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305)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305화(273/343)
콘서트 전날, 셋 리스트 유출도 없이, 개인 W앱에서 스포가 벌어지는 일도 없이 어느새 전날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숫자가 담아낼 수 없는 경험의 무서움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중이다.
우리는 빌딩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으레 직육면체라고 답하곤 하지만, 단 한 번도 직육면체인 빌딩을 본 적 없는 거랑 비슷하다.
인간 눈엔 초점이라는 게 있으니까.
직육면체 형태의 빌딩이 우리가 보는 빌딩의 모습을 담아내진 못하는 것처럼, 류이든이 알려 준 숫자는 시각적 경험을 전부 담아내지는 못했다.
더럽게 커. 여기가 꽉 찬다니. 심지어 전부 우리를 보러 오시는 분들로.
“긴장돼?”
채하민이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 약간 경직되어 있을 나완 달리 느긋한 표정.
“…어.”
오랜만에 채하민이 내 조언자로서 역할을 할 차례인가 보다.
내가 심리적으로 몰려 있을 땐 류이든 아니면 채하민이 늘 도와줬으니까.
“나도 긴장돼, 어쩌지.”
느긋함이 아니라 긴장에 지쳐 모든 걸 놓은 해탈의 경지였구나. 기대를 배신하는 것도 이 정도면 행위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대단해, 채하민.
채하민은 느긋함이 산산이 부서진 듯 가슴을 툭툭 쳤다.
서바이벌 때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으니, 성장한 건 맞나 보다.
“매번 무대 설 때마다 긴장되는데, 콘서트라니까 더 떨려.”
맞아.
나는 말없이 계단에 걸터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남는 건 무대니까. 실수라도 하면 죄송스러워서 일주일은 제정신을 못 차릴 게 뻔하니 긴장될 수밖에.
음, 긴장돼. 나는 허리를 한 번 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채하민도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문득 뜻 모를 소릴 했다.
“동화야, 우린 똑같을 거야.”
맥락이 필요해, 하민.
“똑같은 걸 느끼고, 똑같이 감동해서, 똑같이 울 거야. 뭘 느끼는지는 몰라도.”
아, 부연 설명이 붙으니 이해가 되네.
나는 채하민과 눈을 맞췄다. 확신에 가득 차 있다.
“난 어려운 건 잘 몰라도 그냥 눈물이 난대, 저절로.”
근거 없는 소리를 또. 피식 웃음이 샌다. 대화 속에서 자연스레 긴장이 풀리는 건, 채하민이 가진 재주인가 보다.
“…응.”
“꿈이고 뭐고, 뭐가 중요해. 행복하면 그만이야.”
“너희랑 똑같이 울지는 모르겠네.”
울음은 어떤 감정이 극에 달할 때 터져 나온다고들 하니까, 지금 당장은 어떤 감정이 어떻게 극에 차오를지 감도 오지 않는다.
이제 슬슬 개인 무대 리허설이 끝났을 테니 가 봐야겠네.
“너는 여려서 무조건 울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몸이 굳었다.
대체 네 눈 속에 나는 어떤 모습이지, 하민.
“…오기가 생기는데, 하민.”
눈물이 나와도 참고 싶어졌어.
그런데 채하민은 그걸 노렸다는 듯이 호방하게 웃었다.
“할머니가 그랬는데, 예언은 그걸 피하려다가 실현된대.”
“…음.”
비겁하네. 할머니가 말씀하신 거라 뭐라 말할 수도 없고. 납득하기는 어렵지만(인간의 변덕을 어떻게 예상할 수 있을까. 뉴턴도 그래서 주식 투자에 실패했다.) 가만히 있어야겠어.
채하민이 조용한 나를 보고 ‘해냈다!’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뭘 해냈는데.
“그러니까, 나는 다르니 뭐니,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돼. 머리 비우고 우리랑 같이 울면 돼!”
논리가 나무로 만든 토끼장이야, 하민. 여기저기 갉아먹어서 곧 쓰러져도 그러려니 할 것 같아.
그러나 채하민과의 대화에선 논리보다 전하고 싶은 뜻을 조금 더 중요시해야 함을, 이제는 알고 있다.
“…알겠어.”
“그래!”
마음에 걸렸나 보다, 네 명이 콘서트의 떨림에 대해 논할 때 슬며시 빠져 있었던 내가.
헤실거리는 채하민은 드디어 속에 들어 있던 응어리 하나를 털어낸 듯 개운해 보였다.
“아, 동화 우는 거 다들 잘 찍으셔야 하는데.”
바지를 몇 번 털고 일어난 채하민이 미신을 주장했다.
류이든이 사이비 종교를 만들면, 채하민이 신도로 들어오겠지.
내가 설득해서 빼내려고 하면, 얼마나 고생할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울지는 확신 못 한다니까.”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콘서트, 절대 울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틀 진행하는 콘서트니, 울어도 마지막 콘서트쯤에서 울지 않을까.
* * *
티켓 수령부터 공식/비공식 굿즈 구매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콘서트에 혼자 오니 자신 같은 찌질이가 올 곳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다.
공식 응원봉을 품에 옹졸하게 안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뒤 그는 습작 노트에 팬아트나 끄적였다.
콘서트 끝나면 제일 인상 깊었던 장면 그려서 올려야지. 수채화로 채색도 할 거야. 오랜만에 수채화 물감 냄새 맡을 생각하니까, 입시 시절도 떠오르고(곧바로 PTSD에 시달렸다) 좋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입장 대기, 그 전에 습작 하나 끝내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채하민의 이번 컨포를 그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한 룸넛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연성을 하는 금손을 발견한다? 그것도 콘서트 보러 온 날?
너무 말 걸고 싶지만, 은밀하고 위대하게 홀로 덕질하는 게 보여서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 모름지기 남이 그어둔 선은 지켜야 하므로,
…파랑새, 계정만이라도 물어보고 싶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한 룸넛의 시선을, 그는 차마 알지 못했다. 그림 그릴 땐 남이 뭔 짓을 해도 잘 알지 못하니까.
* * *
아침은 밝아 오고, 마지막 동선 체크 및 음향 테스트를 한 후, 스탠바이만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나는 대기실에서 차를 한 잔씩 따랐다.
“인삼차……?”
몇 년 전 일을 아직 기억하다니, 장하네, 하민.
“응.”
“난, 맛있었어.”
비장하게 눈을 꼭 감으면서 그런 소릴 해도 신빙성이 생길 리가 없잖아, 하민.
과거 서바이벌 시절 싸 왔지만 다들 한 잔씩 마시고 내려놨던 그 차.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어린 입맛을 고려해 직접 인삼을 사서 편으로 썰어 꿀에 재워뒀다. 지난번에 사 왔던 건 인삼만 넣었던 거니, 완전히 맛이 다를 것이다.
“거짓말은 늘질 않네, 하민.”
다만 꿀을 넣었다는 사실은 숨겼다. 선물의 핵심은 정보를 숨기는 데 있는 법이다.
“요즘 차에 꽂혔나 봐요, 형. 쉴 때 차 향기 맡으면서 십자수만 하시던데. 그러고 보면 저희한테두 맨날 차 끓여 주시구. 품격 있는 노신사 같아요. 집에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 키울 것 같구.”
…분명 겉으론 칭찬인데, 언중유골이네, 현재.
“그건 나 놀리는 거잖아!”
류이든이 팔굽혀 펴기를 하다가(펌핑 중) 문득 물었다. 이현재가 나를 노리고 사격한 총알이 류이든에게는 자신을 향한 것으로 느껴졌나 보다.
…미친놈. 왜 스스로를 개라고 생각하는지 참 모르겠다.
“한 잔씩 마셔.”
“네, 할아버지!”
이현재가 순수한 손자 연기를 하며 후다닥 달려왔다.
옛날엔, 저게 참 잘 어울리던 아이였지. 음,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그리고 석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중 가장 어린 입맛, 그럼에도 차마 내가 준비한 선물을 먹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선한 심성이 충돌한 결과였다.
그래, 인정하자.
어느 정도는 내 탓인가 보다.
내가 미친 영향도 있겠지. 채하민과 류이든, 이현재가 종종 보여 주는 광기에는 나 혹은 다른 멤버가 끼친 영향이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석준은 원래 미쳐 있었으니 제외다).
그러니 일부는 내 탓인 셈이군, 망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인정하고 나니, 후련하기보다는 씁쓸한 맛이 더 컸다.
“어차피 또 내가 다 마시는 거 아냐?”
류이든도 곧바로 한 잔 들어 꿀꺽꿀꺽 마시다가, 흠칫했다.
“…왜 달아?”
천천히 잔을 내려놓는 류이든.
“설탕, 탔어?”
천천히 뒷걸음질.
미친놈. 그 정도 설탕으로 네 몸이 망가질 수나 있을까.
아마도 장난치는 거겠지만, 자기 캐릭터를 저런 식으로 잡아둔 게 묘하게 열받는다.
“…와, 진짜 다네요. 인삼 향 나긴 하는데 맛있어요.”
달다는 한마디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피신해 있던 석준이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한 잔 들이켜다가 콜록거렸다.
“인삼향이 납니다!”
“인삼차니까.”
당연한 거 묻지 마.
마지막으로 채하민까지 눈을 꾹 감고 한 잔을 비웠다.
머릿속에서 지금 대기실의 풍경과 서바이벌 때의 대기실의 풍경이 서서히 겹쳐 갔다.
그때는 순위 발표 전 긴장 풀라고 챙겨 줬던 건데, 어느새 우리를 보러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여 주신 날을 위해 인삼차를 끓이게 됐다.
…잠깐, 왜 이렇게 만족스럽지. 예상보다 더 만족스러운데.
나는 내 감정에 의문을 느끼며 인삼차를 정리했다.
무대 전엔 뭐든 적당히 먹고 적당히 마셔야 하니까.
* * *
응원봉을 한 손에 들고, 좌석에 앉았다.
메인 무대는 천막으로 가려져 있어 어떤 상태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쉽다. 스케치해 두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이 공연을 보는 틈틈이 눈으로 외워야겠다. 공연 보다가 그림 그릴 수는 없으니까.
공연 시작 1분 전, 조명이 더욱 어두워지고 60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곧 시작이니 집중하라는 강렬한 신호.
혼자 온 팬답게 조용히 응원봉을 약간 들어 올리고 작게 흔들었다.
10부터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 점점 숨이 가빠져 오는 기분이었다.
3, 숫자가 3이 되자 더 숫자가 줄지 않았다. 환호가 의아함으로 막 바뀔 무렵.
스탠딩석에 핀 조명이 내리꽂히더니, 한복을 정갈하게 갖춰 입은 류이든이 나타났다.
한량들 모두 모였나!
우렁차게 소리치자 그에 응하듯 터지는 함성. ‘흥’이구나. 첫 곡은.
세계관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그답게, 놀기 전 잘 놀자는 노래를 트는 건 적절한 것 같다며 응원봉을 소극적으로 흔들었다.
류이든이 발걸음을 옮기자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풍물놀이패(로 분장한 백댄서들)도 조명 속에 나타났다.
흥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지동화가 공들여서 리믹스한 비트가 흘러나왔다.
드럼 대신 전통 타악기로 채워진 비트. 익숙한 듯 낯설었다.
류이든에 시선이 쏠린 사이 천막은 어느새 사라져 있고, 소나무와 다양한 꽃들로 한껏 장식된 무대가 나타나 있었다.
VCR용 화면인 줄 알았던 스크린엔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의 색도 하얀 계통, 마치 달빛을 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량이지만 성격이 급한 탓인지 조금은 잰걸음으로 무대로 향하자, 똑같이 한복을 갖춰 입은 다른 멤버들이 빨리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러나 류이든은 의뭉스럽게 마이크를 들어 올리며 못 본 척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은 좀 놀아볼까요?”
환호인지 대답인지 모호한 것이 울려 퍼지고.
“숙제나 과제도 다 잊으실 거죠! 업무폰도 꺼 두셨고요!”
이번엔 죄책감인지 동의인지 모호한 것이 울려 퍼졌다.
뭐든 간에 류이든의 귀에는 ‘네!’나 ‘응!’이라는 대답으로 들렸는지 센터에 서서 웃었다.
“그럼.”
류이든의 답과 함께 음향이 줄어들었다.
집중된 시선, 류이든은 꿋꿋이 그 모든 것을 맞이하며 한껏 웃었다.
단지, 여기, 순간, 흥
둔탁한 비트. 자신이 알던 곡은 맞는데, 다르다. 풍성하다.
음악은 잘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풍물의 울림이 귀를 때리고, 멤버들의 춤은 눈을 사로잡는다.
떨리는 손. 그는 어느새 체면을 잊고 소리치고 있었다. 채하민 춤선 미쳤다고.
그리고 프리코러스, ‘흥’에서 제일 잠잠한 이현재의 파트.
죄송해요, 어머니 오늘 하루만 한량 되어 볼게
내일부터 다시 힘껏 달려 나갈 테니 하루만 놀래
콘서트 첫곡으로 너무 잘 어울려, 씨. 나 오늘 야작해야 하는데! 안 하고 형들 팬아트 그릴 예정이야! 내 포트폴리오를 형들로 채워 볼게!
휘영청 차오른 달빛 우린 거리를 거닐지
단지, 여기, 순간, 흥.
사실은 세계관 설정상 조선 배경인 흥이 처음으로 배치됐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멤버들이 그런 고민 잊고 지금 이 순간 흥겨움에 집중하라고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