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86)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86화(86/343)
86.
컴백 이틀 전, 이틀 전까지도 윤성호와 전화를 하며 상황을 들어보니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윤성호의 목소리도 이전보다는 조금 더 밝아졌으니, 아마 그룹 내 멤버들과 관계가 조금은 개선된 것으로 추측된다.
연예계는 내가 쏘아 올린 작은 리스트로 인해 때 아닌 마약 게이트에 빠졌다, 고는 하지만 어차피 벌어질 일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런 데 신경을 쓸 바에는 곧 있을 컴백 쇼케이스를 잘 마무리하는 게 우선이다.
매일이 새벽까지 같은 곡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하는 연습을 하는 생활, 힘들긴 해도, 이런 평화는 언제나 환영이므로 괜찮다.
“야, 동화 형, 이번에 우리랑 컴백 겹친 그룹 중에 레미니아 선배님들 뒤집어졌더라.”
나는 익숙한 음절의 집합에 머릿속을 뒤져본다. 음, 서바이벌 2차 경연 때 했던 지니를 부르신 분들이군.
“…왜?”
예상은 된다만.
“그 팀에서 서지은 선배라고 제일 인기 많았던 멤버가, 리스트에는 없었는데… 뒷말은 알지?”
그렇군. 선택의 책임이다. 책임을 짐으로써 더 나아가는 존재가 되거나 그렇지 않고 나약해지거나 갈림길 위에 서셨겠군. 안타깝게도 내가 죄책감을 가지기엔 죄를 지으신 대가다.
“레미니아 선배님들 말고도 다른 팀도 그래서, 이번 우리 컴백 시즌이 좀 텅텅 비었대.”
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는다만, 밝은 표정을 보니 좋은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타인의 불행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는 건 연예계에서도 통하는 논리인가 보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
“에이, 그래서 한 말이 아니라, 이번에 1위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러니까 미리 공약 정하자. 지난번처럼 일 터지고 하지 말고.”
류이든이 꾸는 꿈이 눈앞에 그려진 듯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보기에 좋지 않고 동감해 주고 싶지 않다.
“괜한 설레발.”
기대는 배신과 실망의 존재 근거가 될 뿐이다. 희망을 품느니 비관의 노예로 사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건 내 삶이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런 내게 채하민이 달려오더니 물을 한 병 건네며 어깨를 장난스레 툭 친다.
“그래도 1위 공약 정도는 정해도 괜찮지 않겠어, 동화야? 설레발이어도 우리가 즐거우면 된 거지. 루미너스 님들도 좋아하실걸?”
놀랍도록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토끼 놈이 해맑은 소리를 해댔다. …음, 그런가. 자존심 상하게도 채하민의 말에 설득당했다.
“그럼, 어떤 공약?”
* * *
블로센스의 공식 SNS는 콘셉트 포토 공개로 인해서 이미 충분히 뜨거웠다.
연예계가 무너지는 세상처럼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지금 시점 블로센스의 컴백 말고는 별로 관심 없는 팬들에겐 연예부 뉴스보다 SNS 공지가 훨씬 더 중요했다.
Official_Blossence
D―2, Snake in Me, Concept Photo Preview.
(류이든 컷. 반쯤 무너진 왕좌에 앉아 뱀을 외면하는 중.)
(지동화 컷. 재킷만 입은 채 누워 검정색 뱀이 목을 타고 다니는 중.)
(채하민 컷. 하늘에 떠있는 건물 잔해에 앉아 세트장에서 가장 큰 뱀과 마주 보는 중.)
(석준 컷. 흰색 햄스터를 품에 안고 뱀으로부터 도망치는 중.)
(이현재 컷. 아무런 뱀도 없는 공터에 홀로 앉아 멍하니 하늘 같은 바다를 바라보는 중.)
1집의 콘셉트 포토가 푸른빛이었다면, 2집인 ‘Snake in Me’의 콘셉트 포토는 회색에 조금 더 가까웠다. 뱀과 약간의 스모키한 눈, 그리고 하늘거리는 의상 등이 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꽃에인생베팅했어
―지동화… 너 이 씨… 재킷만 입고 말이야… 안 여며? 나 울어 진짜… 여며단 다 모여 씨…
룸넛다모여
└죄송합니다만, 조금 더 헐벗은 모습도 보고 싶은 제 욕심을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스노우드롭인섬머
―나… 뱀 좋아했네… 파충류 사육사가 이상형인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진짜…
론리나잇
└조건) 뱀에 잡아먹힐 것 같은데 묘하게 눈이 가는 토끼상의 남성이어야 함 = 불가능하므로 평생 하민이 덕질할 운명인 것
바르고어진
―이든아, 너 무슨무슨법으로 구속돼서 계속 그 착장으로 살아야 한대 ㅜㅜ 무기징역이라니까 나 너무 행복해!!
여우연예계정복기
―…요망한 여우 놈… 요오망한 꽃돌이놈들… 나는 아직 청량함이 더 옳다고 생각하거늘… 요오오오오망하게도 나를 미혹하다니…
등등, 팬들은 티저와 콘셉트 포토에 눈물을 흘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축제의 나날이 한창인 도중, 공식 계정에 올라온 글이 하나 올라왔다.
Official_Blossence
―1위 공약, 뭐가 좋을까요? 루미너스와 함께 정해 볼래요! (웃는 토끼)
…라는 해맑은 목소리가 텍스트에 남은 것 같은 글이었다.
팬들은 각자의 커뮤니티와 친목 계정을 통해 여러 의견 사이의 투쟁에 돌입했다.
―이거는 솔직히, 뭘 하든 좋으니까 애들 고생 안 하고 호강하는 걸로 해야 한다.
└개공감… 공약이랍시고 애들 고생시키진 않는 걸로!
└애들 5성급 호텔 식당에서 밥 먹는 브이로그 찍어줘 니체!
―룸넛들아, 위즈니 공주 복장을 입고 추는 커버댄스, 나만 기대돼?
└와… 진짜… 배우신 분… 오늘도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뜨고 갑니다…
└최소 미슐랭 감독관… 희대의 맛잘알…
―우리 루미너스는 오늘 엄숙하게 동물 코스튬을 선언해야 합니다. 모여봐요 동물농장.
└(팬 쇼케이스에서 각자 동물 머리띠를 쓰고 있는 짤) 블로센스, 동물농장입니다!
└(지동화가 은은하게 미소 짓는 짤) 저희 농장은 관리가 조금 까다롭습니다.
아주 당연하게도, 팬들의 숫자만큼 정하고 싶은 공약이 존재했기 때문에 의견 합일은 고사하고 도리어 블로센스의 고민만 커지는 사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팬들은 즐거웠다.
그러나 그건 팬들에게 한정된 이야기. 블로센스의 독주 따위 바란 적 없던 이들은 그 모습을 굉장히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시ㅡ바 무슨 말만 보면 ㅈㄴ 데뷔 몇 년 차인 줄 무슨 공약이야 더럽게 건방지고 지들밖에 모르는 거 티 나서 역함.
└죄송한데, 댓글에서 썩은 내 나니까 삭제 좀 해주세요.
―초신성급 신인 아이돌 블로센스는 이번에 음방 1위는 물론 ㅈㄴ 실력파인 거 보여줘서 초동 기록 갈아치울 듯 ^^
└ㄹㅇㅋㅋ
└이게 맞지 ㄹㅇ ^^
―그래서 블로센스가 누군데요?
└돌판 떠난 지 최소 6개월이시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돌판에 있으면 블로센스 무조건 안다고 누가 그래 ㅋㅋㅋㅋㅋㅋ 자긍심 개쩌네요…
└신인 중 악플러들 들러붙은 숫자가 1등인데 당연히 돌판에서 모르기 쉽진 않죠!
―준성으로 언플 존나 할 때 알아봤다 ㅅㅂ
└지나가던 타이머입니다! 후배 돌 욕할 때 내 새끼 이름 좀 안 들리게 해라 개 같은 것아
―겸손, 라플레시아들이 배울 덕목이다 ㄹㅇ ㅅㅂ 누가 보면 월클인 줄 알겠네
참고로 마지막에 있는 라플레시아(시체꽃)는 블로센스가 꽃돌이라고 불리는 것을 본 이들이 비꼬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지동화는 이현재와 함께 비방글을 읽는 도중 이 표현을 보고 ‘그런 창의성을 다른 데 썼다면 그 분야의 역사가 변화했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어쨌든 불타는 연예계 속 은은하게 블로센스는 좋든 나쁘든 화제는 되고 있었다.
* * *
니체 엔터 사옥에서 자체 콘텐츠를 찍을 때 자주 활용하는 회의실에 모인 멤버들. 여러 대의 카메라와 많은 스태프분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오늘은 괴상한 것을 촬영하게 되었다.
‘…MV 리액션을 대체 왜 찍는 걸까.’
출연자가 우리인데 말이지.
솔직히 말해, 아직 내 낯짝이 TV에 나오는 건 지나치게, 어색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아이돌이라는 직업은 필연적으로 ‘표정 연기’라고 부르는 것을 해야만 하는 직업이다.
TV 속 잘생기지도 않은 낯짝을 한 내가 잘난 체하듯 표정을 짓는 걸 보면, TV를 폐기 처분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그걸 보는 내 반응을 찍어 올린다니… 거대한 수치스러움의 파도가 몰려온다.
그래, 휩쓸려도 좋으니 수치, 너는 파도처럼 밀려오라. 루미너스 님들의 유희를 위해 우선은 참아보자.
“안녕하세요! 루미너스! 오늘 우리가 뭐 찍으러 왔는지 알아요?”
쓸데없이 발랄한 목소리로 류이든이 진행을 시작한다.
“바로, 저희 2집! ‘Snake in Me’의 타이틀곡인…….”
“‘마지막 시작 : the First Last’의 뮤직비디오 리액션입니다!”
타이틀곡의 제목을 이현재가 지었다. 마지막 시작이라고 제목에 버젓이 적어놓고 그 뒤에 번역어처럼 넣어놓은 건 ‘첫 번째 마지막’이라는 뜻이라서, 그 속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영어 공부나 다시 하라고 뭐라 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소속사에선 다른 제목으로 바꿔보는 게 어떻냐는 말도 있었고.
다만, 이현재가 직접 지었는데 다른 걸로 바꾸고 싶지는 않아서 제목을 바꾸지는 않았다.
“지난번 뮤비에서 내용이 약간! 이어진다고는 하는데, 사실 저희도 들은 게 없어요.”
류이든이 웃으며 하는 말.
“지난번엔 마지막에 동화가 일어나고 뮤비가 끝났나?”
“맞―습니다― 다들 놀다 지쳤―는데 동화 형님 혼―자―일어나면서 끝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게, 지난번 촬영 현장에서 봤던 괴담 같은 거겠지. 뱀이 뭐라 뭐라 적혀있던 그 난해한 종이 쪼가리.
그렇게 지난번 뮤직비디오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듯 우리끼리 대화를 나눈다. 류이든과 채하민이 주로 대화를 나누고 나와 이현재가 사족을 덧붙이면 석준이 헛소리를 하는 구성이었다.
“그럼, 지난번 뮤비는 이제 그만 얘기하고, 이제 한번 볼까요?”
이현재의 중재로 인해 다행히 다음 파트로 넘어갈 수 있었다. 아마도 앞부분 대화는 상당수 편집되지 않을까. 그리고 회사에서 준비해 준 큼직한 노트북을 중간에 두고 아직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검정 화면 위로 니체 엔터의 로고가 조용히 떠올랐다.
“와, 이거 저희도 지금 처음 봐요, 루미너스!”
채하민의 해맑은 목소리. 하여튼 이 아이돌이란 직업은 당사자조차도 결과물이 어떤지 모르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예전에도 1집 앨범을 발매 전까지 실물을 보지 못하기도 했으니.
앞에서 절찬리에 이어지는 영상은 검은 화면이 가로로 갈라져 위아래로 열리더니 가만히 서있는 ‘내’ 모습이 잡힌다. ‘클라우디 블루’ MV의 마지막 장면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화면 속에 있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걷다가, 한 폐허 근처에 앉아 눈을 감는다.
폐허 속, 잔해의 틈에서 은근히 기어올라 오는 검은 뱀. 녀석은 ‘내’ 손을 타고 올라오더니 천천히 목 쪽으로 다가선다.
“와… 동화야, 너 엄청 분위기 있다.”
“아니, 근데 저걸 어떻게 참고 견뎠어? 엄청 간지러웠잖아.”
쓸데없는 소리는 무시하자.
그 와중에 ‘나’는 서서히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나’의 곁에 ‘이현재’가 다가와서는 내 곁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는다.
정지.
화면을 멈춘 이현재가 조용히 말한다.
“저 장면 찍을 때 엄청 추웠어요. 에어컨이 엄청 빵빵해서 막 코끝이 찡하더라구요.”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자세히 보면 이현재 코끝이 약간 빨간빛인데, 다 그것 때문이니까.
“근데 그래서 이거 대체 무슨 장면인 거야?”
류이든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자신이 출연하지 않은 장면이라 잘 모르나 보다. 대강 추측한 것 정도는 말해도 괜찮겠지. 나는 스태프분들의 얼굴을 한번 쓱 훑어보고 바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여기가 뒤안길 같네.”
화면을 바라보며 말하는데, 스태프 쪽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 물이라도 잘못 삼키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