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351)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351화 (외전)(319/343)
“주인 따라 사무실 풍경이 너무 다르군.”
고양이는 여전히 우아한 걸음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서고를 나돌아다녔다.
빛으로 휘감겨 허락받지 못한 이들은 발을 들일 수 없는 곳, 지동화의 사무실이었다.
“누구는 모니터에 중독되더니, 그놈들은 뭔가에 중독되지 않고서야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나 봐.”
“난 가끔 무섭다? 여기 꼭 귀신 나올 것 같아.”
“인간들이나 할 법한 소리를. 그리고 여기는 따스한 분위기 아닌가.”
“근데 선생님이 읽은 책 중에 귀신 관련 논문도 있는 걸 보면 혹시 몰라!”
토끼의 말 그대로다. 이곳은 선생들의 기억을 토대로 만든 도서관. 쓸데없는 글도 대충 훑고 넘어가더라도 어떻게든 머릿속에 저장해 버리는 탓에 괴상한 내용의 도서도 상당수 존재했다.
물론, 부분부분 글자가 흐릿하게 인쇄된 책도 많았고.
한 놈은 디지털 만능주의, 한 놈은 악독한 복고주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휙휙 사무실이 바뀌려나.
도서관의 제2서고, 지동화의 기억관. 더 정확히는, 지동화가 살았던 시공간에서 있었던 일 전반을 책으로 옮겨둔 것이다.
그러니까, 더럽게 넓다는 뜻이다.
“현.”
조용히 부르자, 여우 무늬가 그려진 책이 한 권 고양이 앞에 툭 떨어졌다.
스르륵, 자연스레 넘어간 페이지, 그 안에서 여우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왜.”
“선생 어딨어.”
“따라와.”
지동화의 대대적인 사무실 개편.
동물들의 짐승 연령을 확인하더니, 그 아둔한 놈은 이런 어두운 환경에서 기를 생각을 했냐며 우아하게 험한 말을 뱉었다.
가장 먼저 손질한 것은 천장이었다.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하늘에 구름과 해, 그리고 달이 창문 너머로 보이게 만들었다.
비록 인공이지만, 처음으로 낮과 밤이 생겼다.
그다음에는 도서관 한 가운데에 숲과 하천, 그리고 공원이 생겼다.
지동화는 자연과 가까운 육아를 사랑하나 보다, 고양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더 낫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둘 다 상관없었다. 학교가 바뀐 게 아니라, 학년이 바뀐 수준의 변화라고 고양이는 다른 동물이 알지 못하는 설명을 하곤 했다.
여우는 책 안에서 고개를 내민 채 둥둥 떠 날아다녔다. 그 뒤를 걷던 토끼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 불편해?”
“의식을 되찾은 것만으로두 기적이니까.”
여우를 책 안에서 분리하는 실험은, 지동화의 핵심 목표 중 하나였다.
다만 여우가 없으면 책이 내뿜는 빛이 멈춘다는 사실을 깨달아 현재는 이 모습으로 나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여우가 처음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토록 싫어하던 인간이 자신을 구해준 걸 보고, 얼마나 어색해했는지 기억하는 고양이는 피식 웃었다.
모두가 지동화를 선생으로 부를 때도 여전히 어색하게 그 어떤 호칭으로도 부르지 않고 있었다.
“미련하긴.”
“닥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여우는 흠칫했다. 기지생에 대한 그의 애정을 모두 알고 있으니,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뿐, 그 심정은 모두 이해했다.
“…선생님은, 이해 못 하시겠지.”
고양이는 답 없이 그저 걸었다. 토끼는 그가 어떤 답을 할지 알았음에도 말을 잇진 않았다. 그러므로 여우가 혼잣말을 뱉었을 때, 원래라면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야만 했다. 원래라면.
“돌아올 땐, 이해해줄걸.”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이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세 마리는 모두 멈춰 섰다. 펄럭,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고요하게 들렸다.
“그리고, 내 호칭을 바꿔줘. 헷갈리니까.”
탁, 그다음엔 나무에 종이가 쓸리는 소리, 다른 책을 꺼내 들었나 보다.
이곳은 지동화의 기억 보관소. 즉, 읽을 필요도 없는 책을, 끊임없이 읽고 있는 셈이다.
고양이는 고개를 돌려 그의 발밑으로 걸어갔다.
정말, 분위기가 다르군. 고양이는 기지생이 풍기던 허무한 분위기를 떠올리다 다시 지동화를 살폈다.
고아(高雅)하다.
이곳에 오기 전 주로 입었던 대로 편안하게 맞춘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채로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정말.
그 두꺼운 책을 이내 다 읽었는지 마지막 장을 덮고 책을 정결하게 꽂았다. 그 손짓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의자에 기대 모니터를 보며 기계 장치를 만지작대던 기지생과는 달랐다. 기지생이 미친 과학자 같았다면 얘는…….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같은 인간인데도. 그러면서도 가끔 가다 비슷한 말이나 행동을 하니, 참.
지동화는 안경을 벗어 허공에 놓으니, 옆에 떠다니던 케이스가 알아서 안경을 받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기묘한 조화다.
그리고 안경을 따라 떨어진 시선에 그제야 강아지가 같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위에 타서 자고 있는 공룡도.
얘네는 뭐해, 대체.
“책 읽어주고 계셨어.”
“……미친 것들.”
지나왔던 길에, 눈치채지도 못하게 숨어 있다니.
그건 기지생이 다른 관리자를 협박할 만한 무기를 숨겨둘 때나 사용하던 기술이잖아.
귀찮고 번거로운 작업인데, 그걸 고작.
“서고는 고요해야 하니까.”
지동화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하는 표정이었다.
“무슨 책이었나요?”
빼꼼 고개를 내민 여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책을 내밀었다.
“고르는 중이었는데, 듣고 싶은 거 있어?”
“…글쎄요. 여기 있는 책은 사실, 전부 읽어봤으니까.”
“모든 걸 알고 있어도, 다시 읽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책장에 숨겨진 버튼을 누르니, 순식간에 다른 차원에 들어선 듯 풍경이 바뀌었다.
푹신한 소파, 따스한 차와 정갈한 간식이 세팅된 곳. 확실히 기지생보다 능숙하다. 하긴, 기지생이 이룬 성과 위에서 출발했으니 당연한 거지만.
“무슨 책이든 괜찮아.”
토끼는 고양이를 끌고 가 푹신한 소파에 몸을 누였다. 어김없이 천장에 설치된 창문으로 따스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공룡이 잠에 빠져든 게 이해가 되는 공간이다.
“…그럼, 저, 그 피아노 배우던 아이.”
그러자 책이 한 권 지동화의 손에 생겨났다.
고양이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옆에 있는 토끼의 꼬리에 고개를 뉘었다. 그에 기분이 좋아진 토끼가 손을 머리에 얹자 거칠게 쳐냈다.
어떤 이야기든 들을 준비가 됐다는 듯이 충실한 강아지와,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든 공룡.
마지막으로 책에서 얼굴만이라도 내밀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어색한 여우까지.
기지생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평화는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지동화는 웃으며 책을 펼쳤다.
* * *
은혜를 갚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김봉주는 그 사람이 하라는 연주만 하고 살아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입을 벌린 채 그의 얘기를 듣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음대를 다니는 건, 돈을 잡아먹는 일이다. 학비가 비싼 건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지만, 해외로 나가면 문제는 더 커진다. 일단 생활비부터 발목을 잡히는 셈이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봉주는 자신의 그릇 크기를 재 보았다. 큰 인간이 되기엔 욕심이 없다.
돈도 굶어 죽지만 않으면 된다. 어쨌든 피아노만 칠 수 있으면 될 일이다. 그러니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예술 재단에서 컨택이 들어왔을 때도 봉주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남의 녹봉을 받아먹고 살려면, 그만큼 기대를 충족시켜야만 하니까.
아버지조차 봉주의 의사를 듣고는 동의했다. 자식이 그러고 싶다는데 그 정도도 못 해줄까.
다만, 의견 차이가 발생하는 곳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는 바야흐로 김봉주의 입시 연도에 들어설 무렵. 레슨 선생님이 괴상한 문서를 아버님께 건네며 시작되었다.
“이건 봉주가 지원할 만한 음대 목록이에요, 봉주랑 얘기하실 때 전혀 모르시면 힘드실 테니까,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
천성이 넉살이 좋은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거기에 해외 음대가 다수 포함되어 있던 것이 문제였다.
봉주가 해외 유명 콩쿠르에도 나간 게 화근이 되어, ‘이 정도 경력이면! 여기도! 여기도!’라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리스트에 추가된 학교들.
아버지는 지원해 보라고 언급했고, 봉주는 고개를 저었다. 돈은 심각한 문제니까. 지금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통장이 위태롭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네 대학 비용이잖아.”
“해외 나가는 건 대학 비용만 문제가 아니니까요.”
“음, 봉주야. 원래 이런 경력은 쌓을 수 있으면 쌓아두는 게 좋지. 나중에 선택지를 늘려주거든. 그리고, 네 아버지가 요즘 사정이 괜찮아서 말이다. 좀 벌어.”
당연한 이치의 말이라도, 누가 하냐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진다.
늘 자식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주던 서툰 아버지가 진지하게 설득하면, 말의 내용보다도 그 마음에 압도되고 만다.
그렇게 결정된 유학행.
레슨 선생님조차 ‘무조건 한 곳은 붙을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렴.’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예정된 듯이 비행기에 올라탄 봉주는 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타지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같은 것조차 없었다. 그저, ‘와, 이제 수학 안 해도 되네.’라는 피아노 칠 시간이 늘었다는 것에 대한 감탄뿐이었다.
경력은 좋은데 거기에 욕망이 없는 게 인터뷰에서 보이는 인간이라서 합격시켰다는 어느 교수의 말처럼 말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그는 밥을 먹다가 입을 벌리고 말았다.
“봉주야, 방학 동안 일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사람이 계셔.”
“결혼식장 같은 곳이요?”
그 정도야 뭐 자주 하는 용돈벌이 수단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로 오고 있으신데 말이야. 내가 그분한테 빚진 게 좀 있어서.”
“빚이요?”
“너 가고 나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했을 때, 도움을 좀 받았거든.”
“…그건 연습하다가 못 먹었다는 거였잖아요?”
봉주는 밥을 먹으며 왼손으로 화음을 쳐대다가 문득 떠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용돈이 좀, 많아졌다는 생각은 했는데.
“……잠깐, 빚이요?”
평생에 빚지기를 그렇게 싫어하시던 분이!
봉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퍼즐을 맞췄을 때,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사정이 괜찮다며 장부까지 보여주셨는데, 그게 전부 거짓이었다니. 자신은 그것만 보고 원서를 냈는데, 그게 전부 조작된!
봉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인터폰은 없는 구식 건물이라서. 험상궂은 대부업자가 있다면 문부터 닫아야지. 손가락을 건드리려고 하면 어떻게든 죽일 거야.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보인 건.
“오랜만, 봉주.”
라고 짧게 웃은 뒤.
“키가 또 컸구나.”
손을 흔드는, 선생님.
봉주는 새삼스레 지동화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떻게, 삼십 대가 되셨는데도 얼굴이 그대로이실까.
예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그저 성숙한 기운만 흐르는 선생님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졸업식에서 한 번 뵙고, 가끔 이메일 혹은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TV 화면이 아닌 곳에서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라 또 감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부업을, 시작하셨나요?”
봉주는 멍청한 물음을 입에 올렸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인 건 변함이 없지만. 채권자와 채무자의 자식 관계로 묶이는 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데.
“……응?”
선생님은 질문을 듣자마자 자신이 들은 단어를 의심하는 듯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짧게 반문했다.
심사숙고 끝에 그 발음이 정확했는지 물어보다니, 정말 여전히 선생님다웠다.
그러자 뒤에서 아버지가 와서는 껄껄 웃었다.
“너 없을 때, 자주 와서 나 건강한지 보고 가셨다. 식사도 가끔 같이 해주시고.”
……아, 빚이라는 게 꼭 금전적인 것만 뜻하지는 않지.
“춘추가 있으시니까요. 적적하기도 하실 테고.”
“아직 춘추라고 칭할 나이는 아닌 것 같지만 말입니다.”
집에 들어오며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
“그럼, 일이라는 게……?”
청년이 된 봉주를 뒤돌아보며, 지동화는 ‘벌써 얘기하셨군요.’라고 작게 중얼거린 뒤,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내 공연 반주를 부탁할까 해서.”
그래서 다시, 그는 입을 벌린 채 그의 얘기를 듣다가 당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