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286)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286화(254/343)
목화가 설명을 끝마치자, 링 위에 장기판이 세팅되었다.
목화로서는 최소한의 배려인 동시에, 방심시키기 위한 함정으로 보인다.
“신청한 사람한테 너무 유리하잖아.”
“불만이 있는 걸 몰라준 죄지.”
목화가 불퉁하게 쏘았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집안 가풍이 되기 위해선 더 합리적일 필요가 있다. 우리 후대를 위해 정하는 규칙인데, 틀은 잡아야지 않을까.
“다음부턴 2 대 1로 고르자. 종목도 나눠서 다양한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그래야 후대에도 두고두고 써먹을 테니까.”
이렇게 되면 나중에 우리 자손이 유산 상속 문제나, 가문의 대표를 선정하는 데의 어려움을 겪을 때, 꽤 공평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신청한 사람이 졌을 때 감수해야 할 페널티를 크게 하면 더욱 공정해지겠지.
즉, 추잡하게 놀지 말고 규칙을 정해서 놀자는 원칙이다.
그로티우스가 쓴 ‘전쟁과 평화의 법’처럼 싸우려거든 규칙은 정해 두자는 의도인 셈이다.
“우와, 이렇게 가풍이 발전하는 거구나. 명문 지 가(家) 만들자, 우리. 이거 이름은 뭐로 하지? 고민해 봤는데 모르겠더라고.”
“가풍이니까 고풍스럽게 지어야겠네. 목동의 놀이로 할까.”
쓸데없이 낭만적인 구석이 있으니까.
집안싸움은 발발하면 진흙탕 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식으로 해결한다면 꽤 아름답다.
목가적인 분위기를 한껏 넣어두면, 그 본질을 가릴 수 있다.
촬영을 구경하겠다며 놀러 온 류이든이 스탭분들에게 커피를 돌리다가 ‘쟤네는 대체 뭐 하는…….’이라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목동의 놀이, 괜찮네. 엄청 평화로워 보여. 보더콜리 같은 개 한 마리 달고 다닐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류이든과 함께 왔나. 양 떼 몰이 개로 류이든은 딱 좋은데.
“세팅 끝났어요!”
스태프분들도 류이든과 비슷한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쟤넨, 대체 뭐 하는 애들일까.’라는 눈빛.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투는 형제에 불과했다(보통 형제가 싸울 때 이렇게 규칙을 정하고 카메라로 촬영하며 복싱장 위에서 장기를 두지는 않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은 일부러 무시했다.).
“그럼, 첫 번째 게임 장기, 시작할까!”
테이블에 앉는 목화.
그 앞에는 내게 선물로 준 적색 장기판이 놓여 있었다.
“자신 있어?”
“당연하지. 내가 꼭 이겨줄게. 어렸을 때도 내가 다 이겼잖아.”
아직도 진실하지 못하네, 목화야. 버리는 패잖아, 이건.
* * *
한 수, 한 수가 오가면, 어쩔 수 없이 어렸을 적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연상 작용은 정말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그때는 놀거리가 적었다.
우리 집에는 TV에서 케이블 방송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는 훌륭한 놀이 수단이었다.
나보다 키가 작았던 동생이 어린애답게 아무렇게나 장기 말을 움직이면,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아슬아슬하게 지는 수를 뒀다.
그래야 애가 흥미를 잃지 않고 재밌어했으니까.
그때의 목화는 순진함의 극치라서, 장기 말을 옮길 때도 그런 성향이 발현됐는데, 모든 의도가 투명하고, 말을 하나 잡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지.
“와, 형, 옛날 생각 난다. 말 위치부터 가르쳐 줬었잖아.”
“그랬지.”
“나는 옛날에 비해 실력 엄청 늘었어, 딱 기다려, 지동화. 내가 발라 줄게.”
목화는 자신감 넘치게 말을 옮겼다.
누가 보더라도 잘못 둔 것 같은 위치.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면 걸리는 함정이다. 한 세 수 정도 앞에 실체가 드러나는 수.
장기를 두는 스타일은 사람마다 다르고, 보통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에 따라서 스타일이 결정되곤 한다.
어떤 말을 좋아하는지, 어떤 말을 희생시키려 하는지, 그 모든 선택이 한 사람의 성격과 닮아 있다.
아버지는 장기를 두면서 내게 ‘너는 살면서 고생하겠어. 나랑 똑같다, 우리 동화!’라고 말하곤 하셨다.
“…많이 변했네, 옛날이랑.”
실수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을 찾아서 노리는 게 순진은 무슨, 의뭉스러워졌다.
어쩌면 목화가 장기를 선정한 이유는, 이걸 느끼게 하려던 것도 있지 않을까.
“십 년 정도 지났으니까.”
천천히 장기판 위를 응시했다.
장기는 긴장감이 적다. 수비적으로 플레이하는 게 가장 현명할 정도로.
체스에는 있는 여러 룰이 부재해서,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두면 게임이 루즈해지는 감이 있다.
그러니까, 실력이 비슷하면 그렇다는 거다.
조여 들어가는 포진. 목화가 말을 두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나는 비슷한 시간에 툭툭, 말을 뒀다.
목화가 인상을 찌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내 허탈한 웃음을 한 번 흘리며 나를 불렀다.
“형.”
“응.”
“난, 가끔 이렇게 장기 두면서 놀던 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래?”
“응. 지금도 당연히 엄청 행복한데, 그런 거 있잖아. 고향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눈물 나는 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목화의 진영.
천천히 죽어 가면서도 목화는 최선을 다해 지키려 노력했다.
“근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불만인 게 하나 있거든.”
나는 말을 옮기려다가 순간 손을 멈칫했다. 목화의 입에선 대체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형은 항상 나를 너무 봐줘서, 그게 참 그래. 어렸을 때야 진짜 뇌에 주름이 없는 상태였다지만!”
긴장했던 게 우스워지는 불만.
원래 부모 눈에는 애가 커도 애로 보인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목화야. 네게 내가 부모처럼 느껴졌다던 말이, 나는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말을 움직이는 데 망설임이 없어졌다.
이번에도 점점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목화와 이번에는 점점 더 짧은 시간이 걸리는 나.
예정된 절벽으로 목화의 등을 떠미는 게 참 즐겁다.
미소가 새어 나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을 옮기고 집중을 풀었다.
올곧이 하나의 길만을 보며 달려오다 긴장이 풀리면 탈력감이 쏟아지곤 한다. 의자에 조금 편히 자세를 기대며, 선언했다.
“장군.”
목화는 장기판을 내려다봤다.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려는 동공의 움직임. 한참을 고심하다가 물었다.
“…이거, 이기는 수 있어?”
“없어.”
그렇게 달려왔거든. 네가 보여 주지 않아서 불만이라던 모습이야, 목화.
“봐, 어렸을 때도 다 봐준 거잖아.”
끄덕.
“아, 정말. 어쩌지, 우리 형. 다음 게임에서 제대로 알려 줘야겠다. 더는 봐줄 만한 동생이 아니라는 걸. 만만한 인간이 아니지, 이제.”
“다음 게임은 뭔데?”
목화는 장기판을 들어 그대로 뒤로 옮기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폭력적이네, 목화.
그대로 왼팔로 책상을 잡고, 오른팔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결연한 눈동자, 반드시 나를 이기고 찍어누르겠다는 의지의 형상.
“팔씨름.”
음, 세상에. 예상은 했지만, 정말.
역사는 부모를 죽이는 과정이라고 하던데, 내가 목화한테 죽을 날이 오늘인가 보다.
* * *
손을 맞잡으면서 깨달았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목화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연습실에서 이틀 밤을 새우며 추측한 건 전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공식 심판으로 온 류이든입니다. 지 씨 가문의 유구한 전통인 목동의 놀이 심판으로 참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목화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지만, 내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으려는지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손 크기는 비슷한데, 세상에, 무슨 악력이.
“심판, 상대방이 손에 힘을 너무 주는데, 제재가 필요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목화 씨한테 매수당한 상태라.”
그러나 류이든은 기본적으로 공정한 경쟁을 사랑하는 인간. 손을 흔들며 목화의 힘을 살살 풀었다.
“시작하기 전까지 힘주기 금지이며, 삼판이승입니다. 오른손, 왼손, 오른손 순서로 할 거예요.”
“하하, 형, 팔에 근육이 그렇게 없어서는! 밥 좀 먹어야겠다.”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 댁에 들렀을 때 들을 법한 말이네. 살면서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소리를 너한테 들을 줄은.
“자, 선수분들, 준비하고, 시작!”
어깨부터, 시작돼서 경직되는 근육. 손아귀에 힘점을 모으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툭, 그대로, 목화의 손을, 밀었.
“…형, 설마 최선이야?”
흔들림 없이 평온한 목화의 목소리.
“봐주는 건 싫대도.”
닥쳐 줄래, 동생. 지금 이를 악무느라 대답할 여력이 없거든.
그러나 내 속마음이 전해질 턱이 없고, 목화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사뭇 놀랐다.
“…진짜구나.”
그러자 맞잡은 손에 악력이 강해졌다.
일정한 각속도로 책상에 다가가는 손. 여유롭게 웃던 목화가 나처럼 이를 악물더니, 단번에 손등이 바닥에 닿았다.
“옛날엔 내가 졌는데!”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노력하지 말걸. 최선을 다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 죽고 싶어지는 건 처음이다.
류이든은 공식 심판이지만 목화에게 매수당한 놈답게 목화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아주 죽여 버려!’라고 속삭이고, 목화는 승리가 너무 달콤한 듯 복싱장에 무릎을 꿇고 환호했다.
“내가 살면서 형을 이기는 날이!”
“아직 안 끝났어, 목화.”
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바닥을 구르며 환호하는 목화와 그런 목화를 따르는 개 한 마리(우리 집 개니까 나를 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배신감이 치민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는, 시간이 멈춘 듯 움찔거리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양손잡이거든.”
어안이 벙벙한 표정.
아무래도 내가 승부욕을 불태우는 것 같은 모양새라 당황한 듯싶다.
류이든에 따르면, 나와 승부욕이라는 단어는 더럽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실제로 승리보다는 승리의 결과물이 더 중요한 인간이라, 승리 자체에 집착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목화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까.
* * *
당연히 졌다. 왼손은 이겼으니 유일한 위안이다.
현실은 어째서 오른손잡이 중심인 걸까.
다수의 윤리와 질서로 소수가 피해를 입지 않게끔 해야 한다는 건 헌법에도 적혀 있는 사항인데, 망할.
세 번째 게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세트에 변화가 있는지 우리에겐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형, 여기 물.”
“…정말 다 컸네.”
“그렇다니까. 형이 대체 뭘 숨기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듣고 말 거야.”
‘내가 죽더라도 동생은 살아야 한다.’라는 명제는 언제나 내게 참이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뿌리박힌 사고방식이니까.
고작 이 사고방식 하나 때문에 내가 시공간 이동을 경험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깊게 뿌리박혀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저 명제에서 도출되는 수많은 결론 중 하나가 ‘내가 고생하더라도 동생은 행복해야 한다.’이다.
다른 말로 풀어 쓰면 나의 고생을 동생에게 전가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목화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자신이 소원권을 얻는 것과는 별개로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하나 있었나 보다.
“내 사고방식을 뿌리부터 고치려나 보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자기한테도 의지해 달라고 떼를 쓰는 동생을 어쩌면 좋을까.
“당연하지.”
목화는 물을 받아 가는 내게 미소를 지어 줬다.
“불가능할걸.”
“그러면 몇 번이고 우리끼리 놀이하는 거지, 뭐.”
“그래서, 마지막 게임은 뭔데.”
“퀴즈.”
…뭐지, 애초에 이길 생각이 없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