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Friend's Love Log RAW novel - Chapter 2
│02. 우리?
「점심 먹자. 나와.」
「미안. 오늘은 혼자 드셔.」
승조는 물기 묻은 핸드폰 액정을 빤히 바라보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지금 막 200미터짜리 레인을 쉬지도 않고 두 번이나 왕복하고 나온 탓이었다.
「약속 있어서 누구 좀 만나는 중.」
「뭔 약속? 누구?」
「님은 알 거 없으세요.」
호기심을 원천 차단하는 칼답이 밉살맞았다. 이럴 때만 답장이 빠르다.
“바쁜 척은.”
나 아니면 같이 놀 사람 하나 없는 거 뻔히 아는데 뭔 약속.
오랜만에 출근안 하는 주말이라며 감격하던 얼굴이 떠올라 일부러 보낸 문자였건만.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뚝, 뚝, 젖은 머리칼에선 물방울이 흘러 떨어졌다. 못마땅한 기분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선베드 위, 마른 타월을 집어 드는 손이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을 빠져나왔다. 방에 가서 시킨 룸서비스나 즐겨야겠단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의미 없이 굴리던 눈동자가 휙, 다시 어딘가를 향해 돌아가며 또렷이 고정됐다.
프라이빗 수영장과 같은 층에 위치한 카페 한구석이었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다. 희진이었다.
승조는 그제야 며칠 전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선배, 난 모르는 사람 만나는 건 아무래도 너무 불편하고… 아뇨, 일할 때랑은 또 다르죠. 저 진짜 소개팅 같은 건 별로 할 마음이….”
마음이 없긴 개뿔. 결국 하는구만.
자연스레, 그녀와 마주 앉아 있는 상대의 뒤통수를 확인하는 그의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머리가 휑한 남자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허허허, 몸까지 들썩이며 혼자 웃고 있었다. 쓰고 있는 안경, 셔츠, 시계, 구두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만 칭칭 감고 있는데 저렇게 볼품없어 보이는 인간은 또 처음이었다. 역시 얼굴이 문제던가. 얼핏 보이는 옆얼굴의 상태가 워낙 처참하긴 했다.
괜한 심술이나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고작 저딴 주꾸미같이 생긴 놈 때문에 감히 날 거절한 건가 싶어, 구경이라도 해 보잔 심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근처 테이블에 털썩, 대놓고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줄곧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그녀는 전혀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남자가 지껄이는 말들이 또렷이 들려왔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가 평일엔 전혀 시간이 안 나서 데이트는 주말에만 가능합니다. 병원 두 개가 다 환자들이 많아서 아주 미어터져요. 조만간 병원을 하나 더 내든지 해야지, 원.”
“…….”
“하여간 여자들, 남편이 쌔빠지게 벌어다 주는 돈으로 성형 수술이나 하고 아주 팔자들이 폈어요. 어렵다, 어렵다 해도 다들 자기 얼굴 뜯어고칠 돈들은 차고 넘치는지. 뭐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먹고사는 거지만요. 허허.”
뭔 사내새끼가 저렇게 말이 많은지. 상대방 반응은 살피지도 않고 신이나 제 할 말만 줄창 떠들어 댄다.
덕분에 앉은 지 3분만에 얼추 상황 파악이 다 됐다. 남자의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 전문 투기꾼 부모 덕에 알량한 돈푼은 좀 가진 것 같고, 본인 주장으론, ‘여자 만날 능력은 충분하지만 일이 바빠’ 아직 기회가 없으셨다고.
“그래서 전 이렇게 희진 씨 같은 자연 미인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희진 씨 같은 분들이 얼굴도, 마음도 예쁜 진짜 미인이죠. 솔직히 더 예쁘고 화려한 여자들이야 주변에 차고 넘치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배우자감으론 영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자꾸 수술 부위만 눈에 들어오고. 허허허.”
엿듣던 승조의 입에서 짧은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새끼들은 대체 뭐가 문제인 건가. 잠시나마 진지하게 고민했던 게 다 무색해졌다. 처참한 외모와 더불어 참담하게 빻은 인성의 컬래버레이션은 애초에 그 답이 아니었다. 이 주꾸미의 진짜 문제는 심각하게 결핍된 자기 객관화 능력에 있었다.
“희진 씨는 뭐, 평소에 배우자로 생각하던 이상형 이런 거 있어요?”
“아… 특별히 이상형이 있다기보단, 그냥 말이 통하는….”
“하긴 뭐 남잔돈 많이 벌어다 주면 장땡이죠. 그런 점에서 희진 씨랑 저랑은 꽤 궁합이 잘 맞을 것 같아요.”
드디어 희진에게 말할 기회를 주나 싶었는데 다시 저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간다. 기름진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안경을 열심히 추어올리면서.
“아. 결혼하고 나면 지금 다니는 회사는 그만둬요. 현수 놈 다니는 회사면, 드라마 제작? 그런 거 하는 데잖아요. 들어 보니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버느라 고생 많이 하는 거 같던데, 희진 씬 나랑 결혼하고 나면 이제 그런 고생 안 할 수 있….”
“저, 잠시만요.”
꿀이라도 먹었나 싶게 조용하던 희진이 그제야 남자의 말을 잘랐다.
“왜요?”
눈치도 없이 되묻는 얼굴이 뻔뻔했다.
“결혼이라뇨?”
“결혼이, 왜, 뭐요?”
“우리 오늘, 이제 막 처음 만났는데 결혼 얘긴 좀…. 전 그냥 선배가 가볍게 한번 만나 보라고 해서 나온 건데요.”
희진의 말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우리 희진 씨 귀엽게 순진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네?”
“아니. 가볍게 남자 만날 나이는 지나지 않았어요? 희진 씨도 이미 많이 늦은 나이인데, 시간 끌어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서로 조건 잘 맞고, 느낌 좋다 싶으면 바로바로 진행하는 게 낫죠. 안 그래요?”
“…….”
“2세를 위해서도 그래요. 늙은 임산부가 태아한테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단 연구 결과, 희진 씨도 알고 계시죠?”
보아하니, 소개해 준 인간 면 세워 주느라 치미는 욕 내뱉지도 못하고 열심히 참는 것 같은데. 더 놔뒀다간 유희진 성격에 화병 나 쓰러지지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아이는 결혼 전에 가져도 됩니다. 요즘 혼수는 그게 대세라면서요? 하하하!”
승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못된 말은 죄 저에게만 할 줄 알지, 남한테는 싫어도 어디 싫은 티를 내는 성격이던가. 이딴 개소릴 듣고도 참고만 있는 바보를 저라도 좀 구해 줘야겠다 싶었다.
“일어나, 유희진.”
“…….”
“밥 먹으러 가자.”
익숙한 목소리에 희진이 번뜩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비뚜름히, 저를 내려다보고 선 매끈한 얼굴을 확인하곤 까만 눈이 더 댕그래진다.
“차… 승조?”
네가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거냔 눈빛이었다.
“가자. 속 안 좋을 텐데 오빠가 얼큰한 파스타 사줄게.”
“누구세요?”
직감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남자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승조를 노려봤다. 상대하고 싶지도 않은 하찮음에, 승조는 쳐다도 보지 않고 희진의 손목을 덥석 잡아 일으켰다.
“아니, 누군데 갑자기…!”
그러자 남자도 벌떡 몸을 일으키며 승조의 팔을 맞잡았다. 앉아 있을 때 예상하긴 했어도, 보기 드물게 땅딸막한 몸매가 퍽 안쓰러웠다.
“존나 말이 많은 타입이시네, 정말.”
“뭐… 뭐라고?”
낮게 뇌까렸으나 분명 저를 향한 게 분명한 혼잣말에, 남자가 발끈하며 물었다.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렇게 말이 많으면 환자들이 좋아해? 수술하러 갔다가 귀에 피 나겠는데.”
불량하게 얼굴을 구기며, 귀찮은 듯 내뱉는 음색은 고저도 없이 평온했다. 듣는 남자의 표정만 붉으락푸르락 열이 올랐을 뿐.
“…뭐, 뭐요?”
“그것도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주옥 같더만. 뭔 개소리로만 이렇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냐, 시끄럽게.”
“다, 당신! 우리 얘기를 엿들은 겁니까?”
“‘우리’아니고 그쪽 얘기만 들었지. 나도, 얘도 아주 좆같아서 못들어주겠던데.”
“하! 뭐야?”
남자는 어이없단듯 눈을 치켜뜨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당신 뭐야? 뭔데….”
“뭐긴, 내가 얘 애인이다. 됐냐?”
“…뭐?”
당황해 있던 희진의 눈이 홱, 그를 올려다보며 번뜩였다.
“뭐… 뭐야? 희진씨, 정말이에요? 지금 이 사람 말이….”
“아뇨! 아니에요!”
이게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멍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려 희진은 부러 더 강하게 부인하며 두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소개팅 자리에 갑자기 남친이 나타났다고 하면 자리를 주선한 선배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연애 같은 거, 생각도 없다고 그렇게 허풍을 떨었었는데, 어쩌면 회사 사람들한테까지 쓸데없는 소문이 퍼질지도 몰랐다. 지금껏 열심히 쌓아 온 평판이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야, 너 미쳤어?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선….”
“알았어, 알았어. 오빠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만하고 가자, 우리 애기. 응?”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개안할 만큼 잘생긴 얼굴이 찡긋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미친놈이, 진짜.
“정말이에요. 그냥 친구예요, 친구.”
희진의 다급한 변명에 용기를 얻었는지, 남자가 어깨를 있는 대로 활짝 펴고 승조의 팔을 꽉 잡아당겼다.
“이봐요, 친구라면서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도…!”
꿈쩍도 않고 버티는 힘에 놀란 남자의 눈이 터질 듯 부풀었다. 한때 수영 선수 생활로 단련된 몸이었다. 독보적인 피지컬과 단단한 근육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더 우월한 수컷인가를 증명했다.
본능적 위기감에, 남자의 손이 스륵, 아래로 떨어졌다.
“너는 아무리 나한테 화가 났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놈을….”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는 그의 말끝에 조소가 묻어났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은 또 어떠한가. 안 그래도 목을 꺾어 승조를 올려다보느라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던 남자가 발끈, 소리를 높였다.
“이… 이런 놈이라니? 당신,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그럼 여기 이런 놈이 너 말고 또 있겠냐, 이 주꾸미 새끼야.”
“뭐, 뭐? 주… 주꾸미!?”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데이트하고 결혼하고 애낳고, 씨발, 아주 지랄을 하세요. 뭐? 늙은 임산부? 이게 미쳤나, 제대로 서지도 않을 것 같은 새끼가 누구더러.”
승조는 흔적도 없는 남자의 중심을 휙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남자는 처음 듣는 모욕적 언사에 경악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 평가질할 시간 있으면 거울이나 좀 봐. 아니. 없어도 봐. 꼭 봐. 만들어서 봐.”
상황이 당황스러워 가만 듣고만 있던 희진의 입가에도 결국 피식 웃음이 샜다. 차마 누구도 할 수 없을 말을 이렇게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이렇게 재수 없이 잘난 얼굴로, 누구보다 싸가지 없게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이… 이 새끼가, 진짜…!”
울화가 치밀었는지,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남자가 저도 모르게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극명해 보이는 힘의 차이에 기가 눌려서인지 선뜻 휘두르진 못했다.
“올라가자. 오빠가 방 잡아 놨어.”
이건 또 뭔 소린가, 그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는 희진의 어깨를 감싸 끌었다. 그러곤 보란 듯 카페를 빠져나와 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게 아닌가.
뒤통수가 따가워 차마 그의 손을 거부하진 못했으나,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희진의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뭐 하는 거야, 진짜. 너 돌았냐?”
“얌전히 타자, 저 새끼 지금 눈깔 뒤집혔다. 여기서 백 스텝 하면 재미없어.”
엘리베이터는 곧장 스위트룸이 있는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자, 희진은 그제야 제 어깨 위의 손을 툭 걷어 내며 어이없단듯 승조를 흘겼다.
“뭘 그렇게 살벌하게 봐. 기껏 구해줬더니만.”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선 그가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뻔뻔하게 나왔다.
“구해줘? 남의 소개팅 다 망쳐 놓고 뭐를 구해줘?”
“말해 봐. 너 나 아니었으면 그 주꾸미 개소리 듣느라 스트레스 쌓여서 사흘은 드러누웠을걸? 그리고 저런 새끼들이 원래 졸라 끈질겨. 한 방에 제대로 안 떨궈 내면 나중에 너만 개고생한다고.”
“남이사, 스트레스를 받든, 개고생을 하든. 네가 왜 끼어드냐고?”
“하여간, 도와줘도 지랄이지.”
승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쯧, 혀를 찼다. 때마침 땡, 하고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기다란 다리가 앞장서 걸어 나갔다.
“들어와서 밥이나 먹고 가. 룸서비스 시켜 놨어.”
“뭐 시켰는데.”
“너 좋아하는 로제.”
희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내가 얘 애인이다. 됐냐?”
잠시나마 그 황홀한 음성에 설렜던 제가 등신이지. 이렇게 꾸준히 불알친구 모드를 유지하는 놈을 두고….
평소 눈곱만큼이라도 저를 여자로 여겼으면 이렇게 무덤덤히 방으로 끌어들이진 않을 테니 말이었다. 차승조는 제게 아무 설렘도, 긴장도 없단 소리였다.
확인 사살을 참 다양하게도 하시지.
“방은 왜 잡아 놨어? 어제도 클럽 갔었어?”
“이 호텔에 클럽 말고도 수영장이라는 게 있거든요, 유희진 씨.”
모르지 않으면서도 괜히 한 번 물어본 거였다. 머리칼이 아직 축축이 젖어 있는 걸로 봐선, 지금도 수영을 하고 나온 모양이었고.
방에 들어선 그가 제집처럼 자연스레 커튼을 열어젖혔다.
희진은 앞이 탁 트여 한강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창의 전경을 바라보며 소파에 앉았다. 제 월급으론 절대 생각도 못 할 스위트룸이었다. 재벌 친구를 둔 덕에 처음 와 본 것도 아니건만, 볼 때마다 감탄이 터지는 광경이었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이렇게 예뻤나, 싶어서.
“아무리 남자가 급해도 좀 봐 가면서 만나. 수준하고는.”
“급하긴 누가 급….”
발끈해 고개를 훅 돌린 희진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바닥에 꽂혔다. 반박하려던 말도 꿀꺽 사그라들었다.
바깥 경치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셔츠 단추를 세 개나 더 느슨히 풀어 버린 그가 와인 잔을 들고 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잘 깎아 빚은 조각상처럼 매끈한 근육이 갈라져 움직였다.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받아 더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소개해 준 놈은 또 뭐야? 더 웃기는 새끼 아냐.”
커다란 한 손에 들고 온 잔 두 개를 내려놓고 와인 대신 맥주를 가득 채웠다. 그러곤 곧바로 테이블 위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툭, 에어컨을 무심히 꺼 버렸다.
와인보다는 맥주. 오일 파스타보단 로제 파스타. 추운 것보다는 좀 더운 온도.
저에 대해서 알아도 너무 기가 막히게 알고 있는 차승조였다.
자연스레 파스타를 덜어 내미는 그의 손을 빤히 봤다. 제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감싸던 그 손의 촉감이 되살아나 선연했다.
떠올리니 괜스레 저릿한 손끝을 맞잡아 꾹 눌렀다.
“돈이 많다. 결혼할 여자를 찾고 있는데, 소개해 준 선배 말론 뭐 조건도 별로 안 까다롭게 보는 편이라나.”
“안 까다로운 새끼가 씨발, 남 품평을 그렇게 하냐? 제 주제 파악은 좆도 못 하고.”
“선배가 볼 땐 그 남자가 나랑 수준이 맞는다고 생각했나 보지 뭐.”
“갖다 붙일 걸 갖다 붙이라 그래. 돈이 뭘 얼마나 많아야 그 주꾸미하고 너하고 수준이 맞는단 소리가 나오는 건데.”
“어휴. 지긋지긋한 외모 지상주의.”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희진은 괜히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넌 나 같은 얼굴을 맨날 보면서 느끼는 바가 없어? 아님 너무 완벽한 얼굴만 보니까 주꾸미 같은 신선한 게 막 땡기고 그러셨나?”
농담같지만 퍽 진담일 게 분명한 그의 말에 헛웃음이 다 났다. 어이없을 만큼 재수 없는데, 또 반박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라서.
“넌 참, 늘 한결같이 재수가 없어.”
“그게 내 매력이라.”
한편 진심으로 부럽기도 했다. 이런 자신감.
얼마나 들이켜 댔는지 금세 맥주가 동이 났다. 그러게 옷은 좀 단정히 입고 앉아 있을 것이지. 희진은 괜스레 열이 오르는 얼굴에, 그를 탓하며 미니바로 향했다.
“아….”
한 걸음 떼는 찰나, 잊고 있던 상처가 욱신대 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려다본 발뒤꿈치에 시뻘건 핏물이 배어 나왔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승조의 미간도 슬몃 좁아져 들었다.
“왜 그래?”
“구두를 새로 바꿨는데….”
입술을 꾹 깨물고, 몸을 굽혀 제 상처를 살피는데 별안간 커다란 그림자가 제 앞에 와 성큼, 허리를 접었다.
“봐 봐.”
길고 잘 뻗은 그의 손이 희진의 종아리를 한 손에 쥐었다. 엉망으로 터진 제 발뒤꿈치를 응시하는 시선에, 그녀는 어쩐지 두 뺨이 홧홧해졌다.
“발이 이 지경인데 왜 또 신고 나왔냐?”
“소개팅하는데 슬리퍼 끌고 나올 순 없잖아.”
“못 산다, 내가.”
승조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들었다. 금세 벨이 울렸고, 프런트 직원이 가져온 구급약 통이 희진의 발밑에 놓였다.
“발이 아프면 다른 구두를 사 신든가.”
“있는데 뭐하러. 돈 아까워.”
“네 발 터지는 건 안 아깝고? 미련하게.”
“네. 전 스위트룸 잡아서 수영장 전세 내고 노는 재벌이 아니라서요.”
“그 재벌한테 사 달라고 하든가.”
“카드도 죄다 뺏긴 주제에?”
“월급쟁이 재벌 생각해 주는 소리 하시네.”
그가 혀를 차고 다시 종아리를 쥐었다. 그 체온에 이상하게 심장이 간지럽고 야릇해졌다.
“내가 할 거야.”
밀어내고 다리를 빼내려 했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가만 좀 있어라.”
닿은 살갗이 덴 듯 화끈거렸다. 피나는 거 처음 보나, 뭘 이렇게 쳐다보는지.
“골라도 왜 이런 걸 골랐어? 딱 봐도 불편해 보이는구만.”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발목을 쥐고 소독약을 거즈에 발라 뒤꿈치에 대는 손길은 그답지 않게 다정하고 섬세했다.
“선물받은 거라 어쩔 수 없었어.”
“누구한테?”
“대표님한테.”
“대표? 한동윤?”
대표란 말에, 그가 손을 멈칫 세우고 뾰족한 시선을 보내왔다. 마땅찮은 그 눈빛은 분명 추궁의 의미였다.
“요즘 계속 같이 다녔잖아. 현장도 같이 나가고, 광고주들 미팅도 같이 다니고. 하필이면 같이 있을 때 구두 굽이 부러져서.”
접촉 사고사건이 핑계가 되어, 희진은 아예 새 대표의 업무 보고 담당이 된 듯했다.
“네가 걔 비서냐?”
“그러게. 괜히 사고를 내서, 약점 잡혔지 뭐.”
희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읊조렸다.
멈췄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녀는 말없이 그 머리꼭지를 내려다봤다. 커다란 덩치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세상 제멋대로고, 무서울 것 하나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이렇게.
“언제까지 그놈이랑 붙어 다녀야 하는 건데?”
“거야 모르지 뭐. 대표님 마음인데.”
간지러울 만큼 조심스레 상처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던 그가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존나 구멍가게냐? 뭔 놈의 회사가 그렇게 체계가 없어? 대표면 뭐 아무나 비서처럼 갖다 부려 먹어도 되는 거야 뭐야?”
이상하게 한동윤 얘기만 나오면 발끈하는 듯한 건 그냥 제 기분 탓인가 싶었다.
“맨날 야근에, 주말 출근에, 근로기준법 위반은 예사고. 확 노동청에 신고해?”
“어디 그래 봐.”
“시킨다고 다 해? 부당하면 거부를 하셔야지. 너, 그 많던 저항 정신 다 어디갔냐?”
“월급 주는 사람이 까라면 까는 거거든, 원래.”
“그래. 그 월급 받아서 아주 부자 돼라.”
빈정대면서도 기어코 밴드까지 다 붙인 그가, 그제야 쥐고 있던 그녀의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러곤 비치되어 있던 실내용 슬리퍼를 가져와 툭, 희진의 옆에다 내려놓았다.
“됐고. 백화점이나 가자.”
별안간 무슨 백화점인가 싶어 쳐다보자, 그가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편한 걸로 새로 하나 골라. 흉측하게 발에 피 칠갑하고 다니지 말고.”
찌르르, 또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 심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 * *
차창 너머를 보며 쯧쯧, 혀를 차는 엄필중 회장의 노안에 짜증이 묻어났다. 조찬 모임을 마치고 나오던 중 우연히 로비를 지나가는 승조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허구한 날 호텔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손자가 마뜩할 리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허송세월을 보낼 것인지.
능력이 없는 놈도 아니고, 잘나도 너무 잘나 문제인 놈이 그러니 더 속이 막혔다. 엄 회장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제게 보란 듯 일부러 이런다는 것을.
그래서 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니. 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딸을 허망하게 잃었던 것도 모자라 손자마저 잃을 순 없어서.
그저 이렇게, 손자의 긴 방황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여기 수영장 시설이 워낙 좋습니다, 회장님, 숙박하면서 같이 이용하기도 편하고요.”
엄 회장의 시선을 눈치챈 건영이 승조를 변호하고 나섰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요즘 저놈 만나는 여자 있냐?”
불현듯 뜬금없는 질문이 돌아왔다. 건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엄 회장을 봤다.
“박 사장이 그러던데. 며칠 전에 백화점에서 웬 여자 구두까지 사서 신기는 걸 봤다고.”
제가 아는 한, 요즈음의 차승조는 충분히 금욕적이다 못해 무성애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차승조가 바른 생활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만나는 여자가 있다니.
“아뇨…. 그렇진 않은 것 같던데.”
“노는 건 좋다만, 말 나오지 않게 단속만 잘 시켜. 제대로 결혼 얘기 꺼내기도 전에 책잡혀 봐야 좋을 거 없지.”
“결혼, 이라뇨, 회장님?”
“신 실장이 두정그룹 막내랑 자리 한번 마련해 본댔다.”
“승조 결혼시킬 생각이십니까?”
“해야지. 할 나이가 지나도 한참 지났어. 언제까지 이렇게 저놈 고집부리는 거 두고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혹시 알아? 제 가정 꾸리고 살다 보면 책임감이라는 게 좀 생겨서 정신 차릴지.”
말하는 엄 회장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작정한 표정이었다.
또 한바탕 피바람이 불겠구나. 건영은 불길한 예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 * *
희진은 시동을 끄고, 시간을 확인했다. 곧바로 로비로 올라가 출발하면 미팅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할 수 있을 시간이었다.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데 또각, 제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승조가 새로 사 준 구두였다.
아무래도 눈치가 좀 보였다. 나름대로 신경 써 사 줬는데 그래도 몇 번은 신고 다니는 걸 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사람이 예의가 있지.
조수석에 벗어 뒀던 동윤의 구두를 다시 꺼내 신었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미팅 자리엔 이런 구두가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했고.
서둘러 로비로 올라가니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윤이 그녀를 반겼다.
새로 제작하는 영화의 투자자 미팅 자리였다. 동윤이 부탁하지 않았어도 희진이 동행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다. 초기 투자 과정에서 한 번쯤 마케팅 실무자 브리핑이 필요하긴 했다.
미팅 장소는 동윤의 비서가 예약해 뒀던 한식당이었다. 대화는 매끄러웠고 분위기 또한 나쁘지 않았다. 꽤 까다롭다던 투자자가 의외로 무던하게 나온 덕이었다.
“마케팅 관련해선 아마 걱정 안 하셔도 될 만큼 완벽하게 진행이 될 겁니다. 여기 유희진 팀장님이 워낙 출중하신 분이시라.”
“그러게요. 기대 이상이네요.”
투자자는 꽤 흡족한 표정이었다.
“대표님이 아주 든든하시겠습니다. 이런 직원 만나는 것도 오너의 복이거든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고.”
불쑥 동윤의 시선이 제 옆에 앉은 희진을 향해 왔다. 칭찬이라기엔 좀 과하게 그윽한 눈빛이었다. 희진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화제가 자연스레 일상적 안부로 넘어갔다. 어느 정도 일 얘기는 마무리된 듯싶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들러 한숨을 돌리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낯익은 실루엣의 기럭지가 눈에 들어왔다.
“야. 차승조.”
휙, 고개를 돌리는 입술에 담배가 물려 있다. 희진을 위아래로 훑던 그의 시선이 그녀의 발끝에 가 걸렸다. 눈썹이 설핏 치켜 올라갔다.
“너 그, 구두, 또.”
“밴드 붙였어. 별로 안 아파, 오버하지 마.”
또 잔소리가 이어질까 싶어 서둘러 선수를 쳤다.
“여긴 웬일이야?”
“속아서.”
“뭐?”
“오늘 건영이 형 생일이잖아. 밥 먹자고 부르길래 왔더니 노인네가 떡하니 앉아 계시네. 한정식집으로 부를 때 눈치 깠어야 하는데.”
핏. 희진의 잇새에서 웃음이 터졌다. 저런 표정으로 담배나 피워 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저 더러운 성질머리에, 안에서 회장님과 또 얼마나 큰 소리를 내고 나왔을지.
“너는 뭔데. 또 소개팅이라도 하냐?”
두툼한 입술에서 뽀얀 연기가 그림처럼 피어 나왔다. 또 이 구두를 신은 게 아무래도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소개팅은 무슨, 대표님이랑 미팅 왔거든?”
“또 그놈이냐?”
불현듯 잘난 미간이 훅 우그러진다.
“넌 왜 이렇게 대표님 얘기만 나오면 과민 반응이야, 무섭게.”
“내가? 언제? 네가 맨날 그 새끼 얘기만 한 거겠지.”
“그 새끼라니. 설마 지금, 우리 대표님 말하는 거?”
“우리?”
높아진 볼륨으로 되묻는 그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득거렸다.
얘가 대체 왜 이렇게 저기압인 건가. 안에서 회장님이랑 많이 안 좋았던 건가 싶어 희진은 까만 눈만 댕그랗게 깜빡였다.
“유 팀장님.”
그때, 뒤에서 동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기하던 투자자까지 함께 나오는 걸 보니 아예 자리를 파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무적 미소를 장착하는 그녀의 모습에, 승조는 그저 기가 막혀 헛숨을 내뱉었다.
“유 팀장님, 오늘 반가웠습니다.”
“네, 저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 언제 한번 또 식사 같이 합시다. 한 대표랑 셋이서. 한 대표가 꼭 자기도 껴야겠대. 보기랑 다르게 아주 질투가 많은 타입이야. 하하하!”
지랄.
희진은 뒤통수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욕지거리에 흠칫했지만, 태연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다행인지 뭔지, 투자자는 마지막까지 기분 좋게 웃으며 사라졌고, 자리엔 세 사람만 남았다.
“아는 분이신가 봐요?”
승조와 희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동윤이 먼저 질문을 던져 왔다. 희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친구예요. 우연히 마주쳐서.”
그녀의 소개에도 승조는 동윤에게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느긋이 담배만 태울 뿐이었다.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아주 오만하고, 무례하게.
태도에서 확실히 묻어나는 적개심에, 동윤 또한 인사를 포기하고 다시 희진을 응시했다.
“가요. 데려다줄게요.”
“퇴근 시간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일이 남았어?”
불쑥 동윤의 말을 끊은 그가 담배를 구둣발로 지르밟았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동윤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말 못 할, 묘한 긴장감이 팽팽해지고 있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희진이 그를 향해 휙 눈을 흘겼다.
“이으. 느 므쳣스?”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봐도 시비조인 게 분명한 불량한 그 얼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누구 밥줄을 끊어 놓으려고 이러는 건가, 정말.
그러나 승조는 동요라곤 한 자락도 없는 태연한 얼굴로, 되레 동윤을 향해 물었을 뿐이다.
“일 끝났으면 좀 데려가도 되죠? 애 몰골이 말이 아닌데.”
질문이었으나 애초에 답은 들을 생각도 없었던 게 분명했다. 답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죽 잡아끄는 강한 악력에 낭창한 몸이 힘없이 팔랑팔랑 끌려갔다.
희진은 스쳐 지나치는 동윤을 향해, 다급히 작별 인사를 했다.
“저기, 그럼 내일 뵐게요, 대표님.”
동윤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 응시했다.
그에게 끌려가면서도 투닥투닥, 주먹질을 하고 험한 말을 내뱉는, 희진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귀엽기도 해서였다.
맡은 일은 늘 완벽히 해내는 똑 부러진 마케팅 팀장. 누구보다 책임감 있고 성실한 직원.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따뜻하고 맑은 심성을 가진 사람. 지난 한 달간 자신이 알고 있는 희진의 모습은 그게 전부였었다.
그런데, 희진에게 이런 또 다른 모습이 있었던가 싶었다. 문제는 이런 모습마저 매력적이라, 어쩐지 내심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거였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돌아서는 동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