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87)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87화(87/343)
87.
“아마도… 여기가 뒤안길 같네.”
화면을 바라보며 말하는데, 스태프 쪽에서 숨을 깊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 물이라도 잘못 삼키신 걸까.
“오, 뒤안길이 뭐야. 무슨 뜻인데?”
‘뒤안길’같이 어떤 길의 뒤에 있는 곳이라는 건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무의식의 영역이나 어두운 과거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쓰이곤 한다. 지난번 뮤직비디오에서 ‘내’가 ‘이현재’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듯싶은 연출이 있었으니, 저곳이 ‘이현재’의 무의식이지 않을까 싶다.
“오… 그러면 현재가 동화, 너한테 뭔가 정신적인 상담 같은 걸 받는 건가?”
나는 아마도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지만… 이런 종류의 스토리는, 이현재가 과거에 얽매이면 내가 그 과거의 기억에 개입해서 바꿔나가는 식으로 진행되는 게 보통이니까. 다른 멤버들은 이현재의 죄책감 같은 것이겠지.”
“와… 동화 형,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현재가 해맑게 웃으며 답한다. 역시 가르친 보람이 있는 여우다.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주어진 정보로는 가장 그럴듯한 해석일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지난번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줬던 이상한 능력들도 생각해 보면…….”
그리고 그때 내 허벅지 쪽에 손가락이 쿡쿡 찌르는 감각이 이어진다. 류이든과 정해둔, 주변 상황을 봐야 할 때라는 사인. 나는 내색 없이 고개를 들고 스태프분들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조용!! 다른 얘기 해주세요!!
글자만 적힌 종이에서 어떤 절박한 심리가 읽혔다. 저런, 해선 안 될 말이라도 한 걸까. 예상치 못한 실례를 범한 듯싶다.
그걸 모른 채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 채하민이 뒷말을 재촉했다.
“생각해 보면?”
…이럴 때만 눈치가 없는 건 놀랍군. ‘눈치’를 관장하는 뇌 부위와 신체의 연결이 탈부착식이라도 되는 건지 의심스럽다.
“…아름답지.”
채하민이 내 입에서 쓸데없는 소리가 나올 줄 몰랐는지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으나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재생되는 MV.
‘나’의 어깨에 ‘이현재’가 고개를 기대더니,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때 어두워지는 배경 사이로, ‘마지막 시작 : the First Last’가 시작된다.
묵직한 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꺼풀씩 쌓아 올라가는 음들. 폐허가 된 성터가 연상된다.
그러나 그 위로 차근차근 몸집을 불려가는 활기찬 어조. 무너져 가는 성채 위에서 춤을 추는 군중의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나쁘지 않은 곡이긴 하군.
이어지는 나의 목소리. 흥겨운 음색이다.
I was on Fire, 어쩌면 넌 Trauma,
너무나 완벽한 몰락
그 끝에는 항상 너, 늘 전하고픈 단어,
Nothing But You
그러니 이건 The First Last, 마지막은 없어
난해하겠지만 대충 이별 이후 집착하는 가사가 모토다.
곡은 폐허 위에서 춤추는 분위기였으니, 이걸 가사에 적용하면, 이미 끝난 관계에 집착하는 멍청한 인간의 이야기가 된다.
A&R팀과 긴밀히 회의한 결과, 기존에 쓰기로 했던 과거를 벗어던진 해방감보다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기조를 잡아서 그렇다.
뭐… 원래 내가 담고 싶었던 이야기와도 무관하지는 않지만.
영상 속에선 멤버들 주변 곳곳에 뱀들이 나타났고, 멤버들은 도망치거나 맞대응하고 있다.
그 사이에 ‘이현재’는 뱀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돼 있고, ‘나’는 다른 멤버들을 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걸 배경으로 이어지는 곡조는 모든 것을 지르밟고 신난 순수한 아이처럼, 신나면서도 위태롭다.
Cause You Complet Me, 너 없인
그래, 난 이미 패배자고 (Oh, I surrender)
Cause You are Medicine, 너뿐인
그래, 넌 이미 흐려져 가 (So I upend the―)
뮤직비디오 속, ‘류이든’이 손에서 흰빛 광채를 뿜어낸다. 뱀 한 마리가 빛 속에서 사라져 간다.
‘채하민’이 잔해와 함께 떠오른다. 그 위에 뱀이 올라타지 못하도록 높이 올라간다.
‘석준’은 손에 새를 앉혀 두고 무언가를 속삭인다. 그러자 새 여러 마리가 하늘을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이현재’는 돌 위에 누워, 몽롱하게 하늘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 주위로 검정색 기운이 넘실거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이현재’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을 모아 함께 뱀들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저 장면 촬영할 때가 진짜 어이없었어. 뱀한테 무작정 손을 뻗으니까, 진짜 뻘쭘하더라.”
“CG 없이 보면… 원래 다 그렇잖아요.”
“저도, 새― 없―는데 새한테 말― 걸려니까 힘들었습니다.”
…내 기억이 맞으면, 준, 너 아무 데도 없는 곳에 ‘도와줘요, 아기 새님!’이라고 절절하게 소리쳤을 텐데, 힘들었다고?
후렴구, 이현재의 시원한 목소리와 석준의 더블링이 합쳐지며, 해방감이 고조된다.
Rewind― 너와 내 끝이 시작이 돼, 내 시간 위― 모든 것이 되살아나
(I Trade My All, Just for the Last)
Rewind― 해와 달이 뒤바뀌네, 내 시선 끝― 모든 것이 되돌아가
(I Desert My All, Cause It’s the Last)
단 한 순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선언한다.
마치 뱀이 지난 시간의 허물을 벗어던지듯, 새로운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해.
마치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9년의 삶을 버렸듯.
…아쉽게도 가사의 맥락 속에서는, 끝난 인연을 되살리겠다는 미친놈의 몸부림처럼 그려졌지만.
뮤직비디오는 석준의 랩을 거쳐, 채하민의 독무 파트를 지나 끝을 향해 간다. 채하민의 독무는 내가 신경 써서 작곡한 부분이며, 해방감과 기타 여러 감정이 터져 나오는 부분.
채하민이 홀로 서서 웨이브를 추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번 뮤직비디오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파트다.
MV 속에서 모든 멤버가 ‘이현재’의 곁에 모였지만, 주변은 뱀들로 가득하다. ‘이현재’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멤버들은 불안감에 몸을 떤다.
“저거 등 엄청 아프더라구요, 그냥 돌덩이였어서.”
그리고 이현재는 진지한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을 중얼거린다. MV 리액션에서는 영상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하는 게 허용되나 보다.
뒤집히는 모래시계, 영원을 속삭일게
모든 끝, 이번엔 마지막 시작이길
곡의 마지막. 류이든과 채하민의 화음으로 구성해 뒀다. 거친 류이든의 음색과 채하민의 맑은 음색이 겹쳐지며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그리고 그에 맞춰 영상 속 ‘내’가 클로즈업된다. ‘나’는 슬며시 눈을 감고, 눈을 뜬 순간, 뮤직비디오의 첫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예전처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걷다가, 한 폐허 근처에 앉아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런 나를 클로즈업하며, 검정색 막이 내려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채하민의 얼빵한 목소리. 독무 파트에서 춤출 때는 ‘멋지다’라는 감상에 어울리는 인간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몰락해 버렸다.
“…와, 진짜 나 하나도 무슨 의민지 모르겠어.”
류이든이 내 허벅지를 콕콕 찌르며 중얼거린다.
“…솔직히 나도.”
허벅지를 찔렸으니 자연스레 앞을 바라본다.
동화 현재 해석 너무 하지 마요!! 자꾸 팬분들이 할 일이 줄어요!!
…의견 제시도 못 하는 공론장 따위 아무 의미도 없는 것 아닐까. 이 소속사 놈들은 팬분들 노동시키는 데서 즐거움이라도 얻나 보다.
그걸 본 이현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대기 시작한다.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게 그렇게 즐겁나 보다.
“어쨌든 저거 뱀 진짜 무서웠어.”
영상을 보는 내내 감상이라곤 저거밖에 안 하던 류이든이 중얼거린다.
“뱀― 저―는 하민 형님―이 지켜―주셔서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나와 이현재가 잠시 입을 닫고 있자, 자연스레 뮤비 해석 따위는 집어던지고 헛소리로 단계가 넘어가기 시작한다.
“여러분, 저거 마지막쯤에 별별 뱀이 주변에 엄청 많았던 장면 있죠? 저거 CG가 아니었어요.”
이현재가 노트북을 만지작대더니 마지막 장면을 다시 튼다.
“잘 보면 하민 형이 약간 웃고 있잖아요? 이든 형은 공포에 떨고 있고? 이게 다 진짜 뱀이라 그래요.”
…세상에, 채하민, 저 미친 토끼가. 장면상 무조건 공포에 떨어야 하는 건데.
채하민이 그걸 보더니 흠칫 몸을 떤다. ‘망했다’라는 단어를 인간 행위로 표현하면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나도 몰랐어. 너무… 귀엽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저 정도쯤 되면 병인데 말이지. 멤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나도 미소를 지었다.
“자! 루미너스 여러분! 저희 2집 뮤직비디오, 저희 블로센스와 함께 감상해 보시니 어땠나요? 좋았나요?!”
언제 기운이 없었냐는 듯 채하민이 대본대로 엔딩 멘트를 이어나간다. 놀라운 회복력.
“뮤직비디오가 약간 의미심장한데, 여러분이 함께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채하민의 뒤를 이어 각자 한마디씩을 끝내고 이번엔 내가 말할 차례가 되었다.
나는 뭐라 말할지 약간 고민하다가 카메라를 정면에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 제가 작곡한 곡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입니다. 비록 변변찮아도 사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 *
컴백 쇼케이스 당일이 밝았다.
특별할 것 없이 의상을 챙겨 입은 우리는, 마지막 리허설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와… 여기 약간, 무대가 커서 그런지 동선 좀 넓게 해야겠는데?”
춤에 관해선 우리 멤버 중에서 가장 실력 있는 토끼 놈이 말했다.
“그럼, 후렴 때 반걸음 정도만 더 나가볼까?”
류이든이 받고.
“음… 시간이 될지, 잘.”
채하민이 고민하기 시작한다.
나는 동선 수정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서로 부딪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밖에 없으니 가만히 있어야겠다.
‘…윤성호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윤성호와의 사건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나서 전화나 문자로 여러 얘기를 들었으나, 아직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 옆에 망나니 놈은 또 괜한 자격지심으로 팀워크를 망치지나 않을는지.
그러다 나는 무대 위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또 쓸데없는 자책에 휘말리기에는, 일단 최선을 다했으니 한동안은 마음 놓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자!”
젠장. 하나도 못 들었군.
“…이든 형, 설명 좀.”
그러자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 류이든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다가온다.
“안 들었지?”
“…인간의 주의력은 쉽게 흐트러지는 법이야.”
“와! 살다 살다 동화 형, 네가 그럴 줄은!”
이에 채하민이 한 발 걸치며…….
“내가 3분 넘게 혼자 얘기하고 있었던 거구나…….”라고 중얼거린다.
다 꺼져줬으면 좋겠군, 망할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