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76)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76화(76/343)
76.
# ‘모모지’, ‘진리 아래 비밀은 없을 테니’ 편집본
여전히 산장 안, TV 속 카운트다운만 1씩 줄어들고 있고, 그 앞에 다섯 명의 멤버들이 모여있다.
그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산장을 돌아다니며 출구가 없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출구는커녕 곳곳에 숨겨진 폭탄만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우선은 어떻게 할지 의견을 나누려 모였으나,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아무 짓도 안 한 거 다 알 거라 생각합니다.”
류이든(칸트)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밝혀야 할 진실에 자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강조하려는 의도다.
“제가 하나와 고등학교에 함께 다녔을 때, 도리어 하나를 도와준 사람이라는 걸,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러자 모두 류이든을 바라본다.
“여기서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냐, 시계?”
“오랜만에 예술 한다고 나대는 놈이 옳은 소리 했네.”
“닥쳐, 의심병자.”
의심병자라는 멸칭에 표정을 구긴 이현재(데카르트)가 말을 잇는다.
“어쨌든 다들 알잖아? 우리 같은 다섯 명이 뭉쳐 다닌 것도… 전부 하나가 구심점 역할을 했으니까 가능했던 거.”
그리고 화면이 전환되더니, ‘주하나의 사망일’이라는 자막이 올라온다. 한 남학생이 학교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이 비친다.
“하나야, 어디 가?”
이현재(데카르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주하나가 뒤를 돌아보려는 중에 화면은 다른 멤버들이 주하나의 마지막 날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짤막하게 비춰준다.
류이든(칸트)은 반에서 나가는 주하나와 대화를 했고, 채하민(로크)은 주하나와 함께 모든 학생이 하교한 후 한 교실에서 얘기를 나눴으며, 석준(헤겔)은 미술실에서 주하나가 사 온 케이크를 나눠 먹었고, 지동화(니체)는 가장 높은 층 음악실에서 함께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그날 밤, 주하나가 옥상을 찾아가는 장면을 끝으로 화면이 다시 산장으로 돌아선다.
“맞는 말이죠. 우리 모두는… 그 친구와 친했으니까. 그 친구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
채하민(로크)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류이든(칸트)의 표정이 굳더니 입을 연다.
“…장례식장에 유일하게 오지 않은 게, 로크 당신 아니었습니까.”
“누가 들으면 용의자 신분으로 장례식장에 얼굴 들이미는 게 참 바람직한 일이겠어요.”
류이든(칸트)의 표정이 미심쩍어진다.
“음, 바람직하진 않더라도, 주하나와 친했던 당신이 어째서?”
“…저 TV 속에서 얼굴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인간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근거도 없이 의심부터 하다니, 도리어 당신이 칸트인지 의심스럽네요. 일단 나갈 생각부터 해야 정상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나가려고 시도하고 있잖습니까?”
정치인인 자신이 가장 먼저 타깃으로 지목된 게 우스운지 채하민(로크)가 씩 웃으며 묻는다. 그 목소리에 분노가 억눌려 있다.
“칸트, 당신, 지금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시계가 틀릴 때도 있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죠.”
“…당신이 마지막에 주하나와 같이 있었던 교실의 칠판에, 붉은 흔적이 있던 걸 봤으니까.”
그러자 잠시 말을 멈춘 채하민(로크)이 심호흡 한 번에 모든 감정을 떨쳐냈는지, 무감각하게 답한다.
“그래요? 전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칠판에 남아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나 류이든(칸트)의 말을 들은 멤버들은 ‘붉은 흔적’이라는 단어를 들었고, 그에게 모든 시선이 꽂혀 온다.
그에 힘을 얻어 류이든(칸트)이 말을 얹는다.
“…지우려다가,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이던데 말이지.”
채하민(로크)은 그걸 의식하고 잠시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다. 곧 그는 넥타이를 조심스레 풀어내더니 숨을 잠깐 뱉어낸다.
그리고 정치인답게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냉정한 표정으로 류이든(칸트)을 주시한다.
“…칸트, 당신.”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 한낱 교수에 불과한 류이든은 그 시선에 옥죄는 느낌을 받으며, 답한다.
“…말씀하시죠.”
“어째서 그걸 경찰에게 얘기하지 않았는지, 제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깔리는 침묵. 카메라가 채하민(로크)을 확대해 포커스 한다. 곧 영상은 학교 속으로 전환된다.
* * *
‘모모지’는 아니지만 김소영과 알고 지낸 인연으로 일을 하게 된 김강우 감독은 가볍게 소리쳤다.
“컷! 좋았습니다. 조금만 쉬었다 갑시다.”
그러자 채하민이 류이든을 노려보고 있던 표정을 풀고 해맑게 돌아와서는 옆자리에 앉은 지동화에게 말을 건넸다.
그 순간적인 전환은 과연 채하민이 아이돌이 맞을까 의심스러워지게 했다.
‘저 정도 실력이면… 신인 배우급인데?’
신인 배우 중에서도 얼굴 하나로 드라마에 출연해서 민폐 끼치는 것들이 많으니, 채하민은 그놈들보다 더 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는 않았다.
물론 아직 깊이 있는 감정 연기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속단은 무리지만,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연기는 넥타이를 풀어내며 숨을 뱉어낼 때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강우 감독님, 어땠어? 연기 나름대로 괜찮지?”
김소영 PD가 옆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묻는다. 김강우 감독은 지동화가 소파에 앉아 치대는 채하민을 귀찮다는 듯 밀어내고 그에 아랑곳 않고 달려드는 채하민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반적으로 연기도 나쁘지 않고 애들 케미도 괜찮고. 특히 채하민이라는 친구, 쟤는 요즘 아이돌에 하나쯤 있는 배우 지망생인가 보지? 제일 잘하네. 거기에 호흡 맞춰 준 류이든 친구도 잘하는 것 같고.”
그 말에 김소영 PD는 살포시 웃었다.
“아쉽지만, 하민 씨는 배우 지망생 아니야. 제가 알기론 메인 댄서일걸?”
“…그래? 그럼 이든이라는 친구가 배우 지망생인가? 저 친구도 기본기가 나름대로 탄탄하던데.”
“저 친구는 리더. 노래도 중간, 춤도 중간이라서 균형감 있는 쪽. 어쨌든 실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고.”
막힘없이 대답하는 김소영을 보며 김강우는 의아해졌다.
“누가 보면 소속사 직원인 줄 알겠어, 아주.”
그 말에 다시 웃는 김소영 PD는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까는 채하민만 지동화에게 머리를 들이박고 있더니 이젠 모든 멤버가 모여서 지동화를 괴롭히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너도 딸 낳아봐. 듣기 싫어도 외우게 되는 정보가 많으니까. 어찌나 재잘재잘 떠드는지.”
물론 그러다 보면 어머니인 본인도 관심을 갖게 된다는 건 비밀이지만.
* * *
채하민(로크)과 주하나의 관계를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어렸을 적,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라며 늘 결과만을 검사받는 삶을 살아왔던 채하민(로크). 그는 주하나와 1학년 교실에서 짝꿍으로 만나게 된다.
친구 따위 미래를 위해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채하민(로크)는 주하나의 일방적인 치댐으로 은근하게 주하나를 친구로 여기게 된다.
그러다가 채하민(로크)는 우연히 학교 내부의 부패를 발견한다.
“…뭐, 흔한 일이지.”
학교의 작은 상담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엿들은 그는…….
“괜히 귀찮아지느니.”라고 생각하며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로크, 뭐 해, 여기서?”
그러나 주하나의 선한 눈빛. 그리고 여전히 상담실 안에서 오가는 성적 조작의 부정.
주하나는 채하민(로크)과는 달리, 무시하고 갈 생각 따윈 없었다.
“…정말 할 예정이야?”
“어! 재물에 눈멀어서는 저런 짓을 하다니, 안 될 일이야.”
채하민(로크)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한다.
“…하, 그럼 같이 해.”
주하나는 분명 편모슬하의 아이, 집안에 돈도 많지 않다고 들었다. 차라리 정치인을 부모로 둔 자신이 끼는 게 일 처리가 제대로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신고 이후 사건이 기괴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단순하고 사소한, 그래서 일상적인 부정부패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윗선까지 그 연줄이 닿아있던 것이다.
채하민(로크)의 부모가 지닌 사회적 권력이 그들을 안전하게 만들어줬지만, 학교 안에선 천천히 고립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서…….
“…내 분명, 사고를 치지 말라 했거늘!”
“음,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라는 게 한낱 정의만으로 구성되는 줄 아느냐?”
“…부정한 권력 따위 인민들이 부숴버리는 게 옳겠죠.”
“또, 그딴! 위험한 소리를!”
그래도 지낼 만했던 집에서조차 눈총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점차, 채하민(로크)은 주하나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기 시작했다. 함께 고생을 겪고 있다는 동질감, 그리고 유일하게 친구라고 인정하게 된 대상이기에.
그러다가 주하나와 친밀해진 네 명이 추가로 모여, 함께 다니게 된다.
그리고 채하민(로크)과 주하나는 채하민의 은근한 응석을 주하나가 받아주는 형식으로 관계로 변한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늘 주하나에게 하나둘 털어놓으며, 채하민(로크)은 마음의 안정을 얻곤 했다. 그리고 가난한 그에게 뭐든 도움이 되려 노력하곤 했다.
그러다가 사건 당일, 그들은 사소한 말다툼을 하게 된다.
“…로크, 이거 별거 아니라니까.”
채하민(로크)는 주하나의 손에 새겨진 손목의 흉터를 보고 눈을 찌푸린다.
“…미친놈이냐. 이게 별게 아닐 수가 없잖아. 대체 무슨 일인데.”
채하민(로크)의 목소리는 위태로웠다. 누가 봐도 자해의 흔적이었기에.
“에이! 또 혼자 진지해져서는! 내가 무슨 일 생기면 알아서 잘 해결하는 거 다 봤으면서.”
“…또 개소리. 너는 네가 손해 보는 쪽으로 문제 해결하는 것밖에 못 하잖아, 멍청한 인간아.”
주하나가 늘 그렇듯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려는 모습을 보자, 분노가 차오른 채하민(로크)은 그에게 화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자신은 주하나를 돕느라 모든 걸 잃었는데 어째서 주하나는 자신에게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느냐고, 왜 비밀을 만드느냐고 그건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도 비논리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소리쳤다.
그걸 보던 주하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순간적으로 옆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어디 가!”
무의식적으로 주하나의 손목을 잡은 채하민(로크). 그러나 그 순간 상처가 덧났는지 손목에서 핏줄기가 흐른다.
그 붉은빛을 마주하자, 채하민(로크)은 거짓말처럼 온몸에 힘이 풀린다.
주하나는 그 상처를 보고, 채하민(로크)을 한번 바라본 뒤.
“…그게 정말인가 봐.”라고 중얼거리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채하민(로크)은 그날 밤, 주하나의 피를 닦으며,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를 미친 듯이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그날 밤, 주하나는 죽은 채 발견된다.
* * *
나는 채하민의 연기를 보다가 문득 숨을 참고 있음을 깨달았다. 채하민이 화내는 모습을 보니 트라우마처럼 내게 화내던 채하민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달리 말하면, 저놈이 연기로 분노하는 모습이 내게 분노했던 모습과 큰 차이가 없게 느껴졌다는 뜻이고, 따라서 연기를 잘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갓 엔터가 연기 레슨을 자주 시켜?”
그걸 보고 있던 류이든도 마찬가지인지 아주 조용히 귓속말한다. 질문을 해준 것은 고맙지만, 아쉽게도 나는 모른다. 기지생이라면 알겠지만 그 생물체는 현재 어딘지 모를 곳에 유폐됐다.
우리 강아지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으니 나는 입을 다물었다. 류이든은 내가 채하민의 연기에 집중한다고 생각했는지 –사실 내가 자신의 말을 무시한 적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인 것 같지만― 고개를 젓곤 다시 앞을 봤다.
그리고 곧 컷 사인과 함께 연기를 끝낸 채하민이 풀썩 쓰러져 내릴 듯하더니, 주하민 역을 맡은 배우분께 인사를 하곤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이런 말 하긴 뭣한데, 꼭 개 같네요. 산책 가자는 소리 들은.”
이현재가 조용히 내 어깨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중얼거렸다. 큰 소리로 할 만한 말이 아닌 건 알겠으나 불쾌하니 치워줬으면 좋겠다.
“근데 생각해 보면 우리 엄청 특이한 거 많이 하는 거 같지 않아?”
옳은 소리. 아이돌이 보통 이런 데에 출연하던가. 물론 신인이니 뉴스만 아니라면 어디든 얼굴을 비칠 수 있다면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겠지만.
“…뭐, 팀장님이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애초에 연예계 따위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던 내가 아이돌 성공 비법 따위를 알 수 있을 리는 없으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건 맞는데… 무슨 아이돌계의 이단아인 양 이러는 게 재밌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이단―아 좋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석준과 류이든의 멍청한 대화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단아는 무슨, 동물농장 주제에.
“얘들아! 나 물 좀 주라! 몸에 기운이 쫙 빠져서 힘들어!”
물을 갈망하는 토끼에게 이단아는 어울리지 않는다.
* * *
다시 산장으로 돌아온 화면.
채하민(로크)은 무감정한 얼굴이다. 모든 감정이 제거된 것처럼.
“저도 알고 싶군요, 진리 씨처럼.”
흘깃 바라본 TV에는 여전히 카운트다운만이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나로 인해 죽은 건지 알고 싶습니다.”
채하민(로크)의 눈에 얼핏 슬픔이 어린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저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했죠. 주하나처럼 가난한 이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는 노동자를 위한 정당의 최전선에서, 모든 가난한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그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마도… 죄책감 때문이었나 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산장 안은 고요함으로 가득 찬다. 채하민(로크)은 웃음 짓는다. 그는 여전히 TV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이젠 알고 싶네요. 제가 방아쇠를 당긴 걸까요.”
마치 TV 너머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던 이현재(데카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표정이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저 악마 같은 인간의 속삭임에 우리가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애초에 믿을 수 없는 인간인데.”
어김없이 이어지는 의심에 이현재(데카르트)는 뒤돌아 걸음을 옮긴다. 톱이라도 직접 만들어서 뚫고 갈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채하민(로크)은 화면만을 바라본다.
그때, TV가 치직거리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OST가 흘러나와 비장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지동화가 작업한 곡이다.
화면이 치직거리더니, 흰 가면을 쓴 사람이 얼굴을 보인다. 이현재(데카르트)의 발이 멈칫한다.
“진리의 이름으로 말하건대,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선언합니다. 아직 밝혀야 할 진실이 남았습니다.”
* * *
채하민이 소파에 벌러덩 드러눕고는 소리친다.
“와… 이게 산장 신만 있는 게 아니니까, 감정선 잡기가 엄청 어렵다.”
채하민이 중얼거리는 걸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신은 다른 일정에 촬영할 예정이라 산장 장면만 몰아서 찍고 있자니, 감정선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채하민이 방금 촬영한 장면은 난이도로 따지면 상당히 높은 축에 드는 장면이니까.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사건이 트라우마처럼 남은 삶이라.’
내 이전 가능성이랑 비슷한 인생이군. 다만 내 경우엔 상황이 저만큼 심각하진 않았지.
“이거, 대본 쓰시는 분들도 엄청 힘드셨을 것 같지 않아요?”
이현재가 채하민의 배 위에 앉으며 말한다. 채하민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냥 무시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영악해 보인다.
‘…여우의 토끼 사냥이군.’
영악하기 짝이 없다.
“근데 동화야, 방금 찍은 장면은 철학이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채하민에게 로크 사상이 여러 측면에서 당시 진보적이었음을 드라마 속의 정치 행위와 연관 지은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했다는 지점이 드라마 속 채하민(로크)의 정치색으로 이어졌음도.
“…와, 그럼 드라마 보면 사상을 절로 배우게 되는 거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준다.
“여하튼 우리 하민이, 고생했어.”
류이든이 블레이저를 벗으며 이현재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옆에 내려놓는다.
…인간이 저렇게 가볍게 들릴 수도 있군.
“근―데 이제 다―음 장면부턴 또 저―희가 고생할― 차례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아직 촬영 1일 차. 범인의 윤곽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황. 모든 멤버가 이런 식으로 주하나라는 인물과의 관계를 촬영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