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303)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303화(271/343)
콘서트 무대 기획 회의.
우리가 의견을 내는 건 세부적인 부분이고, 전체적인 컨셉 및 기획은 회사에서 기획해 주는 걸 대개 따른다.
블루밍 파라다이스. 꽃 피는 낙원.
지금 이 이름을 보면서도 별생각이 들지 않는 건, 그만큼이나 내가 이 업계에 익숙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낙원이 뭔지 그리고 꽃이 피기는 하는진 둘째 치고, ‘우리 콘서트는 낙원입니다.’라는 식의 문구가 조금, 공연이 끝나고 퀄리티를 인정받은 후에나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싶은.
“이름은 여러분들 별명 고려해서 꽃 느낌 나게 정했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어유, 당연하죠.”
류이든이 넉살 좋게 웃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도 이름이 하나 더 있어요.”
팀장님이 PPT를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Betrayal Paranoia’라고 적힌 문구.
…어색한데. 억지로 첫 글자를 B.P.에 맞추려고 애를 쓴 것 같아.
이현재도 저게 뭔가 싶은 눈으로 쳐다보다가 나를 흘깃 쳐다봤다.
오랜만에 과외생이 내게 학술적 질문을 했지만, 나도 답을 알지 못한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타인의 배신을 의심하는 편집증을 뜻하는 거라면, 의학 용어가 따로 있을 테고.
“B가 현재 제외 나머지, P가 현재.”
장해진 팀장님이 웃었다.
“전부 현재 관점.”
아, 세계관 종결인가 보다.
* * *
이현재는 자신의 모든 삶을 천천히 회고했다. 그리고 삶 속에 새겼던 수많은 약속을 되새겼다.
분명히, 기억해 준다고, 약속했다.
조선 중엽(흥), 서양 중세(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현대(벚꽃 낙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순간에 얼굴을 마주쳤던 이 인간들은, 자신에게 약속했다.
죽어 가는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음 생에 보자는 내 인사에 웃으며 답해 줬다.
실망은 이미 지났고, 우울함은 진즉에 끝났으며, 스스로 의심하는 것조차 지쳤다.
그저, 이현재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랐다. 함께 보냈던 추억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적어도 자신과 저들이 이번 만남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현재는 소파에 앉았다. 지동화가 의사로 일하고 있는 병원.
콧노래를 불렀다. 현대 과학이 발전한 덕분일까.
눈을 감았다. 앞으로, 이런 삶이 반복된다는 거구나.
어렴풋이 감은 왔다. 지동화는 점점 더 이성적으로 변했고, 다른 형들조차 자신을 보는 눈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어 갔으니까.
가까이 지낸다면 비밀로 둘 자신은 없다. 그러니 앞으론 형들과 거리를 두고 살거나, 말하고 나서 병원에 입원되거나, 둘 중 하나다.
“…으흠.”
흥겹게 약을 먹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다. 지동화가 돌팔이거나 자신이 병증이 없어야 한다.
결론은 단순하다. 자신은 정상이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현재는 여전히 그들을 믿는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배신할 리가 없다.
자신에게 늘 따스했던 형들인데, 진짜일 리가 없다. 쭉 이어진 기나긴 삶 속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을 버린 적 없잖아.
이현재의 견고한 신뢰는 일시적 현상보다는 본능에 더 가까웠다.
동물의 새끼가 본능에 따라 움직이듯이,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만들어진 신뢰는 바뀔 수 없다.
그래서 이현재는 현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악몽이거나, 환상이거나. 뭐든 좋아. 현실이 아니면 그만이다.
마치 콰인이 만들어 둔 논리 체계처럼 ‘형들은 날 버리지 않는다.’라는 하나의 문장을 증명하기 위해, 이현재는 찬찬히 모든 것들을 부정해 나갔다.
제게 무심한 눈초리로 환자 대하듯 하는 지동화는 허상이다. 이번에는 자신의 친형으로 태어났으면서 병원에 자신을 집어넣은 류이든도 허상이다.
채하민도, 석준도, 모두 거짓이면, 형들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다.
굳건한 믿음이 모든 걸 의심하게 만드는 역설, 그 틈을 비집고 이현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그곳엔 낙원이 있다. 폐허 속에서 그저 반복될 뿐인 하루를 보내는 형들과 자신이 있다(클라우디 블루).
“이게, 현실인가 봐.”
그 이후로 지동화는 수많은 상담을 통해 이현재의 눈을 뜨게 하려 했지만, 마음속에 생긴 의심은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마지막 시작).
뱀 몇 마리가 부수기엔, 이현재에게 그것은 너무 단단한 현실이 되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은 좀 어때?”
병문안을 온 채하민이 조심스레 옆에 앉았다.
“현실이에요.”
이현재는 확신했다.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웃으며 답해 줄 때, 채하민은 울상을 짓고 말았다.
지동화에게 들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말고, 그저 들어주라고.
“…응. 알아.”
“아니요, 형은 몰라요.”
단호하다. 진리를 알고 있는 선지자처럼, 자신이 한 말에 한 치의 망설임이 없다.
“형은, 제가 알던 형이 아니잖아요.”
“…그래?”
“우린 고작 유치원 동창이 아닌걸요.”
그렇게 말하는 이현재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한껏 집중하며 연극을 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푸흡!”
류이든이 잘 보고 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와, 미안, 근데, 아니. 둘이 유치원 동창 설정은 공식이야?”
연습실 바닥에 누워 있던 이현재가 불퉁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집중 다 깨지구, 난리네요.”
“그러게, 이든.”
진지한 연극 중에 뜬금없는 포인트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건 조금 무례한 일이긴 하지.
회의실에서 팀장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알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콘서트 구성에 아주 약간 반영하려고요. 생각 없이 보면 그냥 신나고 즐거운데, 나중에 돌아가서 곱씹다가 아, 소리 낼 정도로?’
그러면서 팀장님은 세계관 좋아하는 분들이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는 사람들이 씹고 뜯을 만한 포인트로 살짝 향을 치는 건 나쁘지 않다고 근거 조항까지 제시하셨다.
끄덕끄덕, 무대로서 즐길 거리가 있다는 전제하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나눌 거리가 느는 건 좋은 일이지.
다만.
‘여러분들한테도 비밀이랍니다!’
어느 포인트에서 그걸 집어넣어 놨는지 부제 이름은 무엇인지 우리에게는 전부 비밀이라고 한다.
‘어차피 알아서들 잘 해석하시잖아요?’
라며 웃자, 류이든이 곧바로 내 팔꿈치를 툭 찔렀다.
“네가 해석해 보라며, 개.”
그럼 얌전히 지켜봐야지.
저녁을 먹고 소화할 겸 잠시 쉬는 동안 나와 이현재는 잠시 토론을 나눴다.
배신과 편집증을 여태까지의 스토리에 합리적으로 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짜로 미쳐 가는 거 아닐까.”
그것 말고 해석이 되나.
“그죠? 저였어두 형들이 저 버린다 그러면 현실 부정하다가 망상에 빠질 것 같긴 해요.”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버리거나 포기하는 건 쉽지 않지만 흔치 않은 것도 아니다. 당장 나도, 그런 선택을…….
잠깐만.
기지생이 여기로 오면 딱 저 꼴 아닌가. 안 그래도 가끔 보면 미친놈 같은데, 더 미치면 어쩌지.
띠링―!
아니나 다를까 답이 왔나 보다.
나는 눈치 볼 것 없이 편안하게 허공의 메시지를 읽었다.
[저는 지금 육아하느라 바빠 자동 응답 기능을 설정해 둡니다! 미안해요!]…뭔데. 너 언제 혼외자식이 생겼어, 기지생.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정보에 눈을 몇 번 깜빡였으나 텍스트는 변하지 않았다.
설마 미친놈도 아니고, 나를 기반으로 한 AI를 육아한다는 건 아닐 거 아냐.
한참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그러구 보면 신기해요. 저희는 하나같이 형 말 의심두 안 하구 믿었네요?”
이현재가 무릎을 안으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현재, 의심했었잖아. 처음에 네 눈에 어린 당혹감과 병원에 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 분명히 기억나.
그러고 나서 유일하게 자신만 나와 친했었다는 말을 들으니 의심을 풀었다. 믿고 싶은 걸 믿는 건 유구한 전통이다.
“근데 스토리 속 저는 꼴이 참……. 심정이 궁금하긴 하네요.”
“그러게.”
나와 이현재는 별말 없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현재는 자신과 동명인 캐릭터에, 나는 나와 동명인 캐릭터에 상황을 대입해 보며 잠시 뇌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굴렸다.
“…형이 저한테 냉랭한 게 상상이 안 되는데요?”
“그래?”
“네. 저한테 형은 바람직한 선생님 이미지라.”
바람직하다기엔 선생 인품이 모자라지 않나 싶다.
“한번 보여 주세요, 형.”
…라는 대화 끝에 시작된 작은 연극.
나는 등장하기도 전이었는데 류이든이 산통을 깼다.
채하민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대사를 주고, 즉석 대본까지 작성했지만 샐러드를 먹으며 감상하던 류이든의 웃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 본 게 공식 설정이야?”
샐러드를 마저 입에 밀어 넣은 류이든이 오래 씹고 삼켰다.
“아마도.”
가장 정확할 것으로 추정되는 해설이다. 국문학과생이 직접 메타포와 플롯 분석에 들어갔으니, 맞겠지.
“와, 신기하다. 그럼 뮤비 하나하나가 현재 기억이야?”
“그렇겠지. 전부 현재가 중심.”
“뭐야, 막내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 그러면.”
“그러게.”
“하긴, 우리 막내가 그룹에서 좀 중요해?”
“맞지.”
나와 류이든은 순식간에 합을 맞췄다. 마치 짠 것처럼 이현재 기 살리기에 돌입하는 우리.
그러나 본질은 순전히 이현재가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한 놀이 문화의 일종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현재는 질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류이든이 꺄르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연기가 끝나자 슬픈 얼굴은 다 가져다 버리고 그저 해맑은 채하민이 옆에 앉으며 소리쳤다.
“내일 전체 동선 한번 맞춰 보고 난리 나겠더라!”
“응, 다음 주에 포스터도 나온대.”
류이든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나도 콘서트는 처음이긴 한데, 너도 서면 알걸?”
“뭘.”
“우리가 왜 그렇게 난리 치는지.”
“글쎄.”
그건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 * *
그리고 나는 다음 날,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말았다. 류이든이 들고 온 관객석 구조도를 보면서.
“…너무 큰데.”
연말 무대는 우리만을 보러 오시는 게 아니니 커도 달리 와닿는 게 없었는데, 이 정도 규모의 관객석이 우리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로만 가득 찬다는 건…….
“말했잖아.”
“…매진은 될까.”
“형은 우리를 너무 작게 본다. 꾸준하게 올라왔다니까, 우리.”
옆에 앉아 뭘 보고 있나 관심을 보이던 석준도 털썩 자리에 앉았다.
“…벌써 긴장됩니다―.”
콘서트 3주 전, 석준은 관객석의 규모에 압도되었는지 입을 열고 경악했다.
“저, 실수하면,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되긴, 동화랑 면담이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왜 나지. 네가 리더인데, 이 망할 개. 그리고 준, 너는 왜 결의를 다지고.
나는 속으로 불평하며 관객석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제일 가까운 스탠딩석이 아니고서야,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규모잖아.
오신 분들 모두의 얼굴을 외우겠다는 내 야심찬 계획은, 애초에 실현될 수도 없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