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307)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307화(275/343)
군데군데 검게 물든 하얀 옷.
금욕적인 흰색의 옷에 검은 물이 들면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하곤 한다.
거기에 세트에 변화는 없고 안개도 그대로 껴 있지만, 조명이 어두워지고 군청색이 섞이는 바람에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미리 재단해 둔 대로 옷이 조금씩 찢어져(동선 이동 중에 직접 잡아 뜯었다) 남루한 행색이 되고 만 우리.
‘클라우디 블루’에서 ‘마지막 시작’으로 이어지는 곡의 배치.
첫 데뷔곡과 그다음 활동곡이 연달아 나오다니. 인간은 기억하고 있는 게 많을수록 감정적으로 요동칠 수밖에 없나 보다.
거친 안무에 댄스 브레이크 부분까지 편곡으로 삽입해서 몸은 쉴 틈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뇌까지 멈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Cause You Complet Me, 너 없인
그래, 난 이미 패배자고
Cause You are Medicine, 너뿐인
그래, 넌 이미 흐려져 가
이렇게 단순한 스토리가 또 어디 있을까.
이현재의 이상향에 검은 먹물을 흩뿌리며 망나니처럼 구는 나. 그걸 전적으로 보조하면서도 속으로는 불안해하는 게 보이는 류이든. 그리고 그걸 먼발치서 바라보며 불안해하는 채하민과 석준.
결국 나만 진심으로 ‘치료’에 나서는 인간이군.
내가 약을 먹이려 하니 형의 인정 한마디가 자기 약이라고 발악하는 듯한 가사를 보면 의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왜 항상 나는 이런 캐릭터인가. 예전부터 나는 온화하고 상냥한 할머니를 지향해 왔는데, 어째서.
내 마음속으로 지향한 것도 아니고, 입 밖으로도 몇 번 어필했건만, 어째서.
심각한 고민은 제쳐 두고 나는 자연스레 류이든과 어깨를 맞대고 섰다. 앞으로 나아가는 이현재를 막아서는 안무.
소매 한쪽은 어디로 날려 보냈는지 반만 민소매가 된 류이든. 일단 현대 한국에 어울리는 차림새는 아니다.
반면 나는 허벅지나 팔뚝이 갈라져 군데군데 속이 보이긴 해도, 옷의 형태는 전부 남아 있으니 인류의 틀 안에 턱걸이할 정도는 되었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둘 중 나만 인간이라는 소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자신을 비웃는 걸 느꼈는지 팔뚝으로 툭, 나를 아주 약하게 건드렸다. 염병을.
그런 우리 둘을 독기가 가득한 눈으로 노려볼 이현재. 등을 돌리고 있음에도 시선이 느껴질 지경이다.
그는 자신의 앞을 막듯 서 있는 나와 류이든, 그 사이를 가르고 나왔다.
물 흐르듯 쓰러진 나와 류이든. 이현재가 홀로 노래하는 동안, 잠시 둘이 시선이 맞닿았다.
순간이지만 생긋 웃는 눈. 그 눈에는 이 순간이 즐거워 죽겠다는 충족감과 그걸 나와 함께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엿보였다.
Rewind―, 너와 내 끝이 시작이 돼, 내 시간 위―, 모든 것이 되살아나
Rewind―, 해와 달이 뒤바뀌네, 내 시선 끝―, 모든 것이 되돌아가
이현재의 브릿지가 끝나고 둔탁한 드럼 비트가 울리면.
그리고 채하민이 독무를 위해 센터로 달려 나가면.
나는 모든 것이 되돌아가는 걸 느낀다.
뱀 한 마리가 자기의 꼬리를 물고 있던 모습이 떠오르고, 채하민이 곡을 듣자 ‘춤추고 싶다!’라고 말했던 순간이 되살아난다.
나아가 류이든을 독살하기로 마음먹고(현재 진행형), 이현재와 초라한 작업실에서 커피를 나눠 마시며, 석준이 인어공주 이야기를 꺼내 당황했던, 그때도.
아이돌이 될 계획이 아니었던 때. 그저 삶에 던져진 혹은 난입한, 거대한 돌덩어리처럼 여겨졌던 서바이벌이 시작되던 그때.
멤버들을 타인으로 여기면서도, 온정이 싫진 않았던, 작업실에 ‘내’ 흔적(덤벨이나 버섯 모양 조각품)이 남고, 숙소를 집으로 인식하기 그 이전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기억이 현실과 겹쳐질 때가 있다.
어둠 속에서 밝은 저 빛이 은하수가 되고 우리는 그 밑에서 춤을 추고 있는 지금 같은 그때가, 현실 위에 슬그머니 몸을 누인다.
채하민의 독무, 이현재의 음색, 무대 위에선 늘 진지한 석준이나 언제나 여유로운 류이든. 여전히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던 나.
그리고 지금보단 규모가 작았어도 우릴 응원하는 마음만큼은 뒤지지 않았던 팬분들.
이 모든 것이 겹치면, 뇌가 뜨겁게 녹아내릴 듯, 생각을 양산하는 공장이라도 된 듯 온갖 상념이 쏟아지고 만다.
뒤집히는 모래시계, 영원을 속삭일게
군무를 마치고, 나는 채하민과 류이든이 만드는 화음을 들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엔딩 때, 나 홀로 무대 위에 서 있어야 하니까.
이 콘서트가, 저들에게 꿈의 실현이라면 나에겐 무엇일까.
콘서트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품었던 질문.
뇌가 쏟아낸 상념들이 하나하나 별이 되어 궤적을 잇는다.
난 오늘, 길을 잃은 인간이 한 숲속에서 보게 될 은하수처럼 평생을 안고 살아갈 추억을 뇌 속에 아로새겼으며.
난 오늘, 한 노인이 병상에서 하는 회상처럼 내 삶이 끝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질 주마등 속에서 미소 짓게 될 장면을 하나 얻었으며.
난 오늘,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 아름답다는 상투적인 문구의 의미를 실증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니 저들에게 이 순간이 꿈의 실현이라면, 나는 삶을 실현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 생각에 다다랐을 때, 더 정확히는 센터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눈앞이 조금 흐려진다.
망할, 토끼 새끼. 나한테 저주를.
* * *
‘마지막 시작’은 지동화 홀로, 쓰러진 멤버들 사이에 서 있는 상태로 엔딩이 난다.
지동화 프사인 룸넛들은 모두들 그 예정된 끝을 위해 복부에 호흡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전광판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한 팬이 문득 웅얼거렸다.
“…운다.”
무표정한 상태로, 그냥 눈물 한두 줄기를 흘려보내는 지동화.
울컥이는 감정을 집어 누르며, 엔딩 때 연습했던 표정 연기를 그대로 선보이면서도, 어떤 감정인지는 몰라도 지독하게 응어리져 있는 눈을 반짝이며.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담담하게 우는 것만 같았다.
혁명이 실패하고 주동자가 모든 걸 받아들이면서 흘릴 것만 같은 눈물. 애환이 서려 있으면서도 수용적인!
심지어 홀로 핀 조명을 받으며, 쓸쓸하게 서 있던 모습에, 여기저기 다 찢어진 옷을 입었던 것까지. 뭣 하나 빠짐없이 심장을 후려쳤다.
“와…, 동화 운다.”
그래서 함성은 조금 늦게 터져 나왔다.
룸넛들에게도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콘서트 당일, 울 것이 확실한 사람으로 채하민, 류이든, 이현재, 석준으로 점쳤던 룸넛들에게는.
울 것 같은 꽃돌이 투표에서 최하점을 기록한 지동화.
심지어 그 몇 표조차 ‘제발 좀 울어라, 지독한 놈아!’라는 괘씸한 마음으로 투표했던 룸넛들에겐 이 현실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왜?”
우는 타이밍이 틀려도 한참 틀렸잖아. 한 룸넛이 조용히 의문을 입에 담았다.
보통 저런 건 앵콜 곡 하기 전이라든지, 아니면 소감을 말할 때라든지, 정해진 타이밍이 있지 않나.
인과 없이 현상만 발생한 순간, 일단 우니까 환호는 했음에도 과학자의 마음가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VCR이 나올 때, 눈으로는 멤버들의 얼굴을 담으면서 아주 조용히 귓속말로 짧게 토론을 나누는 룸넛들이 속출했다.
“…표정 연기?”
“…오 씨, 그럴듯해.”
문학적 접근.
세계관에 진심인 한 룸넛 무리는, ‘이현재를 위해서 한 행동이 이현재를 더더욱 눈 감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은 감정선’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아니겠냔 가설을 던졌다.
“눈이 건조했을 가능성?”
“그럴듯해.”
생리학적 접근.
이 밖에도 ‘안무 도중 누군가에게 맞았다.’라는 물리학적 접근, ‘체내에 불필요한 수분이 많았나 봐. 버리는 게 효율적이라 그런 듯.’이라는 경제학적 접근까지.
그 누구도 진짜 울었다는 사실을 믿지는 못한 채, 채하민과 석준, 그리고 이현재가 해맑게 뛰어노는 VCR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복잡한 머릿속이 ‘…존나 예쁘다, 내 돌.’이라는 생각 하나로 정리가 될 무렵.
화려한 듯 수수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멤버들이 올라왔다.
지동화를 제외한 모두 한껏 웃으면서, 그리고 지동화는 귀가 붉어진 채로.
그제야 모든 가설은 사라지고, 새로운 가설이 인정받게 되었다.
진짜 울었구나, 동화가.
* * *
왜 하필 토크 타임이 이런 데 껴 있는 거지. 주마등이고 염병이고 집어치우고, 죽고 싶은 지경인걸.
생각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과정부터 결론까지 자기 혼자 처리하는 뇌를 전기 고문 할 수도 없었다.
“여러분!”
…음, 할걸.
채하민이 마이크를 부여잡곤 소리 질렀다.
방방 뛰는 몸짓부터 해맑은 낯짝까지. 참, 무엇하나 내 눈에 담고 싶지 않아, 하민.
“아까, 방금 동화가 우는 걸 봤다! 소리쳐 주세요!”
거의 무대가 끝났을 때나 울릴 법한 크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왜 울었는지 궁금한 분들도 소리쳐 주세요!”
류이든이 질세라 뛰어들었다. 석준과 이현재는 꺄르르 웃으며 방관할 뿐, 내게 도움을 주려는 어떤 사인도 없었다.
망할 것들, 자식 키워 봐야 소용없다.
지금쯤 관계자 좌석에 있을 목화는…, 생각지 말도록 하자.
팬분들의 환호성이 잦아들고, 모든 시선이 내게, 심지어 모든 카메라까지 내게 줌인 된 걸 확인했을 땐,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말해.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벅차서 울었다고 할 수는 없잖아.
“그.”
“잠시만요! 어제 동화가 저랑 내기를 했어요, 룸넛분들!”
닥쳐, 하민. 콘서트장에서 욕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채하민의 방정맞은 혓바닥은 난리를 쳤다. 그리고 내기한 적 없어. 사행성에 미친 토끼.
“자기는 울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제가, 너도 울 거라고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울고 싶어도 안 울 거라고, 억지로 참고 싶다고 그랬다니까요!”
그렇게까지 말한 적 없어, 가짜 뉴스 메이커 같은. 조지 오웰 동물농장에서 언론 통제 및 조작하는 역으로 등장해도 손색이 없겠다.
“어? 진짜?”
“응. 우리 동화가 어찌나 맘이 여린지.”
채하민이 내 옆에 와서는 어깨동무를 하고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와중에 춤선이 고와서 더 짜증 나.
“이제 말해 보시지! 누가 옳았지, 동화야!”
“…하민 씨가 옳았습니다.”
나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어영부영 넘길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가장 먼저 운 건 누구지!”
“접니다.”
그래, 차라리 더 설치렴, 하민.
“그래서 왜 운 거예요, 형? 타이밍 너무 괴이한데.”
날카로운 놈. 이현재의 질문으로 모든 관심이 다시 ‘이유’에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입은 부처처럼 해탈해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만을 추출하는 건 어렵지 않다. 진실은 감추고 사실을 나열하면 그럴듯한 이유가 만들어질 것이다.
온 세계에 밝힐 수는 없는 나의 비밀을 감추고 오늘 있었던 사실을 나열하면, 다음 같은 담백한 문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이돌 되길 잘했다고 생각해서.”
정적.
앞에서 그렇게 설쳐대던 채하민과 류이든조차 어째서인지 말을 잃었다.
나는 눈을 뜨고 잠시 빛에 적응하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류이든을 바라봤다.
뭐라고 말을 해, 망할 개. 오늘 하루 진행 하나는 잘했잖아.
그러나 류이든은 입을 벌린 채, 그 뺨 위로 눈물을 한 방울 흘려보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