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Friend's Love Log RAW novel - Chapter 4
│04. 짜증난다고
14년 전.
벚꽃 만발한 4월. 봄이었다.
유달리 기승을 부렸던 꽃샘추위도 끝이 나고,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진 어느 날.
전혀 가볍지 못한 몸으로 눈을 뜬 희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동아리방 바닥을 기었다.
“아아….”
타는 목마름에 생명의 위기를 느낀 그녀는 겨우 물병을 집어 들어 헐레벌떡 물을 넘겼다.
“하…!”
이제 살 것 같네.
어젯밤, 끔찍했던 술판의 추억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명분은 신입생 환영이라는데, 환영받는 기분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던 자리였다.
자유를 만끽하러 들어온 동아리에서 왜 도리어 구속과 억압을 느껴야만 하는 건지. 그냥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수업이나 들을걸. 동아리엔 괜히 가입을 했나.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스치는 수만 가지 번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제 가방을 찾으려 시선을 휙 돌린 순간이었다.
“엄마야!”
희진은 들고 있던 물병을 놓치고 저도 모르게 꺄악,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웬 시커먼 남자가 소파에 기대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누구세요?”
저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데, 남자의 얼굴은 영 태연하기만 했다. 동물원 동물이라도 관찰하듯, 빤히 보는 얼굴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입술이 말랐다. 누추한 동아리방의 풍경과 퍽도 안 어울리는 분위기의 남자였다.
“누구….”
“넌 누군데.”
그가 되물었다. 아. 혹시 아직 얼굴을 모르는 동아리 선배이던가. 아차 싶어 그녀는 마른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 저는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인데요.”
“집이 없어?”
“…네?”
“왜 여기서 잠을 자?”
분명 잘생긴 얼굴인데 재수 없고, 듣기 좋은 목소린데 차가웠다. 초면에 불쾌한 질문을 참 태연하게도 퍼붓는 남자였다. 이상한 인간.
“그게… 제가 어제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 기억이….”
“뭘 얼마나 마셨길래 꼴이.”
남자는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제야 그가 그렇게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건가 싶어, 희진은 황급히 제 얼굴을 더듬었다. 급한 대로 제 옆의 유리창을 흘낏 보니 비치는 몰골이 처참했다.
“무슨 과?”
남자는 다리를 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눈이 마주쳤다. 모델인가, 연예인인가. 뭐 이렇게 현실감 없이 생겼나 싶어,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를 바라봤다.
“무슨 과.”
대답을 재촉하듯, 주름 하나 없는 미간에 작은 실금이 갔다.
“아…. 저는 언론홍보학과 00학번 유희진, 이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근데, 제가 선배님은 처음 뵙는 것 같아서….”
“옷 다 젖었는데. 괜찮아?”
희진은 제 옷을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들고 있던 물을 대차게 부어, 스커트에 꼭 오줌이라도 싼 듯한 꼴이다.
정말 가지가지한다 싶어 입술을 물어뜯는데, 불현듯 커다란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졌다.
“이거라도 두르고 가든지. 뛰고 와서 냄새는 좀 날 건데.”
고개를 들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제 앞에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곤 비스듬히 서서는, 벗어 뒀던 제 트레이닝 재킷을 내미는 거였다.
“싫어?”
좀 당황해 멍하니 올려다만 보고 있으니 그가 휙, 손을 거둬 간다.
“싫음 말든지.”
“아니, 아니, 아뇨!”
냉큼 그의 손에 있는 재킷을 빼앗아 허리에 둘렀다. 옷에서 냄새가 나긴 났다. 묵직한 스킨 향과 특유의 체향이 뒤섞여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뭐 그런 냄새였다. 무슨 비싼 향수라도 쓰는 건가 싶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언제부터 와 계셨던 거냐 물으려던 찰나였다. 벌컥 동방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분노에 찬 구두 굽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난데없는 불길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들어온 이는 누군지 영 모를 얼굴의 낯선 여자였다. 밤새 폭풍 눈물이라도 흘린 건지, 화장이 실컷 얼룩진 여자는 한동안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말도 없이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만 볼 뿐이었다.
“왜 내 연락 피해?”
여자의 말에 남자는 피곤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 할 일 없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느긋한 목소리로 고개를 젓는 그와 달리 여자는 터질 것처럼 상기된 얼굴로 희진에게 바짝 다가섰다. 여자가 누군지, 영문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얘… 뭐야?”
여자는 희진을 죽일 듯 쏘아보며 물었다. 사람을 보고 ‘뭐’냐고 묻는 그녀의 지시대명사 사용이 굉장히 불쾌했으나 일단 표정 관리를 했다. 처음 본 선배에게 찍혀 괜히 괴로운 대학 생활을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아, 안녕하세요. 전….”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쫘악!
“야!”
불현듯, 희진의 얼굴이 돌아가고 눈앞에 허연 불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렇잖아도 댕그란 눈동자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영문도 모르고 후려 맞은 뺨이 얼얼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 미친!”
방심하고 있던 남자가 다급하게 여자의 손목을 낚아채 막았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이후였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린 건지 여자가 다시 희진에게로 손을 뻗자, 참다못한 그가 그녀를 밀어 버리고 희진의 어깨를 감쌌다.
“얘 뭐야? 뭔데 이 시간에 둘이 여기 있는 건데? 네 옷은 왜 쟤가 입고 있어? 뭐냐구, 얘!”
여자의 절규에 희진은 지금 자신이 무슨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어이가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 둘이서 저 하나를 놓고 지금 뭔 드라마들을 찍고 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후….”
머리를 쓸어 올리며 미간을 푹 구기는 남자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나가, 너.”
“내가 왜 나가? 나가려면 이년이….”
“안 나가? 경찰 불러?”
“차승조!”
이름이 차승조인 모양이었다. 기분 탓인지, 그 이름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져 제 옆의 그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너 스토커야? 씨발, 하루 놀고 끝난 걸 가지고 왜 여기까지 쫓아와서 질척거리는데?”
상황만 놓고 보면 둘이 세기의 사랑이라도 한 연인 사이 같은데, 말을 들어보니 여자의 일방적 집착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영 재수가 없는 게 얼굴값 할 것 같더라니.
“대답이나 하라구! 쟤 뭐냐니까!”
“아, 존나 귀찮게 구네 진짜. 그래. 얘 내 애인이다. 됐어?”
희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술이 아직 덜 깼나. 아님 꿈인가. 지금 대체 상황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골이 댕댕 울렸다.
“애… 인?”
여자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떨었다. 그러나 승조의 시선은 오롯이 희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넋이 나가도 완전히 나간 희진의 얼굴도 퍽 정상은 아닌 까닭이었다.
“야. 너 괜찮아?”
“…….”
“야. 유희진. 야. 정신 차려.”
그는 희진의 어깨를 연방 흔들어 댔다.
“지금… 뭐가… 뭔, 아니, 누구… 예요, 저 사람?”
희진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붓다 나가는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씨발, 그새 볼이 다 부었네.”
대답 대신, 기다랗고 따스한 손가락이 희진의 뺨에 와 닿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짙은 눈썹이 들썩였다.
“아니, 아니…. 저기… 왜 저한테….”
어이가 없으니 단어가 꼬이고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그러니까, 왜, 제가 선배님 애인이라고…. 저분이 지금 오해를 한 것 같던데, 왜 저한테….”
“어떡할래. 병원가 볼래? 네 얼굴 지금 존나 엉망인데.”
이 사람이 진짜.
“상태가 영 안 좋….”
“아니, 제가 왜 선배님 애인이냐고요!”
속이 답답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제가 내질러 놓고도 당황한 희진도, 뺨을 만지작대다 흠칫 놀란 그도 서로를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잠시 후 그가 허,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멀쩡하네.”
굽혔던 허리를 세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어쩐지 그는 되레 안도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병원 가 보려면 가 봐. 치료비는 청구하고.”
손목의 시계를 흘긋 확인한 그가 소파 위 제 짐을 챙겨 돌아섰다.
설마. 지금 이러고 도망가려는거?
“저기, 저기요!”
기가 찬 희진이 그를 다급히 불렀다.
“아.”
움직이던 기다란 다리가 그 자리에 멈췄다. 막상 돌아보는 그 잘난 얼굴에 희진은 할 말을 잃고 꿀꺽,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그리고 나 선배 아닌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그녀의 눈이 댕글댕글 부풀었다.
“나도 신입생이거든.”
미친.
“나도 어제 처음 왔어, 여기.”
미친 새끼.
욕지거리가 래퍼처럼 터져 나왔다.
* * *
-지금은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야속한 멘트가 들려왔다. 조마조마하게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이 주륵, 힘없이 미끄러졌다.
“아. 뭐야, 진짜.”
입술을 잘근 깨물고, 액정을 내려다보는 하얀 미간이 짐짓 좁아져 들었다.
희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차승조가 대체 왜 이러는지.
벌써 보름쯤 됐나. 정확히는 회식을 하고 새 대표에게 고백을 받았던 다음 날부터, 싱숭생숭한 마음에 술을 떡이 되게 퍼마셨던 바로 그 다음 날부터였다.
그날부터 차승조가 제 모든 연락을 씹고 있었다. 그 어떤 힌트도 없이.
——- 6월 3일 ——-
「왜 종일 전활 안 받아? 바빠?」
「아무리 바빠도 생존 신고는 좀 하지?」
「야.」
「보면 연락 좀 줘.」
——- 6월 4일 ——-
「혹시 내가 엊그제 무슨 실수 했어?」
「차승조.」
——- 6월 5일 ——-
「취해서 그날 일이 기억이 안 나는데 뭐 때문에 이러는지 말 좀 해 줘.」
——- 6월 7일 ——-
「우리 얘기 좀 하자.」
「너 정말 이럴 거야? 뭔 일인지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 6월 8일 ——-
「야.」
——- 6월 9일 ——-
「차승조.」
——- 6월 10일 ——-
「야!!」
——- 6월 11일 ——-
「너 언제까지 연락 안 할 건데?」
——- 6월 12일 ——-
「다 읽어 놓고 왜 대답을 안 해?」
——- 6월 17일 ——-
「전화 좀 받아. 답을 하든지.」
그간 보냈던 메시지를 주욱 다시 올려 읽어 봤다. 첫 일주일은 거의 매일 하나씩 메시지를 보냈었다. 공휴일엔 연락 안 하는 예의까지 차리면서. 거기에, 받지도 않는 전화는 또 얼마나 많이 걸어 댔던가. 이쯤 되면 꼴 보기도 싫단 뜻이니 무턱대고 집에 쳐들어가기도 민망했다. 유일한 연결 고리인 건영에게 연락해 봐도 영 모르겠단 눈치였고.
분명 제게 뭐가 화가 나 이러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날 밤 일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차승조 하나였으니. 아무리 상황을 곱씹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니, 잘못한게 있어도 뭐가 기억이나 나야 사과를 할 게 아닌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든가. 속이 답답했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액정만 한참 노려보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입에 넣은 음식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도 모를 기분이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14년간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기에 더욱 마음이 졸아드는 거였다.
“입에 잘 안 맞아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희진의 상념을 깼다. 고개를 들자 마주 앉은 동윤이 빙그레 미소 짓는다.
“아까부터 영 먹는 게 시원치가 않아 보이는데.”
“아. 그냥…. 입맛이 별로 없어서요.”
대답을 하면서도, 신경은 계속 핸드폰에 곤두서 있었다. 행여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그가 연락이라도 해 올까 싶어서.
지난 보름 내내 쭉 이 상태였다. 뭘 해도 집중이 안 되고 머릿속엔 오로지 차승조 생각뿐인, 그런 상태.
“하긴 좀 별로긴 하네요. 육질도 너무 질기고.”
계속 깨작거리는 희진을 보며, 동윤은 누가 들을세라 작게 속삭여 말하곤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냥 나가서 다른 거 먹을까요?”
“아뇨, 그럴 것까진….”
“나가요. 희진 씨 좋아하는 파스타 먹는 게 낫겠어요.”
결국 그의 손에 이끌려 레스토랑을 나섰다. 어쩐지 좀 미안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제게 점수 따겠다며 계획한 데이트 코스일 텐데. 심지어 1년 예약이 꽉 잡혀 있다는 유명 레스토랑이 아니던가.
“저 정말 괜찮아요. 배불러서 다른 거 더 안 먹어도 되구요.”
엘리베이터에 올라, 슬쩍 잡힌 손목을 빼내며 말했다.
“내가 아쉬워서요. 사람들한테 듣기론 희진 씨 뭐든 다 잘 먹는 타입이라고 들었는데, 난 아직 그거 한 번도 못 본 것 같아서. 혹시 여전히 내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서 그런 건가?”
한동윤은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 같았다. 무성하던 소문처럼 일에 관해선 퍽 깐깐하고 엄격한 상사였으나, 그게 무례하고 오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원칙주의자였고 솔직했으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정중한 사람.
그게 희진이 지난 2주 동안 한동윤에 대해 느낀 소감이었다. 갑작스러웠던 그의 고백에 생각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한 건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어떤 사람인지,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 가잔 그의 말에도 동의를 했던 거고.
“아뇨. 대표님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제 문제예요. 그냥, 개인적으로 인간관계에 좀 문제가 생겨서 요즘 좀 심란한 상태라서요.”
“가족 문제? 아니면, 친구?”
동윤이 조심스레 덧붙여 물었다.
“친구 놈 하나가 속을 썩이네요. 신경 쓰이게.”
“왜요. 싸웠어요?”
“그런 건 아닌데….”
“아닌데?”
시시콜콜, 이런 얘기까지 하는게 맞나 싶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가 더 말해 보라는 듯 말꼬리를 잡았다. 묻는 그 얼굴이 꽤나 집요해 말을 잇지 않을 수 없어졌다.
“갑자기 연락을 죄 씹어요. 나한테 뭐 화난 거 있느냐고 아무리 물어도 답도 없고. 이 자식이 이렇게 연락 끊은 적은 없었는데….”
“혹시 그 친구예요? 투자자 미팅할 때 한식당에서도 마주쳤었고. 회식했던 날, 희진 씨 데리러 왔었던?”
어떻게 알았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섰다.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동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친한 친군가 보다 싶어서 눈여겨봤어요. 술 마신 친구 대리 기사 해 주겠다고 달려오는 거 보면, 많이 친한 사이 아닌가?”
남들 눈에 친해 보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대책 없이 막 나가는 재벌 3세 도련님과 존재감 하나 없이 평범한 여사친 조합이 어디 흔한 것이던가. 전혀 안 어울리는 인간 둘이 주야장천 붙어 다니니 쓸데없는 오해도 많긴 했다.
“그냥 대학교 동아리 동기예요.”
“무슨 동아리였는데요?”
“아…. 그건 좀…. 말하기 창피한데.”
“뭔데요?”
차에 올라탄 희진이 벨트를 매며 멋쩍은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힙합 댄스 동아리.”
아니나 다를까, 동윤의 입에서 큭,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기죠.”
“아, 미안해요. 비웃은 게 아니라 상상이 좀 안 돼서.”
지금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면 쉽게 상상이 안 되는 게 당연했다.
평범하고 단정한 갈색의 단발머리. 포멀한 디자인의 블라우스와 늘 각 잡힌 슬랙스를 박제한 패션. 착용하는 액세서리 하나조차 너무 튀어 보이진 않을지 따져 가며 고르고, 제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길 매일 아침 기도하는 흔하디흔한 직장인 1인 현재 모습에서 과거 힙합 댄스 동아리의 추억을 연상하기란 좀체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니까.
“그때는 이상하게 그게 그렇게 하고 싶더라고요.”
스무 살. 합법적 반항이 하고 싶었었다. 중고등학교 6년 내내 책상 앞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간 누르고 눌렀던 제 안의 흥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었던 거다.
“거기서 처음 승조를 만났어요.”
존재감 없는 저와 달리 그는 이미 학교 내 유명 인사였다. YOONA 화장품 엄필중 회장의 유일한 핏줄, 차승조.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재벌 3세 도련님이 현실에도 존재한다는 걸 희진은 그때 알았다.
처음엔 그저 재수 없는 놈이라 생각했다. 남들은 죽어라 공부해야 어렵게 들어오는 이 학교엘 억지로 등 떠밀려 다니는 거라 뇌까리는 것도 어이없었고, 껄렁하고 오만한 태도로 밤낮 놀러만 다니는 꼴도 한심했다.
기실, 부모 하나 잘 만난 덕에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을 녀석의 평탄한 인생에 질투가 난 것이기도 했다.
위선 같았다. 그렇게 증오하는 외조부 덕에 남들보다 풍족히 살아왔으면서, 이유 모를 원망과 반항으로 들끓는 모습이 그저 가소로웠다. 어떤 결핍도, 걱정도 없이 살아왔을 주제에. 그저, 철부지 금수저의 배부른 투정 같은 거라 여긴 거였다.
그렇게 그의 상처를 무시했고, 비웃었다.
“뭔가 강력하네요. 춤추다 친해진 사이라.”
농담 같은 동윤의 말에 희진은 픽 웃었다.
“희한하긴 해요. 성격도 안 맞고, 닮은 구석도 전혀 없고. 공통분모가 전혀 없는데도 이렇게 친해진 걸 보면.”
차승조와 울고 웃었던 14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떠올리면 가슴이 훗훗해지는 기억들뿐이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덕분에 나도 희망이 좀 생기네요.”
그런 희진을 가만 지켜보던 동윤이 나지막이 말했다.
“공통분모 거의 없지만, 나도 앞으로 희진 씨랑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부드럽게 웃던 그의 눈빛이 자못 진지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희진은 더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 동윤의 고백이 그저 잠깐의 충동이나 희롱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음을. 그 진심의 무게가 문득 무겁게 느껴졌다.
애매해진 정적을 깨고, 동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어쩐지, 썩 좋지 못했다. 역시나 받지 않고 꺼 버린다. 누굴까. 진심 아닌 궁금증이 일었다.
“데려다줄게요. 집으로 갈 거죠?”
“아, 전 다시 사무실로 가려구요. 할 일이 좀 남아서.”
“진짜 우리 회사 희진 씨가 다 먹여 살리네.”
할 일이 남았단 건 핑계였다. 차승조 때문에 심란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잠재워 보기 위함이었다.
“열심히 해야죠. 오래오래 버티려면.”
희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손끝엔 여전히 잠잠하기만 한 핸드폰을 꼭 쥔 채였다.
* * *
“하, 사실 나 아까부터 흥분해 있었다?”
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여자가 먼저 다가와 안겼다. 하도 옆에 앉아 치근대기에 몇 마디 말대꾸를 해 줬더니 끝까지 저를 따라 나온 거였다.
부러 막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유혹해 오는 여자에게 새삼스레 꼴려서도, 여전히 저를 포기 못 하는 할아버지에게 항의를 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궁금했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그날 밤 맥락도 없이 들이닥쳤던 그 꼴림이 대체 어디서 기인한 건지. 14년간 존재감 없이 봉인돼 있던 그 본능이 대체 갑자기 왜 튀어나와 버린 건지.
술김이라기엔 고작 맥주 몇 캔이 다였으니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고, 남은 유력한 가설은 단 하나뿐이었다. 너무 오래 굶었다는 것.
실은 마지막 섹스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제대로 안 났다. 1년 전이었나, 2년 전이었나.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됐던가. 미쳤네.
그래. 수도승도 아니고 그간 너무 금욕적 생활을 했다. 답지 않게. 그래. 그거다. 그저, 그래서일 것이다.
승조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부여잡은 채, 지금 제 앞의 여자를 상대로 확인을 해 보려는 거였다.
“자긴 어떻게 하는게 좋아? 난 뒤로 하는 거 좋아하는데.”
스커트 속에 손을 넣은 여자가 스스로 속옷을 벗어 내렸다. 아마도 작정하고 입고 왔을 얇은 레이스 천 조각이 툭, 바닥에 구른다.
“하아, 엎드릴까? 차가 넓어서 충분할 것 같은데.”
진한 향수 냄새에 절로 미간이 우그러졌다.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시하는 표정에, 입을 먼저 맞추려던 그녀가 자세를 바꿨다. 그러곤 바로 엎드려 엉덩이를 들고 손가락으로 직접 제 구멍을 벌려 보인다.
그녀 말대로 벌써부터 흥분한 외음부가 벌름벌름, 물을 흘리고 있었다. 남자의 음심을 한껏 유혹해 보려는 듯이. 어서 이곳에 본능적 욕망을 가득 채워 달라는 듯이,
그럼에도,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여자의 음부를 응시하는 승조의 얼굴은 더없이 건조했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사실, 이쯤 시각적 자극이 왔으면 응당 발기를 해야 마땅한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오질 않았다. 여자를 안고 싶은 마음도 만지고픈 생각도 전혀 들질 않았다. 되레 10년 도 닦은 수도승처럼 마음이 평안했다. 도통 꼴리는게 없었던 최근의 상태가 여실히 이어지고 있는 거였다.
유희진의 달큼한 체향만으로도 미친 변태처럼 솟구쳐 오르던 육욕은 다 어디 가고 이런 심란하고도 좆같은 기분만 드는 건지. 꼴림은커녕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들었다. 다 귀찮고 성가셨다.
더 버텨 봐야 소용도 없을 게 뻔했다. 화난 여자한테 뺨이나 후려쳐지지 않으면 다행이고,
“그만하자.”
기어코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기야?”
“나 네 자기 아니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고. 내려.”
승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여자가 그를 돌아보며 눈을 치켜떴다.
“뭐?”
“미안한데 제가 하나도 안 꼴려서요. 그만하고, 가시라고.”
“하. 뭐 이런…!”
혼자 흥분해 헐떡였던 게 민망하고 수치스러웠는지, 그녀는 기막힌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걸쭉하게 내뱉었다.
“후….”
여자가 내리는 걸 확인하고 곧장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깊게 내뱉는 숨에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씨발, 뭐가 이렇게.”
머리가 터질 것 같냐.
필터를 질근 씹어 물며 라이터를 휙 집어 던졌다. 이젠 정말 이 짓도 더는 못 하는 건가 싶었다.
누군가를 구제불능의 한심한 인간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 뭔지 잘 알았다. 더러운 염문설과 난잡한 여자관계. 그가 아는 한 그보다 더 빠르고 효과 좋은 건 없었다. 잠재 능력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가치와 도덕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단번에 증명해 보일 수 있었으므로.
게다가 더 큰 이점은 이게 그리 어렵지도 않단 데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못 안을 여자는 없었다. 매일 밤 먼저 다가오는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를 골라 침대까지 데려가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그에게 있어 섹스는 반항의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었다.
그렇기에, 들끓는 음욕에 몸이 달아 본 일도, 이성보다 앞서는 본능에 안달이 난 적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없었던 거라는 착각’을 했었다. 지난 14년간 한 번도 유희진을 여자로 느껴 본 적 없다고 믿었으니까.
스칠 때마다 벌떡벌떡 좆을 세웠던 걸 별일 아닌 걸로 치부했었다. 그냥, 모든 XX 염색체를 가진 인간에게 반응하는 생리적 현상일 뿐이라 여겼다. 불안을 느끼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외면했었다. 아닐 거라고. 절대.
그런데 이제 와 그 확신에 금이 간 거다. 그러니 이렇게 당황할밖에.
「너 도대체 왜 이러냐고.」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희진의 문자를 노려봤다.
「치사하게 씹지 말고 그냥 말을 해. 이 쪼잔한 자식아.」
텍스트만 봐도 새하얀 미간을 들썩이며 성깔을 부려 댈 유희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새까만 눈을 부라리고, 어흥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씰룩거리고 있을 그 얼굴도 선연했다.
‘으음….’
문제는 그야살스러운 비음과 말캉하던 살결이 왜 동시에 떠오르냐는 거였다. 왜 자꾸 그 낭창한 허리를 끌어당기고, 분홍빛 입술을 한입에 먹어 치우고, 뽀얀 속살에 제 좆을 하염없이 비비게 되는. 왜 그딴 좆같은 상상을 계속하게 되는 거냐고.
“이, 씹, 진짜.”
자조의 쌍욕이 절로 터졌다. 친구 문자 보고 좆 세우는 천하의 개씨발 놈은 저뿐일 거였다.
진단이라도 받아봐야 할 것처럼 무반응이던 아랫도리가 또다시 바지 속을 팽팽하게 채운 채 꺼떡댔다. 피가 쏠렸고, 아팠다. 당장이라도 꺼내 풀어 주지 않으면 터지겠다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욱신댔다.
어느새 본능은 이성을 쉬이 앞질러 갔다. 부지불식간 벨트를 풀고 드로어즈를 내리자, 좁은 공간에 눌려 있던 거대한 살덩이가 툭 불거져 나왔다. 굵직한 귀두 선단이 이미 허연 군침을 줄줄 흘려 댄다.
“하. 지랄났네.”
승조는 잘 뻗은 눈썹을 한껏 우그러뜨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벌써 이게 며칠째던가. 제대로 보지도 못한 유희진 알몸을 상상하며 좇을 쥐고 흔들어 재끼는 게. 잠이라는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이불에 허연 좆물을 싸질러 갈겼 던게.
심지어 그녀가 놔두고 간 진주 귀걸이를 보면서도 치미는 발정을 이기지 못했었다. 그 자그마한 귓불에 매달렸던 동그란 진주알이 퍽 외설적으로 느껴져서.
이게 과연 정상적 상황인가. 분명히 미친 게 아닌가.
정말이지 사춘기 청소년 시절에도 안 하던 짓거리였다. 천하의 차승조가 육욕에 목말라 혼자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걸 누군가 본다면 평생 비솟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알면서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날의 벼락같았던 음란한 자극과 야릇했던 공기를 떠올리면, 음심이 수치도 모르고 들끓었다.
이건 정말,
좆같다.
“후….”
본격적으로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 페니스를 길게 쓸었다. 구체적으로 희진의 다리를 벌리고, 그녀를 끌어안는 상상을 했다. 좁고 은밀한 구멍에 제 좆을 밀어 넣은 채 묵직하게 아래를 쳐올리는, 그런 개쓰레기 같은 생각을.
지이잉, 징.
흥분감이 고조됐을 무렵, 별안간 허벅지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에 뜬 ‘유희진’이란 세 글자를 확인한 순간 사정감이 훅 치밀어 올랐다. 이젠 이 둥글둥글한 이름만 봐도 쌀 것 같다.
하여튼 눈치도 없지.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친구라는 게 지금 저를 놓고 무슨 더러운 상상을 하고, 무슨 좆같은 짓거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탁탁탁. 해방을 갈구하는 손놀림이 더 거칠어졌다. 차갑던 얼굴엔 어느새 음란한 열이 올랐고, 고조에 오른 페니스는 터질 듯 성을 냈다. 쥐고 흔드는 손목에도 굵다란 핏발이 섰다.
“하.”
일순간 정액이 솟구쳤다. 티슈를 뽑아들 새도 없이, 기둥 끝에서 울컥대며 쏟아져 흐르기 시작한 거였다. 비릿한 냄새의 체액으로 바지고 손이고 죄 엉망이 됐다.
일순 피곤이 밀려들었다. 이런 깔끔하지 못하고 너저분한 상황은 딱 질색이었다. 집에 여자 머리카락 한 올만 떨어져 있어도 경기를 하는 결벽증이 아니던가. 섹스를 안 하면 안 했지, 주위 난잡해지는 꼴은 곧 죽어도 못 보는 성격.
근데, 그런 내가 이 나이에 혼자 차에서 딸치다가 바지나 더럽혔다고? 씨발, 기막히고 어이가 없어 실소가 다 났다.
툭, 헤드레스트에 뒤통수를 처박듯 기대곤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고, 해갈하지 못한 입은 바짝 말라 썼다. 더럽고 추잡하고, 처참했다. 형언 못 할 허무함과 자괴감, 그리고 혼란스러움이 전신을 휘감았다.
빌어먹을 놈의 핸드폰이 또다시 진동했다. 깜빡이는 액정을 흘긋 내려 봤다.
「대체 무슨 생각인데.」
몰라. 모르겠다. 무슨 생각인 건지.
이후로도 한참을 더 그렇게 앉아 있었다.
* * *
땡, 청량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동시에 익숙한 인영이 저를 휙 돌아봐 왔다.
희진이었다. 대략 보름 만에야 보는 얼굴. 심장에 해로운 얼굴이 해사하게 웃으며 다가서고 있었다.
“일찍일찍 좀 다녀라, 사내자식이. 지금 시간이 몇시냐?”
무릎을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 바닥에 내려 뒀던 제 몸집만 한 비닐봉지를 든 채 태연을 떨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그러나 다 읽혔다. 그녀가 얼마나 당황스러워하고 있는지, 불안해하고 있는지가. 집에 들어가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굳이 문 앞에 앉아 청승을 떨고 있었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불편하고 조심스럽단 뜻이었다.
이미 어색하게 끌어 올리는 입꼬리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볶음밥 해 줄게. 같이 밥 좀 먹어 주라. 나 배고파.”
그러곤 식재료로 가득 찬 봉지를 흔들어 보이는 거였다. 승조는 얼어붙어 있던 다리를 겨우 움직여 그녀를 무시하듯 스쳐 지났다.
“가라.”
아닌 척했지만 식은땀이 났다. 조금 전까지 제 상상 속에서 안고 벗기고 만져댔던 그녀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리라.
“배고픈 어린양을 이렇게 문전박대 하기야?”
“가.”
“야.”
“…….”
“차승조.”
부러 표정을 굳히고 도어록 버튼을 누르려는데, 떨리는 목소리가 뒤를 때렸다. 맞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왜 이래, 진짜?”
돌아보자, 새카만 눈동자가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네가 애야? 뭔지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내가 뭐 실수한 게 있으면 말을 해 달라고. 이렇게 무작정 피하고 씹고 도망간다고 문제가 해결돼?”
말을 해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할 수 없는 말을 입술을 짓씹어 삼켰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네 맘이 풀리겠는지, 얘기를 좀 해. 평소엔 나 타박하고 지적질하는 거 그렇게 잘하면서 왜 갑자기 입 싹 닫고 사람 피를 말리는데?”
“가. 피곤해.”
“지금껏 어디서 처놀다 왔을 거면서 피곤은.”
미쳤나. 미친 모양이었다. 이젠 원망스레 흘기는 새카만 눈동자마저도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나야말로 지금 일주일 내내 야근하고 피곤해 죽겠는데도 온 거거든. 얼른 말해, 뭔지. 나 속 터뜨려 죽이려는 거 아니면 말씀을 하시라고.”
나왔다. 유희진 똥고집.
누군가 희진을 유순하고 둥글둥글, 모나지 않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성격으로만 본다면 그건 그녀를 존나 오해하는 거였다. 저 싫은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하는 이 똥고집을 두고 뭐? 둥글둥글?
“대체 왜 이러는데?”
그걸 죽어도 못 이길 걸 알기에 짜증이 치솟았다. 제멋대로 팔을 잡는 그 작은 손가락이 얼마나 간질간질한지. 지금 사람 피 말리는 게 누군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났….”
“씹, 짜증나는 데 이유가….”
그러나 결코 그녀에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낯설고 혼란스러웠던 지난 며칠간의 심리가, 정리는커녕 점점 더 뒤죽박죽 엉켜 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욕지거리에 입술을 짓씹었다. 순간 겁먹은 눈망울이 둥글게 부푼다.
“…어딨어. 그냥 너한테 질려서 그런다 됐냐?”
고조됐던 볼륨은 훅 줄였으나 이어진 말은 여전히 적절치 못했다.
“하….”
하얗고 고운 미간이 짐짓 좁아져 드는가 싶더니, 치미는 화를 겨우 억누르듯 떨리는 눈꺼풀을 질근, 깊게 감았다 떴다.
“그래. 차승조가 언제, 무슨 이유가 있어서 제멋대로였냐. 그냥 그때그때 꼴리는 대로, 뭐든 다 네 마음대로였지.”
말이 빨라졌다.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늘 웃던 입꼬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화가 났단 뜻이었다.
나름대로 상처를 주겠다고 입에 칼 물길 작정한 것 같은데, 있다면 거울이라도 보여 주고 싶었다. 정작 제가 잔뜩 상처받은 얼굴인 건 모르고.
“나한테 질려서 그런다는데, 더 할 말도 없네. 네 맘대로 해. 내가 너 같은 놈한테 뭘 기대하고 지금껏…. 하, 됐다. 그만하자. 다 관둬.”
희진은 뒷말을 삼키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렇게 그 쓸쓸한 곳에 혼자 남았다. 깜빡. 복도의 센서 등이 꺼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괴괴한 공기에 덜컥 숨이 막혔다.
유희진을 이대로 보내도 되는가, 생각하니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당장에 마주하는 게 곤욕스럽다 해서 평생 그녀를 안 보고 살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지금 제가 무슨 못난 짓을 한 건지 정신이 번뜩 든 거였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숫자가 지하 주차장 층에 멈추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열림 버튼만 연방 눌러 댔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발이 멈칫, 제자리에 섰다.
어이없게도, 작은 머리통이 열린 문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바닥엔 봉지에서 떨어진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뒹굴었다. 칠칠치 못하게 그새 또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말없이 다가가 희진의 손가락에 걸린 봉지를 빼앗아 들었다.
“월급은 쥐꼬리만한 주제에.”
사납게 쏘아보는 눈초리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못 본 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구르는 물건을 주워 담았을 뿐.
“하여간 손은 더럽게 커. 너 이렇게 재료 사와서 남기고 가면 다음 날 그대로 쓰레기 되는 거 알아, 몰라?”
그게 더 얄미웠는지 하얀 손이 다시 봉지를 탁, 채 갔다. 고집스레 앙다문 입술과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는 얼굴이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대변했다. 갈 곳을 잃은 손이 다시 봉지를 빼앗으려는데 꾹, 움켜쥐는 희진의 손이 매서웠다. 어디 건드리기만 해 보라는 경고 같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다시 손을 뻗는 그 찰나였다.
“아….”
순식간이었다. 희진이 바닥에 뒹굴던 소주병을 집어 올리는 순간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 버렸다. 봉지에서 떨어진 병에 이미 금이 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리 조각이 튄 바닥에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야!”
얼른 손을 채어 살폈다. 하얗고 여린 살점이 제법 깊게 찢겨 벌어져 있었다.
“넌 도대체가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냐? 보지도 않고 그냥 막 주워 담으면 어떡해?”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에 절로 소리가 높아졌다. 고운 손에 흉이라도 질 걸 생각하니 속이 상해서였다. 희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일어나. 병원 가자.”
다친 손을 잡고 그대로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그녀가 별안간 손을 뿌리치고, 다른 손으로 다친 부위를 꼭 쥐어 잡았다. 그러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발걸음을 따라 뚝뚝, 바닥에 떨어지는 시뻘건 핏자국이 선명했다.
“야.”
“…….”
“유희진.”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그녀를 기어코 쫓아가 어깨를 돌려세웠다.
“알았어, 나한테 화난 거 알겠는데, 지금 너 병원, 부터….”
물기가 차올라 그렁한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 속사포처럼 퍼부으려던 말들이 단숨에 삼켜졌다. 눈물을 참느라 꾹 깨문 입술과 발개진 눈자위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짜증나.”
금방이라도 엉엉 소리 내어 울 것 같은 얼굴과 덜덜 떨리는 목소리. 가슴이 저릿대고 뻐근했다. 예고도 없는 벼락을 맞은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 그제야 절감이 됐다.
“나도 너, 짜증난다고, 차승조.”
승조는 눈물이 후드득 쏟아지는 희진의 얼굴을 그저 망연히 바라봤다.
* * *
“네. 손등에 세 바늘 정도요. 다른 다친 덴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익숙하고 그리웠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설핏 벌어진 레몬색 커튼 새로 차승조의 등짝이 보였다. 지나치게 넓고 단단한 어깨였다. 옷을 죄 맞춰 입어야 할 만큼 긴 팔다리는 또 어떤가. 하여간, 이런 순간에도 재수 없게 잘나기만 했지.
얄미운 뒷모습을 힘껏 노려보는데, 어느새 통화를 마친 그가 성큼 다가왔다.
“깼네. 다 울었어?”
뻔뻔한 놈. 누구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말로 해. 눈으로 욕하지 말고.”
스스로도 몰랐다. 잘 안다고 믿었던 이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돼 버린 순간의 당황스러움. 깊이 믿고 의지했던 상대에 대한 배신감. 무엇보다도 이대로 차승조와 끝이 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모르는 새, 제 안에 그 수많은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었나 보다.
스위치를 누른 순간, 그런 일련의 감정들이 봇물처럼 터진 거였다. 병원에 와서도 몇 시간을 더 울다 지쳐 잠이 들었을 만큼.
“나쁜 새끼.”
“그래.”
“개새끼.”
“듣기 좋네.”
능청을 떨며 피식대는 그의 낯짝에 확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지금 웃음이 나냐고 쏘아붙이려는데, 커다란 손이 불쑥 이불을 걷어 냈다.
“어머님한텐 내가 전화했어. 혼자 서울살이하는 딸내미 다친 거 나중에라도 아시면 속상해하실 것 같아서.”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붕대 감은 손등을 요리조리 돌려 보는 눈빛은 분명 진심이었다.
“안아프냐? 욱신거리진 않고?”
이렇게 걱정할 거면서, 이렇게 다정하게 굴 거면서 대체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말은 사납게 했어도, 이유 없이 타인에게 상처 줄 성격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말로, 제게 말 못 할 무슨 다른 고민이라도 생긴 걸까.
얄밉도록 잘빠진 얼굴을 가만 들여다봤다. 추궁하듯이. 시선을 느낀 그가 흘긋, 눈을 맞춰 왔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서둘러 시선을 피하는 꼴이 꼭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당황스러워 보였다.
지이잉.
마침 핸드폰이 울었다. 그가 이때다 싶은 표정으로 벗어 둔 희진의 재킷에 얼른 손을 뻗었다.
“‘한동윤 대표님’, 이시네.”
무언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내미는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전화를 받았다. 찢긴 손등이 욱신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