 내가 또 한 부지런하잖아.”
“혹시 실수하진 않았지.”
“아이, 참. 형은 날 뭘로 보는 거야? 현재가 아무리 조져도 아무 말도 안 해 줬어!”
거짓말인 게 틀림없다. 저 묘하게 상기된 눈썹이 모든 걸 설명해 주니까.
나아가서 그는 블로센스의 멤버들이 자신에게 협조해 준다는 말조차 믿지 않았다.
동화 형 성격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겠지.
자기 동생이 자신과 대화조차 하지 않으면서 화가 났다는데, 알 수 있는 정보는 다 알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서 주변에 흘리면 된다. 전쟁에서 상대가 신뢰하는 사람을 속이는 건 늘 상책이다.
숨기려는 비밀이 대체 뭐길래, 자신이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지 지목화는 호기심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정말 중요한 거면, 한 대 때릴 거야. 만약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알고 있던 거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 대 칠 거야.
“근데 형, 형은 장기 잘 둬? 동화 형은 잘 둘 것 같긴 한데.”
아니, 동화 형한테 처참히 발릴 예정이야, 나는 더럽게 못 두거든.
그러나 지목화는 머릿속 생각을 입 밖에 그대로 뱉지 않았다.
“당연하지. 동화 형이랑 옛날에 했을 때 다 이겼거든.”
형이 전부 봐줬거든. 어렸을 땐 내가 진짜 잘하는 줄 알았지만.
그러니 이번에도 귀여운 동생이 멋모르고 나대는 걸로 하자. 자기 실력을 과신하는 귀여운 동생인 걸로.
지목화는 형이 가벼운 마음으로 와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착각하길 바랐다.
마음만 먹으면 이길 수 있다 싶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본래 싸울 마음을 먹었다면 나약함을 가장해야 한다. ‘전쟁은 속임수다’라는 손자병법의 말이 클래식인 이유가 있다.
“형이 가볍게 이기겠네. 소원권 타면 나도 반띵해 주라.”
“절대 안 돼. 돈으로 줄게.”
어딜 감히, 자신의 형한테 소원을 빌려고. 무엄하다. 그건 가족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 * *
나는 장기 말을 정리했다.
주문 제작인가 봐, 엄청 고풍스럽네, 이것도.
지난번 내복 사태 때 충격을 받고는 선물을 제대로 하겠다더니, 이걸 준비했나 보다. 기특해, 우리 동생.
“그럼 왜 장기를 골랐대요? 다른 게 훨씬 나을 텐데.”
“방심하라는 거지.”
나는 이틀 동안 작업실에서 대체 동생이 무슨 생각 중일지 차근차근 고민해 봤다.
굳이 장기판을, 굳이 이현재에게 맡겨서, 굳이 나한테까지 흘러 들어가라는 식으로 풀어놓은 정보다.
어떻게든 방심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양새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장기를 정말 자신 있어서 골랐다면, 장기판은 직전에 꺼내는 게 낫지, 굳이 이렇게 돌려 돌려 현재에게 보관해 달라고 부탁을 할 리가 없다.
아마도 자기를 도와주는 김현진한테도 모든 걸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수룩함을 가장하고 상대방이 실수하길 바라다니, 전쟁에서 요행을 바라는 건 하책이다. 그렇게 장기를 뒀다간 채하민한테도 질 게 뻔하지.
나는 조금 설렐 지경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 가기 싫어서 자기가 계책을 짜면, 손수 하나하나 깨부숴줬던 게 나라는 걸, 우리 목화는 왜 잊었을까. 유년으로 돌아간 기분인걸.
일단 진한 씨부터 조져 볼까.
내 연락을 피할 수 없고, 목화와 가장 가까운 인간이니까. 사이 좋은 선후배 사이인데, 사내 비밀 정도는 말해 줘도 괜찮잖아.
* * *
“반가워, 형.”
“정말, 오랜만인데.”
서로 미소 지으며 마주 보는 얼굴, 한껏 꾸민 차림새.
나와 목화는 지금 복싱장처럼 꾸며진 세트 위에 마주 섰다.
돈을 좀 쓴 게 틀림없는, SF 영화에서 로봇들이 싸울 것 같은 곳, 그 위에 두 개의 핀 조명이 나와 목화를 비춰줬다.
“많이 바빴나 봐, 연락이 안 되던데.”
“응, 엄청. 이 방송 이름 고민도 했거든. 혁명, 나무는 겨울을 이긴다.”
“내가 아는 거랑 좀 다르네.”
이 방송은 ‘역전형제 : 겨울과 나무’라는 제목이잖아.
“이 프로젝트는 비정기적이지만, 앞으로 꾸준히 진행될 거야, 형.”
“오늘 처음으로 프로그램 기획 의도를 듣네.”
우리 회사 사람들도 설명을 안 해 주더라고, 세상에.
진한 씨 멱살 잡고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장해진 팀장님과 협력 PD 한 명이 대찬성을 했다던데, PD는 아마도 그 인간이겠지.
“이건, 나나 형이 서로에게 불만이 있을 때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거든!”
이어지는 설명. 이 프로그램의 의도와 방향성을 드디어, 오늘 처음 듣게 됐다.
목화의 설명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정 내 불화를 컨텐츠화하자는 미친 아이디어(목화 제공)에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중세 귀족이 장갑을 던지는 것과 그 의미가 같다.
다행히도 이건 목숨을 걸지는 않지만, 일대일 결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양식이니.
목화는 설명을 끝마치고 선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버지는 성격이 괴팍한 면이 있었지, 어쩜 저렇게 닮았을까.
어머니와 성격이 닮은 나로서는 미친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신청인, 지목화, 사유, 형에게 불만이 쌓여서 해소하고 싶습니다.”
목화가 말을 끝내자 복싱 링 위에 조명이 들어오며 근미래적인 투기장이 반짝였다.
대체, 뭐 하는 건데, 목화야. 왜 회삿돈을 이런 데 쓰고 있어.
하얀 빛이 역광으로 들어오자 신이 강림한 것 같은 비주얼의 목화가 소리쳤다.
“비폭력적인 게임에서 이긴 사람의 뜻대로 사건을 해결해야만 하는 풍습, 좋지? 우리 집안 가풍으로 물려주자, 후대에.”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우리 미친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