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Friend's Love Log RAW novel - Chapter 3
│03. 진짜 ‘X된’ 건 누구
지루한 회식이 길어지고 있었다. 새 대표가 오고 한 달 만에야 마련된 환영 회식 자리. 자리가 자리인지라 중간에 내뺄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뭐, 거의 유 팀장 능력으로 버티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표님. 그동안 우리 유 팀장이 악착같이 PPL 따 오고 밀어 넣어서 그나마 자금 유입이 되고 어찌어찌 굴러갔던 거거든요. 아주, F&F의 인재예요! 인재!”
이 인간이 취했나, 진짜.
평소답지 않은 본부장의 연이은 칭찬에 희진은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염 대리가 명예퇴직 희망자 명단에서 본부장 이름을 봤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욕심 많은 인간이 이렇게 타인 칭찬에 후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 변하면 갈 때가 된 거라더니.
“그간 유 팀장님이 정말 애 많이 쓰셨나 보네요.”
희진은 제게로 향하는 동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괜히 술잔을 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비운 술병이 벌써 제 앞에 두 병째였다. 좀 과했나 싶게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다.
냄새나는 고깃집에서 몇 시간을 어색하게 웃으며 앉아 있었더니 입가가 다 뻐근했다. 지루하고 불편해 테이블 밑으로 힐끗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직도 회식 중?」
30분 전 보내온 승조의 메시지였다.
「응. 죽겠음.」
답장을 보내자마자 읽는 걸로 봐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괜히 미안해져 연달아 액정을 두드렸다.
「언제 끝날지 몰라. 그냥 내일 봐.」
오전까진 회식이 잡힌 줄도 모르고 저녁 먹잔 차승조의 메시지에 콜을 외친 탓이었다.
「됐고, 끝날 때쯤 전화해. 괜히 대리 불러서 피 같은 돈 쓰지 마시고.」
이럴 땐 또 꽤 쓸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간헐적으로 예쁜 짓을 일삼는 차승조는 참, 오래 알았어도 당최 종잡을 수가 없는 타입이었다. 분명 너무 잘 아는데, 또 전혀 모르겠기도 한 기분이랄까.
어느새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직원들도 모두 지친 기색이었다.
“그럼 오늘은 이쯤 하고 일어들 나실까요.”
때마침 맥을 끊는 동윤의 한마디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끝.」
한글자만 보내도 알아듣기 충분할 메시지를 서둘러 전송했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식당을 나왔다.
인사불성이 된 본부장을 제일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하나둘 인사를 하고 각자 사라지는 타이밍이었다. 그 틈에 끼어 슬쩍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한동윤이 불쑥 눈을 맞춰 왔다.
“유 팀장님은 저랑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네?”
“우리, 주소 같잖아요.”
이게 뭔 소리냐 추궁하는 눈빛들이 쏟아졌다. 자기들끼리의 이상한 눈빛의 교류 또한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불편한 오해와 분위기가 대체 다 뭐란 말인가.
“아니, 그게….”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뭐라 해명할 새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이 야속했다. 혹시 이 남자가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 이러는 건가 싶어 그를 올려다봤으나 표정은 영 무구하기만 했다.
“대리 불렀습니다. 곧 올 거예요.”
“저기, 대표님.”
“네.”
“거기, 그러니까… 그날 거기는 제 집이 아니라 친구 집이었어요. 뭘 좀 가지러 갈 게 있어서 아침에 잠깐 들렀던 것뿐이고요.”
“아. 그랬군요.”
동윤은 멋쩍게 웃었다.
사실, 정말 몰랐던 건가도 의심스럽긴 했다. 알 사람은 다 알 만한 뻔한 월급으로 어떻게 그런 집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여튼 금수저들이란. 문득 금수저의 표본 차승조가 자연스레 떠오르고 말았다.
이 자식, 지금쯤 출발은 했으려나. 괜히 마음이 바빠졌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대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어디 가서 한잔 더 안 할래요?”
무슨 뜻인가. 휙 돌아본 그의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네?”
무언가, 망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결국 그가 무언가 결심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가까이 섰다.
“아…. 도저히 안 되겠네요. 내가 뭐 숨기고 감추는 데는 영 서툴러서.”
성큼 가까워진 그를 올려다보는 희진의 새카만 눈동자도 더불어 어색하게 굴러갔다.
이 험한 정글에서 눈치 하나로만 버텨 온 게 벌써 9년이었다. 성질 뭐 같은 피디들 비위 맞추고, 돈 줬다고 갑질하는 광고주들한테 살랑살랑 꼬리 흔들어 가며 쌓은 짬이 어디 보통의 것이던가. 말하는 목소리, 어색한 입꼬리만 봐도 상대가 제게 기꺼운 소리를 할지 불리한 말을 할지 정도는 척 알았다.
“혹시,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행여 그의 입에서 마음이 바뀌었으니 접촉 사고에 대한 잘잘못을 따져 보자는 말이라도 나올까 괜스레 긴장이 됐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표가 제게 이렇게 우물쭈물 어색해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 희진 씨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요.”
그런데, 이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얘기였다.
동그란 눈동자가 훅 부풀어 올랐다. 상사가, 그것도 한 달 전 새로 온 회사의 대표 이사가 대뜸 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당황한 입술이 절로 헤 벌어지고 있었다.
“아.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회사에서의 대표와 직원, 공적인 관계 이용해서 부담 주려는 거 전혀 아닙니다. 물론, 믿기 힘들겠지만.”
“…….”
“네. 솔직히 말할게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이러는 건가.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날 아침에, 지하 주차장에서.”
“…….”
“희진 씨 차에서 내리는 거 처음 봤을 때부터 많이 놀랐어요. 그동안 내가 너무 찾던 여잔 거 같아서. 그때 희진 씨가 먼저 명함 안 줬으면 내가 주려고 했어요. 어떻게든 차 핑계대고서라도 다시 만나려고요. 근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명함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더 확신이 섰고요.”
확신? 대체 무슨 확신?
희진은 타임을 요청하듯 손바닥을 펴 보이며 동윤의 말을 끊었다.
“저기, 저기요. 죄송한데, 제가 술을 마셔서 좀…. 그러니까, 제가 지금 대표님 말씀의 의도를 착각하는 건가….”
“착각 아니에요.”
“…….”
“맞아요. 나 지금 유희진 씨한테 첫눈에 반했단 소릴 열심히 하고 있는 겁니다.”
고백.
아, 고백이구나.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들어 봤던 게 언제였던가. 아마 스물세 살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술김이었지. 그때도 어렵게 용기 낸 상대의 진심을 단칼에 거절할 수 없어 곤란했었고.
“미안해요. 역시 많이 당황했죠.”
아무 말 없이 가만 눈동자만 깜빡이고 선 희진에게 그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희진은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졌다. 느닷없는 남자의 고백에 가슴 뛰고 설레는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과거 연애의 역사나 반추하고 있다니.
“표정 보니까 괜히 말했다 싶네요. 맞아요. 내가 급했어요. 그동안 내내 조바심이 나서 힘들었었거든요.”
“…….”
“한 달 내내 희진 씨 내 옆에 뒀던 이유, 개인적인 사심이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물론 희진 씨 덕분에 일이 수월했던 것도 사실이지만요.”
“…….”
“좀 더 지켜보고 싶었어요. 희진 씨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근데, 역시나 보면 볼수록 내 첫 느낌이 맞았단 확신만 강해지더군요.”
정적이 내려앉았다. 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한 번도 한동윤이란 남자에 대해 아무 고민도, 아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전….”
“…….”
“하,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때였다.
“유희진.”
어디선가 구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순간, 시의적절하게 나타나 준 차승조.
그제야 숨이 트였다. 무례하고 불량하기 짝이 없는 그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반갑고 고마워서.
* * *
“외국엘 오래 살아서 그런가. 뭐가 그렇게 솔직하고 자신만만하지? 사람 당황스럽게.”
좁은 골목길 초입의 편의점 앞 노상 테이블에 앉아 어느새 세 캔째 맥주를 홀짝이며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얼굴이 발그레했다.
내 불편해 제대로 뭘 먹지도 못했다며 징징대고 고른 메뉴가 고작, 컵라면에 과자 몇 봉지라니. 하여튼 유희진 취향 한번 소박하기도 하지.
승조는 긴 다리를 꼬아 앉아 가만히 그녀를 관찰했다.
“아니다. 돈이 많아서 그런 건가? 차승조 너도 여자 꼬실 때 이러냐? 막 꼬시면 다 넘어올 것 같고, 좋다고 먼저 들이대 주면 상대방이 황송해할 것 같고 그래?”
오물오물, 핑크빛 입술이 잘도 움직여 댄다. 술도 잘 못하는 주제에 뭘 이렇게 흥분해서 달린단 말인가. 보나 마나 바람둥이 기질 다분한 놈의 추파에 이렇게나 뜻깊은 의미까지 부여해 가면서.
“그래서 막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첫눈에 반했단 말도 서슴없이 하는 거고?”
대꾸도 않고 저도 모르게 희진의 얼굴을 뜯어봤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동그란 이마와 한없이 말랑한 찹쌀떡 같은 두 뺨. 별이라도 박은 듯 반짝거리는 새카만 눈동자까지.
뭐, 꽤 예쁘장하고 귀여운 외모인 건, 그래. 인정.
대학 때부터 희진에게 슬쩍슬쩍 추파 던지던 놈팡이들을 어디 한둘 봐 왔던가. 근데도 희진은 신기하리만큼 남자에게 통 관심이 없었다. 처음 알고 지냈던 스무 살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지금껏 그녀가 남자랑 연애하는 걸 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오랜만에 남자한테 고백받으니까 그렇게 설레시나?”
“설레긴, 무슨. 어이없었다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나 별다르지 않을 거라 예상하는 거였다.
“근데, 싫지는 않더라고.”
문득, 맥주 캔을 입가로 가져가던 승조의 손이 멈칫, 공중에 섰다.
“이상하게 귀엽더라?”
이런 반응은 예상에 없었다. 힐끗 본 희진의 표정은 분명 조금 전 상황을 곱씹고 있는 거였다. 핏, 말려 올라가는 붉은 입꼬리가 괘씸했다.
“오히려 너무 직진이라 더 진심인 게 잘 느껴지더라. 뭐랄까, 딱 봐도 거짓말 못 하는 타입? 젠틀하고, 정중하고, 여유 있는 사람 같아.”
뭐라는 건지. 괜히 목이 타 남은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고작 한 달 본 놈을 잘도 아시네.”
“나 사람 좀 잘 보거든?”
“아. 잘 봐서 최성훈 그 새끼한테 그 뒤통수를 맞으셨어?”
“하, 참 나. 그 얘긴 또 왜 나와? 대체 언제 적 얘길.”
20대 초반, 유일한 연애 상대였던 최성훈과는 3년쯤 사귀다 헤어졌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호텔 로비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던 걸, 승조가 우연찮게 목격하고 주먹을 날린 덕이었다.
“암튼, 이상하게 조바심이 났대, 나 때문에. 그래서 내가 부담스러워할 줄 알면서도 솔직하게 고백 안 할 수가 없었다.”
취한 게 분명했다. 아까 했던 얘기를 구태여 반복해 말하는 걸 보면.
“그래서 좋냐? 그새 넘어가셨어?”
“당연히 좋지. 잘난 남자가 나 좋다는데 그럼 안 좋아?”
“그 잘난 놈이 왜 널 좋아할까는 생각 안 해 보셨고?”
“방금 그 말, 묘하게 기분 나빠지려고 한다.”
“첫눈에 반하긴 개뿔. 널 어지간히 만만하게 봤으니 그딴 개소릴 하지.”
“뭐?”
“다, 누울 자릴 보고 다리 뻗는 거라고.”
“아, 이게 진짜.”
탁, 희진은 빈 맥주 캔을 테이블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으며 눈을 흘겼다. 그러더니만 새 캔을 또 뜯어 벌컥벌컥 들이켠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그만 마시지?”
역시나, 제 경고는 귓등으로도 듣질 않는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불안은 금세 현실이 되었다.
플라스틱 테이블 위엔 희진이 비워낸 빈 캔이 수북이 쌓여 뒹굴었다. 더불어 눈동자도, 몸도 풀려 버린 그녀가 고개를 처박은 채 잠꼬대 같은 혼잣말을 중얼대기 시작했다. 희진의 오랜 술버릇이었다.
“나더러 좋다고오, 조타고 하는데에! 기분이가 나쁠 거어는, 또 무어야?”
정말이지, 이렇게 여지를 주고 다니니 그딴 날파리 새끼들이 꼬이는 거다 싶었다.
“자알, 생겼지! 친절하지! 어휴, 땡큐지, 땡큐. 가암삽니다! 감삽니다!”
인사하듯 이마를 꾸벅이며 테이블에 박는 통에, 맥주 캔들이 우당탕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런데도 좋다고 배시시 웃으며 계속해 뭐라 뭐라 구시렁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얼씨구.”
맨날 술이나 퍼마시고 언제까지 그렇게 인생 난봉꾼처럼 살거냐고, 입버릇처럼 제게 퍼붓던 잔소리가 다 무색했다.
건영 형이 이 꼴을 봐야 하는데. 아니, 세상 사람들이 다 이걸 알아야 하는데. 대체 누가 누구더러.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맥주를 뺏고 팔을 잡아 일으켰다. 골목 안으로 5분만 걸어 들어가면 곧바로 희진의 자취방이었다.
“일어나, 얼른.”
“아, 왜애! 나 더 마실 껀뎃! 갈람 너나가!”
더 마시겠다고 반항 아닌 반항을 하는 희진의 몸을 슬쩍 끌어당겼다. 그 작은 충격에도 힘 풀린 몸이 휘청거렸다. 부드러운 다갈색 단발머리가 스르륵, 자연스레 품으로 쏟아져 흘렀다. 이윽고 낭창하게 감겨 오는 가느다란 허리. 풍만하게 몰캉대는 젖가슴의 촉감까지 연이어 그를 때렸다.
일순 머리털이 쭈뼛 섰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아래가 뻣뻣하게 서고 있었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제 몸이 생각보다 희진에게 본능적으로 반응해 왔단 사실 말이었다.
“아…. 씨발.”
또 시작이었다. 욕지기가 절로 치밀었다.
평소 유희진은 남자란 동물의 본능적, 생리적 현상에 대해 퍽 몰지각한 데가 있었다. 아니, 기본적으로 남자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단 말이 더 정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라지만 남자인 제게 이렇게까지 경계도 거리낌도 없이 굴 순 없는 거였다.
나란히 잘 걷다가도 불현 폴짝 뛰어 어깨동무를 하는 건 예사고, 장난이랍시고 헤드록을 걸거나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부위인 옆구리나 겨드랑이를 쿡쿡 찔러 대는 등의 무자비한 신체 접촉은 예고도 없이, 아주 빈번히 일어나곤 했었다.
그때마다 열심히, 애써 태연한 척했으나 실은 매우 곤욕스러웠다. 누구보다 본능에 취약한 육신을 지닌 탓에 지나치게 건강한 아랫도리가 제멋대로 활개를 쳐대서.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이렇게나 무방비하게 안기고 비비적대는 유희진에게 어떻게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태연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계집애가, 진짜….”
세상 무서운 거 모르지.
너무 가벼워 업은 것 같지도 않았던 몸을 침대에 내려 뉘었다. 서로의 집 비밀번호 정도는 가볍게 공유하는 사이라 좋은 건 바로 이럴 때였다. 필요할 때마다 경계 없이 서로를 챙길 수 있다는 것. 그 안온한 감정이 그도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본능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죽어라. 좀.”
여전히 죽지 않고 펄떡대는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등에 업혀 내내 제 뒷덜미에 쌔근쌔근, 달큼한 숨을 불어 넣던 누구 때문에 바지가 터져 나갈 듯 팽팽해져 있었다.
이 꼴로 집까지 갈 순 없으니 좀 죽이고 나가야겠다 싶어 화장실로 향할 때였다. 언제 일어났는지, 뒤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온 희진이 저를 툭 밀어 앞질렀다.
“아, 토할 것 같아….”
쌩, 사라지는 뒤꼭지가 어이없어 한숨이 절로 났다. 결국, 하릴없이 소파에 앉아 열기를 식히는 수밖엔.
이윽고 안에선 물소리가 들려왔다. 토할 것 같다더니, 씻는 건가 싶었다.
한번 일어선 좋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였다. 아무래도 온 집 안에 밴 유희진 냄새, 이 달짝지근한 냄새 탓인가 싶었다. 평소 익숙했던 체향마저 오늘따라 유달리 자극적이었다. 하필, 빌어먹게도.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판단이 섰고,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이곳에서 도망이라도 쳐야겠단 심정으로.
“야, 유희진. 씻냐? 나 이제 간다?”
집까지 데려다줬으니 이걸로 친구의 본분은 다한 거라며 통보를 했다. 그러나 욕실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물소리는 여전한데 움직이는 기척은 전혀 들리질 않았다.
“야. 너 뭐 해?”
아무래도 이상해 문 앞에 다가가 다시 불렀다.
“야.”
여전히 조용했다.
“계속 대답 안 하면 나 문 연다?”
문득, 일 때문에 희진이 요즘 계속 무리를 했던 게 떠올랐다. 혹시나 안에서 쓰러져 기절이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따위의 불안이 밀어닥쳤다. 맥락도 없이. 아니, 원래 사고는 맥락이 없는 것 아닌가.
“유희진.”
그가 문을 열어젖힌 이유는 오롯이 그것뿐이었다. 불러도 답 없는 희진이 걱정스러워서. 순전히 술 취한 친구가 염려스러운 마음 때문에.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욕실 안 상황은 그런 불안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쏴아.
벽에 걸린 샤워기에선 차가운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희진은 욕조에 들어앉아 쪼그리고 잠이 들어버린 채였고.
“허.”
기가 막혔다. 기껏 침대에 뉘어 놨더니 이게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찬물을 맞으면서도 잠을 잘 수 있다니 방송국 제보감이었다.
“그러게 술을 좀 작작 처드세요. 좀.”
곧바로 샤워기를 껐다. 그러곤 물이 넘치기 일보 직전의 욕조에서 희진을 다시 번쩍 안아 들었다.
차가운 몸이 품에 쏙 맞춰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 입고 있던 살구색 블라우스 아래로 비친 브래지어의 레이스 문양이 선명했다. 아담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풍만한 가슴 굴곡은 또 어떠한가. 시야가 난잡해지고, 맞닿은 살갗이 뜨거워졌다.
“으음….”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진은 급기야 승조의 셔츠 자락을 꾹 쥔 채 알 수 없는 말을 웅얼이며 그의 품에 더 파고들고 있었다.
이, 둔한 데다 겁대가리까지 없는 놈.
“가지가지 한다, 정말.”
위험 수위였다. 승조는 다급히 수건을 꺼내 안은 몸을 둘둘 감았다. 그러곤 그대로 침대에 내려놨다.
미간을 푹 찌푸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얼마나 맹탕이면 이렇게까지 무방비할 수 있나. 아무래도 제 친구의 생물학적 성별이 ‘남성’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자유로움이었다.
물론, 그녀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건 피차일반이긴 했다.
맹세컨대, 이렇게 불의의 신체 접촉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평소에 희진을 여자로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웃겼다. 유희진이 여자라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단어가 아닌가. 여자? 확실히 그건 정말 아니었다. 없는 혈육이 있다면 바로 이런 기분인가 싶을 만큼, 전혀,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아….”
한 적이 없는데.
“씹.”
지금 들어 버렸다. 그런 생각이.
발그레, 술기운에 달아오른 두 뺨과 단 숨이 쌕쌕 새어 나오는 말캉한 저 입술을 하얗고 깨끗한 목덜미와 젖은 블라우스 아래로 언뜻언뜻 비치는 탱글탱글한 살결을, 당장에라도 입에 넣고 빨고 싶었다. 맛보고, 먹고 싶었다. 안으면 제 품에 꼭 맞는 사이즈로 차지게 감겨들 이 여자를,
안고 싶어진 거였다.
“좆됐네.”
일순 말도 못 하게 들끓는 음심에 페니스가 터질 듯 욱신대며, 아팠다. 낯선 당황감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대로 더 있다간 정말 일을 치고 말 것 같았다.
마지막 이성이 끊기기 직전에야 승조는 간신히 그녀의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