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287)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287화(255/343)
SF 형식의 복싱장이었던 세트에, 현수막이 걸렸다.
휘황찬란한 폰트로 ‘겨울과 나무 퀴즈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과해. 그것도 엄청.
뭔데, 저건. 시골 마을에서 오래도록 살았던 아이가 한국대 입학했을 때 마을 회관 앞에 걸릴 법한 퀄리티잖아. 세트의 퀄리티에 비해 너무…….
“저거 내가 직접 디자인했어. 정성 쩔지.”
“아름답네.”
“…진짜?”
“응, 전위적이야.”
미학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와, 내 주변에서 다 저거 별로라고 뭐라 뭐라 했는데.”
“예술가 중엔 죽고 나서 유명해지는 경우도 많으니까.”
“형은 가끔 보면…….”
말끝을 흐렸다. 그 뒤에 무슨 말이 있을지 추측하는 건 관두자.
“그래서, 왜 퀴즈 자신 있어?”
“형, 형이 나를 약간 얕보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좀 똑똑해.”
자신감 넘치는 표정.
똑똑한 거야 알고 있으니까 됐고, 최소한 나보다 동생 놈이 더 잘 아는 분야를 골라놨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 리가.
진한 씨를 여러 번 조졌는데도 불구하고 얻은 거라고는 ‘잘 모르는 분야는 공부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라는 약간의 언질뿐.
아마 그게 이 퀴즈쇼를 대비하라는 말이었겠지.
덕분에 목화는 알면서 나는 잘 모르는 분야, 최대한 머리에 쑤셔 박아 왔다.
유행어, 요즘 것들 문화와 밈, 연예계 이슈, 과거 연예계 역사 등 무엇이든 괜찮다.
벼락치기도 효율적으로 하면 꽤 나쁘지 않다. 난 현재 사람들이 언어를 향유하는 방식의 최첨단에 서 있는 셈이다.
나는 조금은 호기롭게 물었다.
“분야는?”
“상식 퀴즈.”
그러나 신조어 따위나 기대하고 있던 내게 목화는 전혀 다른 답을 던졌다.
대체, 뭐지. 이건 자만심이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는데.
“목화야.”
“응?”
“요즘 힘든 일이 있는지 걱정돼.”
그러자 목화는 곧바로 거만하게 고개를 꺾었다.
“우리 형은 언제부터 말로만 싸웠어?”
“늘 말하지만 폭력은 옳지 않다니까.”
“형, 이든이 형한테 다 들었어.”
“…저런.”
그러고 보니 류이든, PD님과 대화를 주고받더니 팔씨름 때 갑자기 심판으로 기용됐다.
저 망할 개는 대체, 커피 돌리러 왔다가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녹였다. 목화도 느긋하게 늘어졌다.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된 단 몇십 분간의 휴전.
“이든이 형은 역시 심판복 잘 어울린다.”
“…역시?”
역시라니. 예전에 저딴 걸 상상한 적 있다고.
나는 꺼림칙한 기분에 목화를 돌아봤다.
“왜?”
“심판복 입을 걸, 예상이라도 했나 보네.”
“당연하지. 내가 부탁드렸으니까.”
호로록, 커피를 마시는 소리.
“원래 대본에도 있었거든, 이든이 형은 미리 받으셨어.”
…세상에. 나는 손에 힘이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류이든한텐 아무것도 전해 듣지 못했는데.
경직된 내 얼굴을 보더니 목화가 생긋 웃었다.
“형, 다른 멤버들을 너무 믿으면 어떡해. 나는 형이 옛날 연예인 데뷔 연도부터 유행어 공부까지 한 거 다 들었는데.”
이번엔 몸이 굳었다. 목화의 말이 해석되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 개가, 내 신뢰를 저버렸다는 거잖아. 그건 말도 안 되는 문장이다.
“우리 형도 많이 변했다, 그치. 옛날엔 세상에 믿을 사람은 죽은 사람뿐이라는 식으로 살았는데 말이야.”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격세지감을 느끼는 노인처럼 의자에 몸을 누이는 목화.
그리고 저편에서 이쪽의 눈치를 한껏 보고 있는 류이든까지. 내 표정을 보고 전부 들통났음을 깨달은 모양새였다.
“…세상에.”
주인도 못 알아보는 개는 길러도 의미가 없잖아.
아니, 개가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걸 못 알아챈 주인에게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 * *
“자, 오늘 특별 게스트! 몰래 온 손님! 커피 돌리러 왔다가 심판 보고 있는 류이든입니다!”
MC 특유의 쩌렁쩌렁한 발성으로 소리치는 류이든. 대본을 아주 씹어먹었는지 한 단어도 절지 않았다.
개새끼.
품위 없는 욕지거리가 입안을 맴돌았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미소를 잊어선 안 된다. 오늘 촬영이 끝나면, 채하민과 함께 류이든 독살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시선을 조금 돌리면, 한껏 장식된 단상 뒤에 서서 자랑스럽게 웃고 있는 목화가 보인다.
그리고, 조금 초라한 단상에 얌전히 서 있는 나.
세트장에서, 나에 대한 악의가 느껴졌다.
심지어 목화의 단상은 조금 위에 설치되어 있어서 나와 목화의 위치 사이 상하가 형성되어 있었다.
음, 이건 퀴즈쇼보다는 재판에 조금 더 어울리는 모양새지 않을까, 목화야.
“자, 그럼 오늘 퀴즈쇼의 룰은 단순합니다! 제가 두 분 중 한 분을 정해 문제를 드리면 맞혀 주시면 돼요. 예를 들어서, 동화 씨! 한국 최초의 소설로 널리 알려진 이 책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나는 별생각 없이 내 탁상 위 화면에 ‘금오신화’라고 적었다.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곤 하지만, 널리 알려진 건 이거다.
“네, 그런데 동화 씨가 이렇게 맞힐 때, 목화 씨는 가만히 있느냐! 아니에요.”
“와! 혹시 동화 형이 정답을 맞힐지 맞히지 않을지 예상이라도 하나요?”
“맞습니다! 이야, 역시 동화 동생이라 그런지 예리한데요?”
염병을 떠는구나.
“목화 씨, 예측하셨나요?”
“네!”
목화는 화면에 나타난 무언가를 꾹 눌렀다. 아마 O와 X 같은 게 떠 있었겠지.
“그럼, 확인해 볼까요?”
류이든의 양옆에 설치된 화면이 각각 내 답과 ‘O’라는 표시를 띄웠다.
“이 경우, 서로 1점입니다. 답을 맞히고, 예상이 맞아서.”
그러자 이번엔 O 표시가 X로 바뀌었다.
“이 경우에는, 동화 씨가 2점. 예측을 틀리면 상대방에게 점수 1점을 주게 되는 거죠.”
다음에는 내 답이 백지로 바뀌었다.
“이러면 목화 씨만 1점.”
마지막으로 X가 다시 O로 바뀌었다.
“이러면 서로 0점. 이해되셨나요?”
류이든과 시선이 마주쳐서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눈으로 답했다. 너는 반드시 죽일 거다. 승리의 축배로 네 피를 담아 마실 거야, 이든.
류이든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손으로 뒷덜미를 주물럭거렸다.
그래, 내가 미쳤지. 믿을 걸 믿었어야 했다. 채하민도 아니고, 류이든은 이런 일에는 장난치기 일쑤인 짐승인데.
이 게임의 기획 의도를 생각해야 한다. 목화가 마지막 게임으로 이걸 내세웠다는 건,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니까.
기본적으로는 서로가 답을 아는지 정확히 추측하는 게임이 되겠지. 상대의 상식이 어느 정도일지 추측하고, 표정이나 대화 속에서도 힌트를 얻어서.
다만 상대가 답을 알 확률이 높아지면 결국 가위바위보가 되어 버리고 만다.
“형은 어차피 답 다 알 것 같아서 문제네!”
마치 지금 나처럼 대부분의 답을 알 것이 자명할 때는 심리전의 탈을 쓴 가위바위보가 되고 만다.
일부러 틀렸을 때, 기댓값은 1과 ―1. 그냥 맞혔을 때는 2와 0. 당연히 그냥 맞히는 게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이지만.
“근데 형, 나는 진짜 모르는 것도 있다? 심리전도 못 걸어.”
과연 내가, 목화의 상식이 어느 정도일지 정확히 추측할 수 있을까. 내가 전부 그냥 맞힌다고 했을 때,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얼마나 내가 불리해. 형은 다 알고, 나는 절반 정도 모를 텐데.”
“…글쎄.”
아는 게 더 불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너는 딱 하나, 내가 사기를 치고 있는지 아닌지만 고민하면 그만이지만.
목화는 내 답을 듣고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완전한 무표정. 얼굴 근육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표정을 읽을 걸 원천에 차단하겠다는 강렬한 의지.
“그럼, 시작할까요? 두 분 모두 열 개씩만 답해 주시면 끝납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진지한 목화의 표정을 보니, 새삼 깨달았다.
우리 뭘 하고 있는 거야, 목화.
보통 형제가 싸울 때 이렇게 싸우던가. 아니면 우리가 특이한 건가. 정말 잘 모르겠다.
그러나 목화가 진지하게 임한다면, 나 역시 그래야 한다. 팔씨름을 통해 목화가 전하고 싶었던 한 가지 메시지를 이해했으니까.
나 역시, 무표정을 지었다.
* * *
류이든은 도망치고 싶었다.
뭐지, 분명, 분명 형제들끼리 장난스레 싸우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지목화에게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들은 얘기는 단순했다.
‘동화 형 옛날 사진들, 탐나지 않으세요?’ 류이든은 앞뒤 잴 것도 없이 ‘탐나요.’라고 답했고, ‘그럼, 형한테 한 번 이기게 도와주세요!’라는 간절한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분명히 형한테 한 번도 못 이겨 봐서 분한, 귀여운 동생의 투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분위기는 뭘까.
서로 포커페이스에,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평소의 훈훈함은 다 사라져 버리고 냉랭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아, 뭔데요! 목화 씨! 분명 형제끼리 가볍게 투닥거리는 거라며! 배신 아니라며! 서로 장난치는 거라며! 이렇게 다투는 게 일상이라며! 그리고 왜 말해요! 비밀로 해 주기로 했으면서!’
류이든은 목에서 피를 토하듯이 소리치고 싶었다.
전쟁이니 뭐니 했지만, 솔직히 류이든은 지목화를 돕고 싶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자신에게 의지해 주지 않을 때 어떤 심정인지 잘 아니까.
하지만, 그래도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동화도 저렇게 진지한 걸 보면, 오늘 돌아가서 지동화 손에 죽을 게 너무 자명해 보인다.
설마 처음으로 벽돌 없이 손으로 맞는 건 아닐까.
“그, 그럼 첫 번째 문제입니다! 동화 씨가 답해 주세요!”
“네.”
‘냉정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동화야. 내가 선 넘은 것 같아, 미안.’
“아프가니스탄의 수도는?”
지동화는 칸막이 너머로, 무엇을 쓰는지 모르게, 손목만을 움직여 글자를 적고 있었다.
“형, 답 알아?”
무표정으로 말하지 마세요, 목화 씨. 원래 엄청 해맑잖아요.
“글쎄.”
“…아는 건 분명한데, 제대로 적었을지 모르겠어. 내 눈 좀 봐봐.”
마주치는 눈. 그리고 정적.
류이든은 입술을 깨물었다.
“답은, 다 적으셨나요?”
“네.”
“그, 럼, 목화 씨 예측해 주세요.”
“…하, 잘 모르겠다!”
지목화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체념에 가까운 감정.
지동화는 그걸 보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지동화의 표정을 잘 읽는다고 자신했던 류이든도,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류이든은 문득, 지동화가 자신들 앞에서 얼마나 무장 해제 되어 있는지 깨달았다.
“형, 그거 알아?”
대답 없이 눈으로 답하는 지동화.
“형은, 첫수는 항상 안정적으로 두더라고. 도박 수는 잘 안 두고. 어떻게 생각해.”
“…장기 실력이, 많이 늘었네.”
지동화는 표정이 약간 흐트러지더니 살짝 웃음을 흘렸다. 그에 지목화가 선택을 마친 듯, 손을 들어 화면을 꾹 눌렀다.
“예, 예측이 끝났으니 공개하겠습니다.”
동시에 켜지는 화면에, ‘카’와 ‘X’가 떴다.
“…정답은 카불, 목화 씨가 1점 획득합니다.”
류이든은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대화의 흐름상, 지동화가 정답을 맞혔어야 했던 것 아닌가.
“어떻게 알았어?”
그러나 1점을 손해 본 인간이라기엔 지동화는 너무 냉정했고.
“몰라, 감이라서.”
1점을 앞서간 인간이라기에도 지목화는 너무 냉정했다.
그리고 MC를 보는 인간이라기엔 류이든은 마이크를 놓고 도망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