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Friend's Love Log RAW novel - Chapter 5
│05. 폭풍의 계절
희진은 말없이 가만, 제 손등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손등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언제, 다친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깨끗이.
이후의 일상은 꽤 평온하기만 했다.
위태로웠던 회사 경영 상태도 꽤 회복이 됐고, 덕분에 끊임없이 밀려들었던 일들도 줄어 숨 돌릴 틈이 생겼다. 꼭 한 번씩 사고를 치던 고모부도 잠잠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어설픈 연애 사업도 모두 다 순조로웠다.
안녕해도 너무 안녕한 날들이 지나고 있었다. 외려 불안할 만큼.
물론 그 불안의 근원은 차승조였다.
손등을 다친 후로 그와의 이유 모를 신경전은 유야무야 덮여 버렸다. 여전히 그때 그가 왜 그랬는지는 몰랐으나, 구태여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사소한 일 하나까지 시시콜콜 떠들어 대는 차승조가 그러는 덴 분명, 말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어쩐지 물어선 안 될 질문 같아서 그랬다. 두려웠다. 그래서 외조부와의 갈등에 머리가 복잡해 괜히 심통이 났었다는 그의 어쭙잖은 변명을 믿어 주는 척 동조를 했다.
관계가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적어도 겉에서 보기에는.
그러나 묘하게 달라진 그의 눈빛. 제게 벽을 치고 선을 그으려는 어설픈 행동들. 처음으로 그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 그녀에게만큼은 너무나 선명하기 짝이 없는 관계의 변화들이 불안감을 더 증폭시켜 갔다.
희진은 여전히,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불안에 잠식되는 기분이었다.
바야흐로 가을이었다. 반팔을 입어야 할지, 긴팔을 입어야 할지. 에어컨을 켜야 할지, 선풍기를 청소해야 할지 따위가 고민되는.
애매하고 어정쩡한 계절.
“히야. 진짜? 진짜야, 유 팀장? 아니, 대체 언제부터?”
저 멀리, 뒤늦게 사내 빅뉴스를 접한 박 팀장이 허겁지겁 달려와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이 분위기가 쉽게 끝나지는 않을 듯싶었다.
“박 팀장님도, 뭘 그런 걸 물어요. 젊은 남녀 눈 맞는 거야 한순간이지. 안 그래요?”
천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로 한 지 어느새 석 달.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마음이 커져 간다며 진심으로 고백해 오던 동윤의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던 게 벌써 이틀 전 일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늦은 시각, 회사 앞 공원에서 그와 손을 잡고 걷다 염 대리와 정면으로 마주쳐 버린 게 화근이었다. 어떻게 들켜도 사귀기로 하자마자 바로 들켜 버리는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이라 했던가.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어차피 출근하면 다 퍼져 있을 소문, 차라리 연애한다 밝히는 편이 오해 없이 깔끔하겠단 판단이 들었다. 혹 나중에 이별을 하게 되더라도, 엉큼한 바보보단 쿨한 쌍년 쪽이 나았다.
동윤도 제 의견을 외려 반가워했다. 숨기고 감추는 걸 영 못 한다던 그다운 반응이었다.
“난 첨부터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아닌 척해도 대표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더라니.”
“진짜 좋으시겠어요, 팀장님.”
좋을 일인건가.
“축하해. 이러다 또 금방 청첩장 가져오는 거 아니야?”
축하받을 일이던가.
과도하게 쏟아지는 관심에 희진은 열없는 웃음만 지었다.
어찌 됐든, 예상 못했던 반응도 아니기에 그래도 적당히 즐겨 볼 생각이었다. 아주 오랜만의 연애였으니까.
서른 해 넘게 버티고 살다 보니, 이 정도의 좋은 사람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자연스레 깨달았다.
매사 다정하고 자상한 동윤이 싫지 않았다. 확신이 없어 계속 애매하게 구는 제게 한결같이 따뜻하게 대해 주는 것도 믿음직스러웠다. 여러모로 좋은 사람이란 판단이 섰다.
“나 희진 씨한테 많이 진심이에요. 지금 내가 가진 거 다 걸 수 있을 만큼.”
어른스러운 사람. 아버지란 존재의 기억 없이 자랐던 유년 시절의 결핍을 채워 줄 이해심 많고 사려 깊은 남자.
어쩌면 기댈 곳,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가슴 설레는 사랑은 아니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랑의 종류가 꼭 한 가지 모습은 아닐 테니.
“퇴근 시간 한참 지났는데, 왜 아직들 이러고 있어요?”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동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장난기 어린 직원들의 야유와 환호성 소리가 뒤엉켜 시끄러웠다. 동윤과 희진을 번갈아 보며 부러워 죽겠단 듯한 눈빛은 덤이었다. 그러나 정작 제 마음은 부담과 불편, 그 사이 어디쯤을 부유하고 있는 듯했다.
“아 뭐야. 우리 대표님, 애인 보고 싶어서 오셨구나?”
자고로 직장에서 공개 연애는 안 하는 거랬는데. 역시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을까. 짧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최대한 눈에 안 띄고 싶은 사람한테 이런 주목이라니.
희진은 긴 한숨을 삼키곤 어색하게 웃었다.
“유 팀장님, 같이 나가시죠.”
동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쏟아지는 관심을 피하려, 후다닥 가방을 챙겨 그를 따라나섰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후, 하고 내뱉었다.
“일부러 갔어요. 아예 한 번쯤 대놓고 보여 줘야 관심을 좀 끌 것 같아서.”
그다운 배려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많이 힘들었죠, 오늘.”
“뭐… 이러다 말겠죠. 그러라고 그냥 밝힌 거니까요.”
괜찮다고, 애써 미소 지으며 말하는데 불쑥 그의 손이 가까이 왔다. 저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커다란 손이 이마 위 머리칼에 와 닿은 까닭이었다.
“뭐가 묻어서.”
동윤이 작은 실밥을 걷어 낸 제 손을 내보이며 웃었다. 한껏 경직되어 있던 희진의 입가도 어색하게 말려 올랐다. 어째 분위기가 더 어색해진 것만 같았다. 아니, 불편했다.
“저녁 같이 먹을래요? 할 얘기도 있고.”
“아…. 죄송하지만 오늘은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기다렸다는 듯 거절하는 말에 동윤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 희진 씨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 무슨….”
“‘죄송해요.’, ‘미안해요.’”
“…….”
“이제부터 나한테 이런 말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가 희진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표정 어딘가 섭섭함이 묻어났다.
“그거 알아요? 희진 씨 나한테 죄송하단 말 되게 입버릇처럼 하는 거.”
그랬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그런 유의 대화는 꽤 많이 나눴던 것 같긴 했다. 사실 첫 만남부터 죄송한 일투성이였으니, 뭐.
“사실 그 말 들을 때마다 좀 서운했거든요. 남녀 사이가 아니라, 그냥 상사한테 예의 차리는 부하 직원 같아서. 거리감 들기도 하고요.”
어쩐지 속을 들킨 것만 같았다. 아직도 그가 편하고 친밀하게 느껴지진 않는 게 사실이었다. 여전히 그를 마주하는 일이 다른 세계에 사는 낯선 이를 대하는 기분이라, 퍽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아마, 저도 모르는 새에 그런 마음들을 내비쳤었는지도 몰랐다.
“지금도요. 이런 거로 안 미안해해도 돼요. 갑자기 저녁 먹자고 한 건 난데, 선약이 있었을 수도 있죠.”
“…….”
“그러니까 이제 앞으로 미안하단 말 금지.”
또 습관처럼 미안하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할 말이 없어져, 결국 겸연쩍게 웃었을 뿐이었다.
“근데, 무슨 약속이에요? 물어봐도 되나.”
그가 예의를 차려 물어 왔다.
“엄마가 올라오셨거든요.”
“희진 씨 보러?”
“뭐, 주말에 사촌동생 결혼식이 있기도 하고. 겸사겸사요.”
바래다주듯 희진의 차 앞까지 함께 걸어온 동윤이 자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운전 조심해서 가요.”
“네, 대표님도요.”
쭈뼛쭈뼛,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곤 서둘러 액셀을 밟았다.
지하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희진은, 저도 모르게 후, 하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 * *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드르륵, 장지문을 열고 나오는 차승조의 등장에 희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내가 불렀어, 보고 싶어서. 승조 얼굴 못 본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러자 방 안에 앉아 있던 엄마가 대신 답을 해 왔다. 그사이 차승조는 태연하게 가던 화장실을 향해 사라졌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반년 만에 보는 딸 얼굴은 쳐다도 안 보면서, 생판 남의 아들 얼굴이 보고 싶으셨다니. 이게 할 말인가.
“남들이 보면 유희진 엄마 아니고, 차승조 엄만 줄 알 거야. 그치?”
“그러게. 그럼 오죽 좋을까.”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신 우리 이옥란 여사님. 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희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딸이 오건 말건, 옥란과 승조는 이미 고기 한 판을 해치우고 두 번째 판을 시작한 참이었다. 이미 한 상 가득한 테이블 한편엔 보기에도 군침 도는 투플러스 등급 한우가 부위별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와, 이 마블링 보소.”
아직 익지도 않은 고기를 허겁지겁 주워 먹는 딸을 보며, 옥란이 혀끝을 쯧 찼다.
“넌 왜 점점 더 볼품이 없어져? 피죽 한 그릇 못 먹고 다니는 애처럼. 일이 힘들어?”
“남들은 일부러 다이어트도 한다는데 뭐가 문제야.”
“넌 살이 좀 올라야 봐줄 만해지지.”
“어휴. 엄마 딸 지금보다 더 예뻐지면 큰일 나거든요?”
엄마의 잔소리를 너스레로 승화시키며 열심히 고기를 씹었다.
그사이 돌아온 승조가 희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쌈 채소 바구니를 그녀 앞에 가까이 놔 주는 손동작이 퍽 자연스러웠다. 기다렸다는 듯 상추를 집어 드는 희진 또한 태연했다. 무표정하던 옥란의 입가에 일순 미소가 어렸다.
“어머니. 희진이도 왔는데 고기 좀 더 시킬까요?”
“넌 뭘 그런 걸 묻냐, 버릇없이.”
혹여 승조의 마음이 바뀔까, 희진은 얼른 테이블 벨부터 눌렀다.
“이모, 여기 같은 걸로 한 판 더요.”
그러곤 들어온 종업원에게 얼른 추가 주문을 상냥히 마쳤다.
방 안 가득 고기 굽는 냄새가 기분 좋게 피어올랐다. 이 자리에서 불판에 고기를 올리는 건 자연스레 승조의 몫이었다. 희진이 오랜 시간 길들여 교육한 결과였다. 한 불판에서 타는 고기 반, 생고기 반을 생성해 내던 처음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기 굽는 모습만 보면 재벌 집 아들이 아니라 고깃집 아들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승조 넌 어떻게 더 멋있어졌어? 보고만 있어도 아주 그냥 내가 다 든든하네.”
옥란이 고기 굽는 승조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소고기 사준다고 너무 띄워 주시네.”
“당연하지. 딸도 못 사 주는 소고긴데, 그럼.”
변함없는 희진과 옥란의 대화에 승조가 픽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투닥투닥,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모녀일지 몰라도 이게 두 사람의 진한 애정 표현 방식이라는 걸 잘 안다. 이런 게 부모 자식의 정이고, 가족이라는 거구나, 희진과 그녀의 어머니를 보며, 승조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았었다.
“왼손이야, 오른손이야?”
“어?”
“까불다가 손 찢어졌었다며.”
“아, 여기.”
“에휴. 안 그래도 하자 많은데 스크래치까지 나선 이걸 얻다 써.”
“스크래치는 무슨, 이제 흔적도 없어. 봐봐.”
다쳤던 손을 내밀어 보이며 샐쭉이 웃는 희진이나 그런 딸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그녀의 어머니나.
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참 좋았고, 부러웠다. 유희진이.
“자. 너 된장찌개 좋아하잖아.”
옥란이 된장찌개를 승조 앞에 대놓고 가져다 챙겼다.
“쟤 때문에 승조 네가 고생이 많다. 칠칠찮고 정신없는 애 상대하기 힘들지?”
“괜찮습니다. 이제 꽤 면역이 돼서요. 그럭저럭 버틸 만합니다.”
“그래. 많이 먹고 힘내야지.”
승조와 엄마를 번갈아 보며 희진이 어이없단듯 헛숨을 쉬었다. 이건 뭐 완전히 주객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싶다.
“솔직히 말해 봐. 엄마 나 아니고 얘 보러 온 거지?”
“승조 너는 요즘 만나는 여자 없어?”
어쩐지, 희진은 딸의 말을 무시하며 오로지 차승조에게로 향한 엄마의 관심이 고파지는 기분이었다.
“얘가 만나는 여자가 왜 없겠어, 아주 하루가 멀다 하고 갈아 치우는 여자가 한 트럭이지.”
“나이 서른 넘도록 연애도 한 번 못 하고 궁상떠는 것보단 낫다, 딸아.”
“한 번도 못 하긴? 누가? 내가?”
엄마의 도발에 흥분한 희진이 손부채질까지 하며 기막혀했다. 방금도 불필요하게 공개된 연애로 불편함을 넘어 불쾌한 관심을 한 몸에 받느라 기가 쪽쪽 빨리다 왔구먼?
“아. 그래. 한 번은 했었지. 기억난다, 그놈.”
또 고릿적 최성훈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괜한 억울함이 들끓었다.
“엄마. 엄마 딸 목하 열애 중이거든?”
얼결에 튀어나와버린 연애 고백에도 두 사람 모두 별 반응이 없었다.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하긴. 안 그래도 차승조에게 동윤과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했단 걸 말하려고는 했었는데. 언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좀 애매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싶어 희진은 말을 계속 이었다.
“농담 아니고, 나 진짜 남자 친구 생겼어.”
젓가락을 내려놓고 제법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연애한다고.”
그제야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정말이야, 너?”
“이 여사님이, 속고만 사셨나.”
“어떤 놈인데?”
딸의 표정을 살핀 옥란이 추궁하듯 물었다.
“회사 사람.”
“회사 사람 누구?”
“누구라고 말하면, 엄마가 알아?”
더 말하기 쑥스러워 대답을 피하려는데, 옥란이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캐묻기 시작했다.
“몰라도 직책이 있을 거 아냐. 같은 팀 사람인지 아닌지, 나이는 몇 살인지, 성격은 어떤지….”
“우리 대표님.”
“…그, 얼마 전에 새로 왔다던?”
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옥란의 눈이 터질 듯 부풀었다. 아마 상상도 못 했을 딸의 답에, 그녀는 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나보다 세 살 많고, 좋은 사람이야. 어른스럽고.”
희진은 저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려 차승조의 표정을 살폈다. 예감하고 있었던 건지, 그는 별 표정 없이 제 앞의 물컵을 채울 뿐이었다.
“암튼, 그러니까 이제 잔소리 그만하셔. 응?”
기분 탓인지, 분위기가 썩 숙연해졌다. 어쩐 일인지 옥란도 더는 딸의 연애사에 대해 묻지 않았다.
화제는 어느새 집안의 골칫덩이인 고모부 얘기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한참 잠잠한 것 같더니만 몰래 또 일을 벌이는 것 같다고. 조용해서 더 불안하다는 엄마의 얘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 굳은 표정의 차승조에게 신경이 쓰여서였다.
옥란은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웠다. 둘만 남은 방안엔 고기 굽는 소리만 희미했다.
“결국 사귀기로 한 거냐?”
낮은 목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석 달이나 마음 졸이게 했으면 됐다 싶어서.”
“그 석 달간 어떤 놈인지 제대로 파악은 했고?”
“그럼, 당연하지.”
부러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을 했다. 이번만큼은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연애를 성공해야만 부질없는 미련을 마저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도 더 괜찮은 사람이더라. 오히려 나한테 과분하지.”
“좋아?”
“뭐, 아직 그냥 얼떨떨한데….”
“아니.”
“…….”
“그놈 좋아하냐고.”
멍하게 움직이던 젓가락질이 허공에서 멈췄다. 차승조에게 이런 질문을 듣는 게 왜 이렇게까지 당황스러운 기분인 건지. 정작 묻는 그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뭐 꼭….”
정면으로 저를 응시해 오는 건조한 눈동자에 어쩐지 말을 더듬댔다. 어쩐지 화가 난 것만 같아서였다. 그날처럼.
“좋아해야 연애하나. 그냥 만나다 보면 정드는 거고, 정들다 보면 좋아지고 그렇게….”
“수련하냐? 정 쌓일 때까지 기다리게.”
“첫눈에 꽂히는 경우가 몇이나 있다고. 너는 뭐 안 그래?”
“어. 그래서 난 안 하잖아, 연애.”
그가 단언했고, 할 말을 잃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가 진지하게 여자 만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따져 보면 남자 만나는 유희진보다 연애하는 차승조가 더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난 첫눈에 꽂혀야 꼴려.”
쓴웃음이 났다. 뭐든 쉽게 싫증 내고 따분해하는, 너무나 차승조다운 대답이라서.
“그럼 관심 끄시죠. 모쏠 주제에 뭘 안다고 훈수를 두시나?”
멋쩍어 괜스레 내뱉은 잡소리에, 그가 혀를 쯧 차며 제 앞에 고기를 올려 쌓았다.
쓴 입에 음식을 밀어 넣으며 억지로 시선을 피했다. 때마침 엄마가 다시 돌아와 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늘 그랬듯,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끝이 났다. 중간에 동윤의 이야기가 나와 분위기가 좀 애매해졌던 걸 빼면 웃음이 끊이질 않았던 시간이었다.
옥란은 마지막까지 승조와 애틋하게 인사를 나눴다. 희진은 그런 엄마가 어이없으면서도 또 싫지는 않아 그저 웃을 뿐이었다.
“엄만 대체 저놈 어디가 그렇게 좋아?”
헤어지고 나서야 담배를 입에 무는, 백미러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차승조를 힐끗 보며 물었다.
“순하잖아. 거짓말 못하고, 솔직하고.”
동아리 친구라며, 처음 집에 데려갔던 그날부터 옥란은 승조를 퍽 마음에 들어 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언제나 밥부터 해 먹이고, 딸한테 하는 것만큼이나 살뜰히 챙겨가면서.
“네 아빠가 꼭 저랬어. 겉은 날티가 좀 나도 속은 우직하고 진국인 사람이었지.”
차승조가 죽은 아빠와 닮았단 얘긴 꽤 의외였다. 자신이 걸음마를 떼기도 전 죽은 아빠의 존재는 몇 장의 사진 속에서 느껴 본 게 다였으므로, 희진은 실상 어떤 게 아빠를 닮았단 건지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엄마가 아빠를 택했던 이유를.
“게다가 잘생겼잖아.”
그래. 이게 진심이겠지.
희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암튼, 외모 지상주의자들 진짜. 문제야 문제.”
“살아 봐라. 잘생긴게 최고지.”
그래, 뭐. 지나치게 잘생기긴 했지, 그놈이.
희진은 옥란의 말에 동의하듯 핏, 웃었다.
“잘생겼니? 그래서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어?”
“응?”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어 고갤 돌렸다.
“너네 대표 말야.”
“…아.”
“바뀐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은 것 같은데, 갑자기 연애라니.”
식사 자리에선 묻지 않았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희진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네 성격에 상사한테 먼저 들이댔을 리는 없고.”
옥란은 딸을 정확히 알았다.
“그냥,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서두르지 말고. 지금이라도 네 마음이 어떤지부터 잘 생각해 봐.”
뭐가 그렇게 매사 우유부단이냐는 타박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네가 좋아야 오래가는 거야. 상대가 누구든, 어떤 연애든.”
뼈 있는 옥란의 말에, 희진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 것만 같은 까닭이었다.
복잡한 도시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어떻게, 또 김 박사님 예약이라도 잡아?”
선베드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모습의 승조를 보며, 건영이 진지하게 물었다. 벌써 두어 시간째, 그 좋아하는 물에도 들어가질 않고 넋 나간 얼굴로 이렇게 앉아만 있는 꼴이 썩 남세스러워서였다.
아니, 정확히는 이런 상태인 게 한 석 달쯤 됐나. 처음엔 비뇨기과 전문 닥터를 찾더니 급기야 나중엔 정신과 상담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을 때, 건영은 이미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차승조의 병명이 무엇인지.
“어째 상태가 더 악화가 됐냐. 요즘도 좆이 좆대로 제어가 안 돼?”
“나도 연애나 해 볼까.”
저의 있는 농지거리에, 답 대신 뜬금없는 소리가 이어졌다.
“누구랑?”
“누구든.”
“미친놈.”
원인은 이토록 선명한데 줄창 헛다리만 짚는 게 한심할 따름이었다.
“누구든 만나다 보면 정들고, 정들다 보면 좋아질 거라더라.”
“누가?”
“유희진이.”
그럼 그렇지, 싶었다.
“희진이 연애한대?”
“존나 희한해. 어떻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연애를 하냐.”
이건 분명 본격적으로 상황이 악화될 조짐이었다. 대학 시절 희진이 첫 연애를 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또 한동안 차승조가 얼마나 히스테릭하고 예민해질지 등골이 다 서늘했다. 게다가 심지어 지금은 좆 상태가 더 안 좋은 시기가 아니던가.
건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해를 할 수가 없어. 형은 이게 이해가 돼?”
이해가 안 될 건 뭐냐고 한마디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밤의 황태자께서 언제부터 세기의 로맨티시스트가 되신 건지.
“희진이 걔도 그렇지. 네 앞에서 그렇게 자기 연애사를 구구절절 다 늘어놔?”
건영은 답 없는 둘의 쌍방삽질에 혀를 내둘렀다.
“어우 춥다, 야. 니들 너무 쿨해.”
“아…! 몰라, 씨발. 남이야 연애질을 하든 말든.”
말하다 혼자 열이라도 올랐는지, 승조는 벌떡 일어나 수영장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소리가 나고 물살을 가르며 긴 레인을 부드럽게 유영해 나갔다.
한때 최연소 국가대표로도 선발됐던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어린 시절의 차승조는 타고난 근력과 폐활량,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월한 신체 조건으로 이미 열네 살에 전국체전을 휩쓸었던 수영 유망주였다.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무소불위였다. 어디 한군데 정붙일 데 없어 방황했던 승조는 무섭게 수영에 몰두했다. 고요한 물속만이 제 유일한 안식처인 것만 같아서라고 했다. 자유롭게 앞으로 뻗어 물속을 헤엄쳐 나갈 때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비로소 편안해지는 기분이라고.
덕분이었는지, 괴물 소년의 성장세는 무서울만큼 가팔랐다. 열여덟,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기 전까진 분명히 그랬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훈련이었을 뿐인데 어쩐 일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제대로 쉬지도 않고 무리하게 몸을 혹사만 시킨 탓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게 몸이 보내오는 경고인 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코치와 감독의 말도 듣지 않았다. 눈앞엔 오로지 손 뻗으면 닿을 고지만 보였을 따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잠시 브레이크를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의 차승조는 어렸고, 열정 넘쳤고, 무모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 그를 멈춰 세워 줄 사람이 필요했으나 그는 끝끝내 혼자였다.
결국, 제가 출전해야 했던 올림픽 경기를 병실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고 절망스러웠을지.
그래서 건영은 지금의 차승조를 십분 이해하는 거였다. 멀리서 지켜만 봤던 사람에게도 버거운 이 모든 불행을, 어린 차승조 홀로 감내했던 그 시간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때부터 반항이 시작됐다. 세상 유일하게 매달려 의지하던 무언가를 하루아침에 잃어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자신이 부모 없는 고아로 자란 이유가 외조부 엄필중 회장 때문임을 알게 된 후로는 더더욱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그는 분개했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엄 회장이 싫어하는 일, 진절머리 칠 사고들만 골라서 터뜨렸다. 마치 제 할아버지에게 미움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어떻게든 쫓겨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아마도 그 시기, 차승조 인생에 시의적절하게 나타나 준 희진이 아니었더라면.
건영은 짧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기분이었다.
“그냥, 말을 하지 그래?”
물에서 나와 가쁜 숨을 내쉬는 승조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혼란스럽지만, 생기가 도는 눈빛, 노골적 권태로 가득한 얼굴이 아닌, 한껏 격앙되어 열 오른 표정.
물으나 마나, 답은 뻔했다.
“뭘?”
그가 후드득 떨어지는 머리칼의 물기를 무심히 닦아 내며 되묻는다.
“연애하지 말라고.”
“…뭐?”
돌아보는 눈동자에 얼핏 동요가 일고 있었다.
“‘네가 신경 쓰이고 거슬린다. 짜증나고 답답해서 돌겠다. 지난 석 달 내내 밥도 잠도 제대로 못 먹고 못 잘 만큼 괴롭고 힘들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밤낮없이 네 생각만 하다 좆잡고 흔들고 머리 쥐어뜯는 일뿐이다.’”
“허.”
급기야 짙은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들썩거리며 건영을 노려봤다. 삐딱하게 서 있던 그가 몸을 바로 세웠다. 표정이 굳었다. 흡사 제 약점을 들켜 날 세운 맹수의 눈빛 같았다.
“‘그러니 그 새끼랑 연애하지 마라.’”
“…….”
“말하라고, 그렇게.”
“적당히 하자. 나 오늘 기분 정말 뭐 같으니까.”
“왜, 뭐 같은데? 유희진이 한동윤이랑 연애 시작한 게 너한테 왜 뭐 같은 일인 건데?”
차갑게 굳은 승조의 표정에도 건영은 외려 작정한 듯 집요하게 캐묻고 있었다.
“너 유희진 좋아해, 등신아.”
기어코 잘생긴 미간이 움푹 일그러졌다. 관자놀이가 불룩 솟아올랐다.
심장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찰랑대던 물결이 일순 해일이 되어 훅 저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눈앞에 불이 일었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답을 찾으려 고뇌했던 시간들이 다 무의미해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모든 가능성을 열었단 말엔 어폐가 있었다. 단 하나의 분명한 가능성만 줄기차게 외면을 했으니, 애당초 삽질이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챙겨 주고 싶고. 없으면 불안하고 있으면 마음 놓이고. 전전긍긍, 애면글면. 그게 친구한테 느낄 감정이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니란 말도 안 나왔다. 빌어먹을 답이 너무나 명확해서.
억지로 건넨 답지를 받아 들자 모든 게 선명해지고야 말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혼란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불분명하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별안간, 어이없을 만큼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속이 울렁대고 손끝이 저릿댄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히.
들고 있던 타월을 집어 던지곤 도망치듯 밖으로 걸어 나왔다. 로커에 넣어 뒀던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샤워실로 향하려던 그의 발이 멈춰 선 건 그때였다.
-나 지금 네가 좀 필요한데, 차씅.
물기 머금은 희진의 목소리를 듣고 난, 바로 그 순간.
-안 바쁘면 지금 좀 와 줄 수 있을까?
건영의 말이 맞았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해답을 앞에 놔두고 먼 길을 돌아 헤맨 등신이, 다름 아닌 바로 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