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88)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88화(88/343)
88.
누차 설명했듯, 지난번 앨범보다 이번 앨범이 조금 더 강렬한 편이다. 그 때문인지 스웨터처럼 하늘거리는 의상이 주를 이뤘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약간 가죽 재질 같은 것들이 주를 이뤘다.
더럽게 불편한 옷이다. 약간만 움직여도 속이 보일 것 같은, 아니 실제로 보이는, 옷의 본연적 기능을 충족하지 못하는 가죽덩어리. 기능론적으로 이걸 옷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심오하게 고민이 든다.
분명 콘셉트는 귀공자들이라는 낯간지러운 것 그대로일 텐데, 옷차림은 누추하고 무례해 보일 뿐이다.
그때.
“이번 곡도 지동화 씨의 자작곡으로 알고 있는데요! 작곡 계기가 혹시 무엇인가요?”
기자분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류이든이 나름대로 괜찮은 말솜씨로 위기를 잘 넘기고 있어서 잠시 딴생각을 했을 뿐인데, 그새 답변이 끝났나 보다.
자세를 가다듬고 마이크를 든다.
이런 질문에는 사실대로 답변하고 싶지만, 우로보로스를 언급하고 처음과 끝이 교차하는 찰나 따위를 얘기하는 건 연예인으로서 못 할 짓이라는 것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
“…음, 하민이 숙소에 뱀을 한 마리 데려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뱀이 허물을 벗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업실로 가 밤새우며 곡을 썼습니다.”
그러므로 사실과 허구의 중간 지점에서 타협을 보는 것으로.
“지동화 씨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선배 가수인 준성 씨와의 ‘Sorry’ 콜라보가 아직도 화제가 될 정도인데요.”
흠, 우리에게 좋은 화제인지, 아니면 모든 걸 불태운 화재인지는 아직 미심쩍지만, 말 자체가 틀리지는 않는군.
“준성 씨가 쇼케이스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는데, 혹시 의견이 있으실까요?”
“…선배님과는 늘 좋은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혹시 제가 예언자이길 바라십니까’라고 말하고 싶지만 화형당하고 싶지는 않으므로 대신에 꼬투리 잡히지 않을 정도로만 답변한다.
그런데 그때부터였을까, 노림수가 명확하게 보이는 날 선 질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인상이 기정사실이라는 말도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블로센스 멤버분들 의견 여쭙고 싶습니다.”라든지, “이번에 실력파라는 이미지가 강한데요, 아이돌이면서도 실력을 어필하는 점이 보기 좋습니다!”라든지.
류이든의 누님과 이들을 비교하면, 대체 왜 기자라는 직업을 택했는지 의아하다.
답하기 곤란할 법한 질문은 나와 류이든이 최대한 막아내는 식의 공방전. 더럽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연예계의 이야기다.
* * *
기자 쇼케이스가 끝나고 곧 있을 팬 쇼케이스를 기다리는 중, 나는 책을 읽으며 가만히 있었다.
“동화야… 나 엄청 긴장돼.”
채하민이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던 내 위로 몸을 늘어뜨리며 중얼거린다. 기자 쇼케이스 때는 긴장하는 티가 안 났는데, 팬분들 앞에 오랜만에 서는 거라 그런지 유독 긴장한 티가 난다.
“…하민, 너, 긴장해서 독무 실수하면.”
“그만! 더 이상 말하지 마! 동화야! 나 진짜 상상만 해도 울 것 같아!”
채하민이 두 손을 끌어모아 얼굴 쪽에 올리더니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놓아두고 채하민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거치적거리는 채하민을 옆에 있던 류이든에게 토스하고 다시 책을 읽는다.
‘…평화롭군.’
최근에 이현재로부터 전해 들었던 인터넷 세계의 이야기.
준성 작곡에 얹혀 팔렸다느니, 신인 주제에 공약 걸면서 나댄다느니, 원하지도 않는데 신인상 유력 후보라고 떠받들어 주는 꼴까지 하나부터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띠링―!
익숙한 전자음이 귀에 들려온다.
[신인상은 퀘스트 완료 조건이니, 원하시는 게 좋습니다!]‘…망할, 기지생. 돌아왔습니까.’
[격한 환영 인사 고맙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문제는 잘 해결된 것 같습니다! 윤성호가 겪을 위기가 상당히 약화되었습니다!]‘…그렇습니까.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 겁니까.’
나는 책을 덮고 소파에 고개를 파묻는다. 오만했던 걸까, 이번에도. 나름대로 최선의 결과를 낸 것이라 생각했는데.
[인간 삶이 시련 없이 성립할 수가 없으니, 그것까지 당신의 탓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런 데 죄책감을 가질 바에 몇백 년을 감금당한 제게 관심을 가지는 게 차라리 합리적입니다!]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러니까 내가 뭘 어떻게 했더라도 인간의 삶 속 고난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는 거군.
…만족하진 않더라도 잠시간은, 아주 잠시간은 안심해도 괜찮을까. 우선, 하나의 반점으로 윤성호를 내버려 둬도 괜찮을 것 같다.
띠링―!
[참, 여담이지만 쓸데없이 존댓말 하는 거 관둬주십시오. 역합니다.]‘쉿, 당신에 대한 제 나름의 예우라 생각할 수 없습니까.’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기지생은 한 통의 알람을 보내왔다.
[죄송합니다! 토 좀 하고 왔습니다!]* * *
예고를 다니는 남고생은 손을 덜덜 떨었다. 라디오에서 블로센스를 접하고 나서 음악이 좋아 가볍게 덕질을 하기 시작했지만, 왜인지 현재 그는 쇼케이스 현장에 도착해 있다.
“…말이 되나, 이게.”
팬 사인회나 쇼케이스에 가는 건 엄청 큰 액수가 필요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식비를 줄이고 용돈을 모아 앨범을 딱 한 장 산 자신이, 여기에, 왜.
니체 엔터가 쇼케이스 같은 걸 손추(손으로 추첨)한다는 건 들었지만 운수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이게 말이 되는 걸지 의심스럽다.
“사실… 장기 매매인 거 아니야?”
그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의심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도 안 돼. 어떻게 한 장 사서…….”
경황도 없이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범죄 영화 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나간다.
아직 부모님한테 효도도 못 해봤는데, 그런데 발은 안 떨어지고 사실이면 너무 아깝잖아, 어떡하지.
그런 기나긴 고뇌의 시간.
쇼케이스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공연장과 약간 거리가 있는 작고 허름한 카페에 앉아 그는 번뇌하기 시작한다.
교복 차림 그대로, 멍하니 앉아있을 때였다.
“오늘은 꼭 채소 주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하민 형?’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채하민이 지동화의 손목을 잡고 카페 주문대로 향하고 있었다.
“…뭐지, 존나 꿈인가.”
상스러운 소리가 절로 입에서 나온다. 화면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왜 이리 잘생겼지.
그걸 들었는지 지동화가 문뜩 이쪽을 바라본다. 남고생은 약간은 차가워 보이는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화들짝 놀라더니 입을 파르르 떨었다.
뱀 앞에 놓인 쥐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두려움, 기대, 어떤 기괴한 감정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지동화는 뭔가를 고민하더니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채하민을 버려둔 채 다가왔다. 천천히 다가와 조심스레 묵례를 한 뒤 손바닥으로 내 손 쪽을 가리키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식 응원 봉, 마음에 드십니까.”
그제야 그는 자신의 손에 응원 봉을 꼭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수치일까 영광일까, 아니면 영욕이 반인 걸까.
‘그것보다! 동화 형 목소리 뭔데! 왜 이렇게 좋은데!’
“이번에 처음으로 발매한 거라, 혹 불편한 점 있으십니까.”
그는 입이 바싹 마른다. 뭐지, 이게 대체. 왜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눈앞에서 불만 접수를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렇게 예의 바르지. 너무, 말도, 이게, 무슨.
그는 무엇이든 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 당황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몸을 숙인다.
“사랑해요, 형!”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직 본격적인 덕질을 시작한 건 아니라 생각했는데, ‘절벽과 소년’을 작곡한 장본인이 눈앞에 있으니 절로 존경심이 차오른다.
“저 진짜, 저 엄청 힘들 때! 형이 쓴 곡 들으면서! 엄청, 어! 엄청 위로! 사랑해요, 형!”
아직도 90도로 숙이고 있는 고개, 지동화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등신처럼 보고 있으면 어떡하지. 혹시 남팬 안 좋아하는 거 아닐까. 분위기 어떡하지.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감사합니다. 제가 무턱대고 찾아와서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노래 좋아해 주셔서 도리어 제가 인사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SNS에 지동화가 예의 바르다는 말이 그렇게 많더니, 정말인가 보다. 누가 봐도 학교 교복인 옷차림인데도 존댓말을 꼬박꼬박 하다니.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지동화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옅은 미소로 나와 같이 고개를 숙여주고 있었다.
“저! 저 진짜! 이번에 앨범 한 장으로! 쇼케이스!”
목소리가 절로 높아지고 떨린다. 카페에 사람이 있었다면 말도 안 되는 민폐였겠지만, 다행히도 이곳엔 자신밖에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분명, 분명 약간 얕게 팬질을 한 것뿐이었는데, 대체 왜 이럴까.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그의 옆, 지동화가 쭈그려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라디오 듣고, 그때부터 SNS에 팬아트도 올리고 있어요.”
지동화는 고개를 한번 갸웃한 뒤, 웃으며 답한다.
“저, 봤습니다. 그 그림. 이든 형을 그리셨지 않습니까.”
“와, 씨, 진짜 꿈 아니죠, 이거?”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주문을 마친 채하민이 지동화의 옆에 같이 쪼그려 앉는다.
“아는 분이야, 동화야?”
“루미너스셔, 하민.”
“와, 정말요? 팬분들 모여서 다치실까 봐 멀리 돌아왔는데! 영광이에요!”
남고생 혼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그 옆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두 명이 쪼그려 앉아있는 기묘한 광경이 잠시간 이어진다.
“…저, 오늘 집 가는 길에, 죽어도 좋…….”
“안 좋습니다. 부디 오래 살아 저희와 함께해 주십시오.”
“맞아요. 평생 저희랑 같이 가요!”
지동화가 단호하게 한마디를 하고 채하민이 이어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를 한 번 더 한 뒤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쇼케이스장에서 뵙겠습니다.”
“…저, 평생 루미너스 할게요.”
손에 야채 주스를 들고 있는 채하민과 아무것도 들지 않은 지동화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일단, 오늘 있었던 거, 만화로 그리자.”
그는 가방 안에 있는 연습장을 꺼내, 지동화에게서 풍겼던 선비 같은 분위기를 포착하고자 노력했다. 쇼케이스 후기 중 가장 많은 공유를 받으며, 퍼질 만화가 이렇게 완성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