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91)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91화(91/343)
91.
프루츠 월드의 세계관에 관한 속성 강의를 석준에게 받고, 이어진 네스퀵과의 2차 회의에서, 곡 주제는 ‘사랑과 배신, 그리고 흑막의 슬픔’으로 정해졌다.
작곡에 참여할 예정인 나, 석준, 네스퀵, 이 세 사람이 아동용이자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루츠 월드에서 주목하고 싶은 지점을 하나씩 골랐기 때문이다.
참고로 석준이 사랑, 네스퀵이 흑막의 슬픔, 내가 배신을 골랐다. 아동 만화 속 배신이라니, 조기 교육용 자료로 손색이 없다. 실제로 석준에 따르면, 프루츠 월드를 시청하는 아이들은 주인공 과일과 친하게 지낸 과일 하나가 마지막 순간 배신을 하는 모습에서 사회의 맛을 잠시 경험한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와 네스퀵은 원탁에 모여 앉아 회의 중이다.
“와…… 사랑과 배신, 그리고 슬픔이면, 위즈니일 이유가…….”
이현재가 가장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똑똑한 놈.
“에이, 이게 다 로망인 거죠! 여러분들과 저의 꿈과 희망을 담아내는!”
오늘도 역시 기상천외한 드레스를 입은 네스퀵이 답했다. 음, 딱 석준만큼 미친 인간으로 분류하면 적절할 듯싶다.
“꿈과 희망을 담은 흑막의 슬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소리를 할 이현재의 중얼거림. 지식인의 옳은 태도다.
“그나저나, 네스퀵 님은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되셨어요?”
채하민의 질문.
대본에 적혀 있는 걸 어떻게든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어색한 타이밍에 입이 열렸나 보다.
“…오, 갑자기요?”
개인적으로 궁금하긴 하다. 어떤 과정을 거치면 저렇게…… 타인의 그 어떤 시선도 무시한 채로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되는지.
우리가 아는 정보라고는, 네스퀵이 20대 중반의, 위즈니 덕후인, 여성, 래퍼, 라는 단편적인 정보의 집합에 불과하므로.
“와, 방송 나온다고 할 때 예상은 했는데, 막상 말하려니 쑥스럽네요. 저 아버지 엿 먹이려고 음악 시작했어요.”
……카메라가 없었나, 지금?
“우리 아버지가 딸내미 취급 개같이 해서 ‘아, X발 그럼 내가 X대로 한 번 살아 볼까’ 하는 생각에.”
나는 재빠르게 천장을 훑어본다. 카메라는 있는데.
그리고, 편견에 찌든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드레스를 입고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아… 옛날 얘기하려니까 담배 말리네.”
……이건, 대체. 내 생각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훨씬 더 개방적이라는 사실을 오늘도 깨닫게 된다.
“우리 아버지가, 딸내미를 거의 집안에서 맞선 보는 용도로 생각하는 게 조금 X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네스퀵은 미소 짓는다.
“처음엔 가볍게 하려고 이름도 옆에 있던 네스퀵으로 지었는데, 어쩌다 너무 진심이 되어 버린 거 있죠? 사람 인생 모르는 거라니까.”
나는 류이든을 바라본다. 뭔가 아득한, 심연 너머의 무언가를 마주친 표정이 인상적이다. 의상, 표정, 언어, 그 모든 것들의 부조화가 류이든의 머릿속 혼란을 구성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파자로 알려진 리오타르는, 인간이 머릿속에 재구성할 수 없는 대상을 보는 과정에서 ‘숭고함’을 느낀다고 했다.
……엄청나게 숭고한 인간이다.
“하여간, 한 기업체의 수장이라는 인간이 딸내미를 무슨 집안끼리 합치는 용도로밖에는 생각지를 않으니, X발, 그냥 가출하고 음악하는 중이에요. 아버지는 X이나 X고 XX를 XXX해 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 * *
HBS 음악방송 대기실. 조금 좁은 대기실이지만 우리끼리 쓸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동화 형, 나랑 매점 갈래?”
류이든은 아마도 여기 매점에 있는 홍삼 주스를 먹으러 가는 거겠지.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모든 멤버가 분장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스퀵 씨, 엄청나더라.”
류이든이 자판기로 함께 가며 중얼거린다. 엄청난 게 아니라 숭고한 거다만.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찾으며 쌍욕을 뱉는 건…… 진짜 엄청 대단했어.”
류이든의 눈이 불안함에 잠식되는 게 보인다. 방송에 나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리더의 눈빛이다.
아쉽게도 방송에 내보내기엔…… 네스퀵의 과거가 지나치게 화려했다.
“대기업 사장 따님분이, 위즈니 드레스, 담배, 쌍욕…….”
끊임없는 중얼거림.
“하민도 기업체 아들이잖아.”
“…그건 별로 안 놀라운데, 네스퀵 씨는 왜 놀랍지? 하민이는 은근 귀티 나서 그런가.”
그 토끼 놈 어디서 ‘귀티’로 정의할 만한 요소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리더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매점에 도착한 우리. 류이든은 홍삼 주스를 하나 사고, 나는 작은 쿠키를 세 개 샀다. 흠, 다행히 딱 세 개 남아있었다. 몹시 운수가 좋군.
“오, 웬일로 너가 군것질이야?”
“…목화가 여기 쿠키 궁금하다 그래서.”
선배 가수들한테 뭘 전해 들은 건지 여기 딸기잼 쿠키 맛이 궁금하다나. 아무튼 맛있게 먹을 모습을 생각하면 귀엽기 짝이 없다.
“오, 효자네?”
“……말이 전후가 많이 바뀐 것 같지만.”
그렇게 돌아오는 길.
“어, 동화! 여서 뭐해!”
누군가 달려와선 어부바를 시도했다. 그리고 육체적 나약함으로 종이와 다툴 수 있는 나는,
“어, 어, 어?!”
자연스레 무너져 내렸다.
바스락.
“……야, 그, 어, 저, 음, 야, 미, 미안, 동화야!”
나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한다. 순하게 생긴 낯짝, 윤성호다.
“이게, 그렇게, 음, 내가 호연이한테도 자주 해서, 도저히 그렇게 모래성 무너지듯, 그렇게 생각을, 어—”
문장이 하나같이 제대로 구성된 게 없다. 그걸 해석하는 것보다도, 넘어질 때 들렸던 ‘바스락’ 소리의 정체가 궁금했다.
나는 무표정으로 내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바라본다. 다, 부서졌군. 세 개가, 다. 목화야.
내 시선을 따라간 윤성호가 2차로 당황한다.
“……딸기잼 쿠키 산 거야?”
“……동생이 먹고 싶대서.”
“웜마.”
단 두 글자를 크게 내지른 윤성호는 재빨리 매점으로 달려가더니, 무너져 내린다. 당연하게도,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테니. 류이든은 그 순간 미칠 듯한 웃음을 토해낸다. 망할 놈.
…망할, 이런 것도 운명이라 부를 수 있다면, 저주할 예정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온 윤성호,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내 앞에서 안절부절못한다.
“……진짜 미안. 어쩌지, 다, 다음 주에도 여기 와?”
“…음, 아마도.”
망할, 오늘 잠시 전해 준다는 말은 취소해야겠군.
심호흡을 한 번 한다. 그제야 침착해진다. 이런 사소한 일로 당황한 건 오랜만이다.
그렇게 침착헤지고 나서야, 윤성호가 홀로 있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연.”
반갑다는 뜻으로 이름을 불렀다. 류이든은 아직 옆에서 껄껄대며 웃고 있다.
나를 진지하게 훑어보던 호연이 안타깝다는 표정이 된다.
“동화, 너무 약해.”
……네가 더럽게 강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지 묻고 싶다, 호랑이.
“내가 너무 호연이 기준으로 생각했나 봐. 평소에 자주 그래서…….”
너는 기준을 잘못 잡은 셈이고, 망할 두부 놈아. 우주의 기준으로 인간을 바라보면 살 이유가 없다는 논리랑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어쨌든…… 미안…… 다음 주에 꼭 내가 살게.”
잠시 간의 소란 끝에 우리는 매점 근처에 마련된 탁자에 앉았다.
“이번에 후속곡 활동하기로 한 거야?”
“아… 그게.”
윤성호가 잠시 어디까지 외부인에게 얘기해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사이, 호연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지현이 마약하, 읍.”
윤성호의 재빠른 손이 입을 틀어막는다. 우리는 이미 그 사실을 알아서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이지현과 다른 멤버들이 마약한 걸 접한 것과 후속곡 활동이 실행된 것은 무슨 상관일까.
철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윤성호가 어색한 낯으로 호연의 등짝을 두들겨 댄다.
“우리 호연이는! 다 좋은데! 가끔 입이 너무! 과한 자유를 누리더라!”
한바탕 소동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윤성호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얘기를 시작한다.
“하… 지난번에 우리 그룹 분위기 좀 이상하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어떻게 해결은 됐는데, 이지현, 걔가 조금 큰 실수를 해서 해결이 된 거라. 게다가 나랑 호연이 둘 말고는 다 개입되어 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외부적으로는 이지현이 리더긴 한데, 회사 내부적으로는 내가 리더인 이상한 상황이거든? 애들도 다 이지현은 피하는 분위기라, 약간…… 따돌림 비슷한 게 됐고.”
저런, 감투를 쓰다니. 인간이 가장 피해야 할 상황에 처했군. 저리 말하면서도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착한 게 어째서 멍청함과 비슷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건 동정할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해야 할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이해할 부분인데.
“그래서, 회사에서는 애들이 침울하고 그러니까 실수도 만회하고 연말 전에 성적 뽕도 뽑을 겸, 조금 급하게 후속곡 일정이 잡혔어. 나도 정신없어서 얘기도 못 했네.”
그렇게 말하며 옅게 미소 짓는 윤성호. 그 미소엔 무거운 책임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법도 하군.
“게다가, 이번에…… 일낸 애 중엔 미성년자도 있어서. 하… 진짜 다 욕이라도 시원하게 박아버리고 싶은데 꾹꾹 참는 중이야. 왜 하나 같이 제정신이 박힌 애들이 없을까?”
“그래서 내가 하잖아, 성호.”
“너는 좀 줄여, 호연아…. 어쨌든, 짜잔, 그렇게 된 거랍니다!”
윤성호는 웃으면서 두 손을 활짝 펼치더니 마치 태양처럼 해맑은 웃음을 뽐낸다. 그 뒤로 호연이 다가오더니 함께 손을 활짝 펼치며 무표정으로 짜잔이라는 말만을 따라한다. ……오늘 만난 인간 중 제정신이라고 할 만한 놈은 거울 속에서만 존재하는 걸까.
“어쨌든, 한번 끝까지는 해 봐야지! 아무리 등신 같은 것들이라도 재활용은 가능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것보다는 쓰레기인 것을 최대한 감추고 봉투 안에 묶어두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능하겠지.”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 인간을 보고, 희망을 지니는 인간을 보고, 그 눈앞에 대고 포기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나는 윤성호의 도전을, 끊임없이 응원함으로써, 그리고 그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들어주는 입 무거운 귀로서, 그의 옆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지현의 부정부패를 약점으로 틀어쥐고 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이게 내가 책임을 지는 방식인가 보다.
“그래! 맞아! 응원해 줘서 고마워,”
윤성호는 그렇게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