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323)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323화(291/343)
투어라는 이름을 일단은 달고 있지만, 해외 무대의 특성상 VCR을 언어 없이 영상만으로 전달해야 하며, 대화 시간을 갖기도 어렵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의 콘서트에 비하면 압축적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상 감독님이 자신의 친구와 새로 작업에 들어가셨는데, 그 친구가 베버 씨라고 한다.
사실 이런 건 상관없는 일이지만.
채하민이 기내식을 먹기 전 손을 물티슈로 닦았다.
“신기하다. 인연이 저기까지 닿는구나.”
그러고는 자기 앞의 샐러드를 야무지게 뜯었다. 과일과 샐러드, 빵. 초식 동물임을 식판이 격렬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게.”
채하민의 말대로다. 함께 일하는 분이 누구인지보다 놀라운 건 네트워크의 광활함에 있다.
율리아 베버 씨는 짧은 대화 속에 다양한 정보를 남겼다. 태초에 우리를 알게 된 계기를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거 뭐지? 삼촌? 사촌? 아, 둘 중 하난데. 어쨌든 여기서 식당 해요.’
채하민과 내가 처음으로 함께 외식을 했던 장소, 비너슈니첼 맛집이자, 내 팬분들이 아직도 가끔 인증샷을 올리는 식당.
뒤에 독일어로 짤막하게 추가 설명도 덧붙였는데 삼촌이었다.
‘자기 집에 잘생긴 남성 단골이 하나 있는데 사실 연예인이었다길래, 허풍인 줄 알았어. 진짜더라고요.’
“그분도 정말 감사하고.”
쏙, 멜론 조각 하나를 입에 넣은 채하민이 몇 번 꼭꼭 씹더니 말을 마저 이었다.
“우리 팬인 거 말하면 서비스도 해 주신다잖아. 사과주스.”
“…그러게.”
사실 바빠서 요즘은 자주 가지 않지만, 멤버들과 밥을 먹을 때 생각나면 가끔 찾아가곤 했다.
우리들한테 사인을 해 달라는 말씀도 일절 하지 않으셔서 우리가 연예인인 줄도 모를 줄 알았다.
“이게 우연일 수가 없다니까, 동화야.”
“그래?”
“응! 우리 뮤직비디오 보고 옛 애인이랑 재회라니!”
삼촌 가게의 단골이 아이돌이라니, 그 작은 사실이 율리아 씨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인터넷은 간편하고 X튜브는 더욱 그러니까, 호기심이 들어도 자물쇠가 걸린 상자는 무시하고 지나쳐도 열기 쉬운 상자 속은 지나가며 무심코 흘깃 보게 되는 법이다.
‘영상, 예뻐요.’
율리아 씨는 슬며시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미장센이 너무 잘 아는 거라 당황은 했어도.’
영상 미학 전공자였던 그녀는 심각한 직업병이 있었다.
컷의 배치와 구도, 사물의 위치, 인물 간의 높낮이, 그 모든 걸 찬찬히 뜯어보는 버릇.
짧은 문장이었지만, 본래의 그녀도 알고 있던 나는 십분 이해하고 말았다.
호기심에 들여다본 상자 속에 옛 연인의 물건이 있을 땐 어떤 기분일까.
그녀는 영상을 찬찬히 보다가 감독의 이름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너무 익숙한, 자기랑 같이 카페에서 영상을 봤던 남자가 좋아하는 미장센 덩어리여서.
자기로 하여금 한국어를 배우게 만든 원인이었던 남자의 흔적을,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사람.
솔직히 무슨 기분일지 감도 오지 않는다.
“무슨 기분이긴, 운명이잖아, 운명! 설레지 않았을까!”
드라마에 과몰입한 시청자 같아, 하민.
“그런 게 있을까.”
“없으면 말이 안 돼, 동화야.”
물론 채하민이 저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어쨌든, 덕분에 재결합했어요. 이거 이렇게 쓰는 단어 맞죠?’
옛 추억에 젖어 오랜만에 보낸 연락, 이후 재결합, 그리고 함께 영상을 만들던 추억에 빠져 지금은 남편이 된 사람과 회사를 설립.
현재 투어 첫 번째 영상이 의도된 대로 나오는지, 밝기에 문제는 없는지 등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여기로 나왔다는 것이다.
고작 내가 한 식당의 단골손님이었단 이유로 헤어졌던 연인이 결혼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운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니까. 이렇게 우리가 한 그룹으로 만난 것도 운명 같은 거잖아.”
채하민이 헤실거리며 펄떡였다.
아니, 우연이다. 운명 같은 게 더는 없음을 예언이 몸소 증명하고 있다.
“…그러게.”
“이런 것만 보면 세상이 참 예쁘다, 그치, 동화야.”
글쎄. 잘 모르겠다.
채하민은 친구라는 명목으로 이용을 당했고, 어느 가능성에선 천박한 새끼한테 폭행을 당했다.
그건 ‘아름답다’라는 단어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응.”
채하민의 오해는 내 설명의 부족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지생.
[네?]정말, 나는 버그였네. 그저 숨만 쉬고 살아가기만 해도 시스템에 문제를 일으키는 걸 보면.
[당연합니다!]기지생이 이런 훈훈한 결과 따위를 고려했을 리가 없다.
내가 여기 떨어진 건 시스템적 오류에 불과하고, 율리아 씨의 옛 연인과의 재회는 그 부차적 산물에 불과하다.
누구의 삶이 더 나아지는 것 따위 기지생의 안중에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 수 있다.
[잠깐만요! 저를 분석하려 하시다니, 몹시 불만입니다!]기지생은 그저 모든 게 혐오스러웠지 않을까.
정해진 미래가 있다면, 자신의 등신 같은 인생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러니 기지생의 기본적인 정서는 미움이 아니었을까.
자기혐오는 기본이고, 세상은 개 같다. 옆에서 규칙을 강요하는 인간도 엿 같고, 가능성은 최악이다.
그러나 그런 혐오가 낳은 결과는 기이하기 짝이 없다.
류이든, 채하민, 이현재, 석준 전부 어느 정도 불행이라면 불행을 피할 수 있었고, 윤성호, 예언, 준성 역시 마찬가지다. 이 역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나는 내 앞의 기내식을 삼 분의 일도 먹지 않았지만,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면, 기지생을 이토록 고민했던 적이 있나. 대개 어차피 나니까, 라는 생각에 이렇게 낱낱이 생각해 보는 건 처음이다.
나 스스로 고민한 시간을, 자연스레 기지생에 대해 고민한 시간으로 이해했나 보다.
“구름도 예쁘다, 매번 볼 때마다.”
채하민이 창밖을 보며 광활한 하늘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나는 내가 기지생과 공유하고 있는 기억을 되짚었다.
독일로 향해 가는 비행기에서, 창밖을 본 적은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관심을 두기엔 내가 너무 황폐했다.
그리고 채하민의 어깨 너머로 새롭고, 아름답다. 지금, 저 풍경이 나는 도저히 밉지가 않다. 나는 도저히 기지생처럼 될 수가 없다.
[음, 부끄럽답니다. 저를 낱낱이 파헤치다니! 유치원생들이 옆에서 보고 있는데!]새삼, 기지생이 낯설게 느껴졌다. 정체가 나임을 알기 전에도 이토록 낯설지는 않았는데.
기지생.
[네.]내가 올라가면, 동기화되는 건 확실한 게 맞아?
[그럼요.]그럼, 대체 뭘 가르치고 있는 거야, 그 유치원생들이란 놈들한테.
[외롭지 않게 친구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당신을 위하는 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이제 좀 아시겠습니까?]논리적으로 고려하자.
기지생의 주장은, ‘내가 삶을 마치고 돌아오면 자신과 동기화가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즉, 기지생의 기억과 내 기억이 자연스레 연동되어 하나가 된다는 것.
[음, 옆에 하민 씨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그런데, 어째서 내게는 친구이고, 자신에게는 유치원생일까. 이건 마치.
“동화야?”
눈을 감았다. 조금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다.
도서관을 천천히 거닐며 관련된 파일을 한 권씩 뽑았다.
기지생에 관해 남아 있는 모든 기억들을. 천천히.
과학에는 아직 무지하므로, 그저 논리만 짚어 보자.
“밥, 안 먹어?”
기지생은 태초에, 나에게 가능성의 조각으로 이 세계의 비밀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동일한 존재가 다중 위치에 존재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세상은 구성되어 있다. 수많은 가능성 중 실현되기로 예정된 것들만 실현되고 나머지는 그저 그 밑에서 꿈틀대고 있다.
“도, 동화야?”
모든 게 예정된 상태라면, 그건 정적이다. 이미 활자로 찍힌 문장처럼, 모든 건 고정되어 있다. 얼어붙어 딱딱하게.
그리고 기지생은 예언의 사건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드디어 규칙을 깨부쉈다.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러므로 고정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앞으로의 미래를 예측할 때, 기지생은 그저 계산을 통해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내가 기지생을 워프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확정된 미래가 아니라 기지생의 추측에 가깝다.
그럼에도 기지생은 확률을 논하는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혹은 ‘헛된 희망이다.’와 같은 표현을 기용했다.
그 근거가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띠링―!
[그만하시길 권합니다.]그리고 다시 현재.
채하민이 해맑게 풀을 뜯을 때, 기지생은 ‘당신’에 한정되어 친구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건 명백한 분리. 자신에게 이들이 친구가 아님을 확정 짓는다.
기지생은, 분명 나와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며 훗날 동기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현재의 사실과 모순에 놓인다. 만일 동기화되는 게 사실이라면, 구분이 필요가 없다.
수사적 표현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기지생이 나와 자신을 구분 짓는 말을 뱉은 빈도는 최근에 올수록 늘어나는 그래프를 그린다.
그건 농담보다는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맞춰 언어 습관이 변화되는 과정으로 보는 쪽이 낫다.
“도, 도, 동화, 야, 어디, 어디 아파?”
“아니, 하민.”
“왜 눈 감고 말해, 무섭게!”
그러므로 동기화된다는 사실이 거짓이 아니었다면, 그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고, 거짓이면 더 단순하다.
기지생, 솔직히 밝혀, 등신 같은 새끼가. 자기가 사라지는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함’을 확신하며 말하진 않았겠지.
[하, 정말.]순간 귀에 울리던 모든 소리가 멈췄다. 내가 눈을 떴을 땐 세계가 멈춰 있었다. 기지생, 뭔데, 이건 또.
[애가 듣습니다.]부부 싸움 하듯이 말하지 말고.
[정확히는 저와 길게 대화를 나누시면, 채하민 씨가 염병을 떨며 어디 아프냐고 계속 호들갑을 떠실 확률이 높아, 잠시 멈춰 보았습니다.]그러고는 눈앞에 작은 화면이 떠올랐다. 전에 봤던 모니터 화면, 조금 지직거리더니 기지생이 얼굴을 드러냈다.
“책임지십시오.”
“뭘.”
“제 업무가 또 늘어났잖습니까.”
“맞아요!”
옆에서 웬 여우 한 마리가 귀엽게 고개를 내밀었다. 이현재를 닮았다.
“선생님이 통화 중일 땐 어떻게 해야 할까, 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 아는데, 저게 너무 싫어서!”
솜뭉치로 이쪽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이는 여우 한 마리. 호불호가 확실한 것도 이현재를 닮았다.
어쩌지, 좀 귀여운데. 심바 씨와 봉주 다음이다.
“진짜 여우?”
“그렇겠습니까? 그런 하등한 생물이랑 비교하지 마세요. 제 자식들입니다.”
기지생이 손짓하자 웬 동물 다섯 마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고양이 제외 전부 귀엽군.
“…들려, 망할.”
고양이는 빈정이 상했는지 뒤돌았고 그 뒤로 토끼와 개, 공룡…….
“기지생.”
“네?”
“이거, 멤버들이 모티프?”
“네.”
“…세상에.”
저 고양이가 그럼.
“그럼요.”
미친, 그 불쌍한 녀석을 저런 꼴로.
“걱정 마세요. 다들 하나씩 나사가 좀 풀려 있거든요. 제가 또 신경 써서 새로운 맛을 조금씩 첨가했답니다.”
이제 보니 기지생은 유치원 선생님이 입을 법한 앞치마를 입고, ‘지생 선생님’이라고 크게 적힌 명찰을 착용 중이었다.
이 미친, 넌 지동화야, 정신 차려, 제발. 왜 그래. 내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두려워 미칠 것만 같다.
기지생은 조금 늙은 내 얼굴을 한 채 여우를 저리 보내더니 등을 푹 기대 눕듯 앉았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너무 짙었다.
“이건 떠나기 직전 몰골이라서.”
속내를 읽고 곧바로 답하는 기지생. 대체 얘는.
“저 아이들 귀엽지 않습니까?”
“…응.”
고양이만 빼고.
“그래요. 역시 저랑은 많이 다르네요.”
기지생은 착잡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