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Friend's Love Log RAW novel - Chapter 8
│08. 끝도 없이
“다음 소식입니다. YOONA 화장품이 오늘 오전 이사회를 열어 차승조 전무를 사내 이사로 선임했습니다. 이는 YOONA 화장품 이사회와 엄필중 회장이 본격적으로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으로 해석되며….”
툭, 채널이 돌아갔다. 방에서 바쁘게 걸어 나온 희진이 리모컨을 들어 재빨리 다른 번호의 버튼을 누른 까닭이었다.
“왜 돌려, 보고 있는 거를?”
옥란이 어이없다는 듯 다시 희진에게서 리모컨을 빼앗았다.
“엄 회장의 외손자이자, 배우로도 활동했던 고 엄윤아 씨의 아들인 차승조 전무는 올해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입사 1년 만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전무 이사까지 무려….”
기어코 다시 돌아간 채널에선 끊임없이 차승조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듣고 싶지 않아도, 알고 싶지 않아도 듣고 알게 되는 차승조의 소식. 희진은 정말이지 괴로웠다.
“아, 좀!”
결국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만, 딸이랑 절교한 놈 소식이 듣고 싶냐?”
“네가 절교했지 내가 절교했니?”
도대체가, 정말 누구 편인지.
“그리고.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TV도 못 봐? 너 보고 싶은 거 보려면 늬 집 가서 보든지.”
하…. 아무리 갈 데가 없어도 내가 여길 오는 게 아니었는데.
희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어디, 밖에 산책이라도 나갔다올까 싶다가도 창문 밖 맹렬하게 내리쬐는 시뻘건 햇빛을 보고 있자니 절로 도리질이 쳐졌다.
다시 8월. 찌는 듯한 무더위가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는 한여름이었다.
“그래도 잘 지내는 모양이라 다행이네.”
화면을 바라보며, 옥란이 혼잣말처럼 작게 구시렁거렸다.
그러게.
희진도 차마 내뱉지 못한 목소리를 내어 동의했다.
화면 속 여전한 모습의 그를 바라봤다. 깔끔히 쓸어 넘긴 머리와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정장 슈트, 행커치프에, 넥타이까지 완벽히 갖춰 입은 낯선 차림새가 원래 다 제 것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전보다 더 깊어진 눈매와 무표정하게 집중하는 서늘한 얼굴. 그러다가도 언뜻언뜻 섹시하게 일그러지는 미간의 움직임까지도 너무 얄미우리만큼 잘나고 훤칠해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차승조는 정말로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그게 어쩐지 야속하고 고까웠다. 아등바등 이 악물고 버텨 온 자신과 달리 그는 멀쩡히, 아니, 외려 더 잘 살고 있어서.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그는 제 외조부의 회사에 들어가 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꼭 그간의 방황을 참회라도 하려는 듯 보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TV 속 엄 회장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아 보였으니까.
손대는 일마다 대박이 터졌고, 회사 매출은 급상승했다. 더불어 주가 상승세도 가팔랐다. 더 오르기 전에 지금 사는 게 가장 큰 이익일 거란 농담도 주식하는 개미들 사이에선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타고난 능력도, 운도 많은 그다운 성과였다.
처음엔 경영과 관련해 아무런 경력도, 경험도 없는 수영 선수 출신의 그를 무시하던 주주들과 이사들도 이제 와선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진 모양새였다. 결국엔 이렇게 노골적으로 후계 얘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이젠 정말로,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모니터 속 차승조의 모습이 퍽 낯설었다.
어떻게 견디나 싶게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흐르긴 흘러 벌써 1년이 다 되어 갔다. 늘 함께였던 14년의 세월을 다 지우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 그 오랜 세월 덩어리져 있던 미련을 털어 내는 것 또한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희진은 아직도 혼자만 그때 그 시간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러게 너도 이제 정신 차리고, 승조처럼 잘 좀 지내 이것아.”
“내가 뭘? 나도 엄청 잘 지내는데.”
아닌 척 입을 삐죽이고 대꾸했으나 옥란은 혀를 쯧 찼다.
“잘 지내? 이게 잘 지내는 인간 꼬라지야?”
“내 꼬라지가 어떤데.”
“묻지 말고 거울을 봐. 네 꼴이 지금 사람 꼴인가.”
말은 투박하게 했어도 옥란은 딸을 걱정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해쓱해지는 얼굴과 생기 잃은 표정. 텅 비어 버린 눈동자까지. 제 앞에선 여전히 아닌 척, 태연한 척 너스레를 떨지만 실은 희진이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그녀는 잘 알았다.
“새파랗게 젊은 게 어디 갈 데도 없어서는 황금 같은 여름휴가에 여길 와? 다 늙은 지 엄마나 괴롭히러?”
“기껏 보고 싶어서 온 딸한테, 거, 너무 박정한 거 아닙니까?”
“그래. 나도 힘들어 죽겠고 사는 거 엿 같을 땐 우리 엄마 보고 싶어 죽겠더라. 딱 그럴 때만.”
아차 싶어 핏 웃음이 터졌다. 그녀가 귀신을 속이지 누굴 속이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 보고 싶단 생각도 안 들게 잘 좀 지내라고, 이것아. 그, 대표인지 뭔지 하는 놈 영 아닌 것 같으면 이놈 저놈 여러 놈 만나도 보고, 여기저기 놀러도 좀 다니고. 누가 결혼을 하래, 돈을 많이 벌어 오래. 그냥 지 앞가림이나 잘하고 살라는데 왜 그거 하날 못 해, 지금 나이가 몇인데.”
희진은 할 말을 잃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무차별하게 쏟아지는 엄마의 팩트 폭행이 싫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맞아야 좀 정신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김치국수 말아 줄게, 시원하게 한 그릇 먹고 서울 올라가. 일주일이면 충분히 봐줬어. 나도 좀 혼자만의 시간을 갖자.”
“알았네요. 간다, 가. 진짜 서러워서, 원.”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다시 앞치마를 매고 김치통을 꺼내 오는 옥란이었다.
희진은 거실 한편, 장식장 위에 놓인 액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기억에도 없는 얼굴의 아버지가 우는 저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엄마는 아빠 안 보고 싶어?”
한참 사진 속 낯선 남자를 바라보다 조용히 물었다.
“뭐?”
옥란은 갑자기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이다.
“가끔이라도 말이야. 아빠 보고 싶을 때 없냐고.”
자그마치 3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자신은 고작 차승조를 1년쯤 안 보고 지냈을 뿐인데도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데, 도대체 엄마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온 건지. 문득 그녀가 애처로워진 거였다.
“뭔 소리야. 없긴 왜 없어?”
“…….”
“아직도 이렇게 맨날 보고 싶은데.”
“돌아가신 지 벌써 한참 됐는데도?”
옥란은 질문이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 지나면 다 잊히고 괜찮아진다고. 살다 보면 다 무뎌질 거라고.”
“…….”
“이 엄마가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그딴 거 믿지 마라, 다 개소리니까.”
목 끝이 텁텁해졌다. 시간이 더 지나면 보고 싶은 마음조차 사그라들 거라, 무덤덤하게 차승조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는데, 적어도 제게 그런 일은 없을 거란 소리였다. 한낱 희망이 사그라들었다.
“아직도 난 늬 아빠 보고 싶어 죽겠어.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옥란은 씁쓸히 진심을 토로했다. 오랜 그리움에 지친 그녀의 얼굴에서 아픈 회한이 묻어났다.
“끝도 없더라. 그리운 건.”
열린 창문틈새로 찌르르, 매미 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 * *
목을 옥죄던 넥타이를 탁탁, 풀어 책상 위에 던졌다. 셔츠 단추 몇 개까지 풀어내고 나니 그제야 갑갑했던 숨이 좀 트였다. 커다란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대어 앉아 피곤한 눈을 감았다. 뻑뻑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통유리창 너머의 노을이 길게 들어와 얼굴 위로 붉게 비쳤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던가. 점심을 먹기도 전 회의실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자그마치 일고여덟 시간은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까 신 부장 자꾸 헛소리하던데 법률 팀에서 정확히 자문 좀 해 줘. 또 괜히 CS 들어와서 일 커질라.”
승조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낮게 읊조렸다. 함께 들어온 건영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김 비서님. 신제품 패키지 디자인 공모 건은 개발 팀이랑 디자인 팀 협업 TF 팀 꾸려서 진행하기로 했으니까 내일부터 바로 진행할 수 있게 각 팀에 회의 내용 전달 부탁드립니다.”
이번엔 물잔을 내려놓던 비서에게 지시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비서는 알겠다는 듯 묵례를 하고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
소파에 앉아 가만히 승조를 지켜보던 건영이 어이없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실험해?”
“뭐가.”
“얼마나 안 자고 안 먹고 일해야 과로사로 사람이 죽나. 뭐, 그런 테스트 하냐고.”
안타깝게도 사람 목숨이 상상 이상으로 질기다는 게 실험의 결과라는 걸 말해 주고 싶었다. 승조는 제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켜며 다리를 꼬았다.
“왜. 언제는 놈팡이 짓 그만하라며. 그만 놀고 일 좀 하라더니?”
“너는 인마, 왜 중간이 없냐? 적당히 놀고 적당히 일하고 살란 거였지, 언제 이렇게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일만 하래?”
건영이 답답하단 표정으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별안간 그가 순순히 회사로 들어오겠단 소릴 했을 때까지만 해도 곧 괜찮아지겠거니 했다. 일을 하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좋아질 거라고.
착각이었다. 그날 이후 차승조는 완전히 무너졌다.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일에만 몰두했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스스로를 단죄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건영은 꼭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무서웠다. 희진을 만나기 전, 수영을 그만두며 정처 없이 방황하던 그때의 차승조 말이었다. 차라리 아예 쓰러져 울기라도 한다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은데. 승조는 되레 가면을 쓰고, 마음의 결계를 쳐 평온을 가장했다. 속이 시커멓게 곪아 터지는 줄도 모르고….
“좀 쉬어 가면서 하라고. 회장님 걱정 많으셔.”
“그놈의 걱정은.”
표정 하나 없는 얼굴이 안쓰러웠다.
더 날카로워진 콧대와 턱선이 느릿하게 호선을 그리며 뒤로 꺾였다. 후, 길게 한숨을 내뱉어 내며 이마에 손등을 올려놓는다.
텅 비었다. 바짝 마른 나무처럼, 승조의 눈빛은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건영은 너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차승조가 괜찮지 않은 이유를 구태여 분석하자면 희진의 이름부터 꺼내야 했다. 그녀의 이름은 그날 이후 차승조에게 금기어였으므로.
“나가서 한잔할래?”
“됐어.”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갈 데 있어.”
“어디 가는데? 어제도 야근하느라 집에 못 들어가 놓고.”
“왜, 회장님이 이런 것도 보고하라고 시켜?”
“그래. 하련다, 보고. 어디 가냐니까?”
승조는 핏 웃으며 재킷을 챙겨 들었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곤,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대답 안 하면 따라간다?”
뒤통수로 건영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잔소리꾼이 된 건지 기억도 잘 안 났다. 하여튼, 귀찮은 인간.
결국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답했다.
“좀 쉬러 간다. 됐냐?”
* * *
시동을 끄고, 헤드레스트에 푹, 뒷머리를 기대어 앉았다. 날렵한 턱선을 슬몃 사선으로 치켜올렸다.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 사이엔 담배가 끼워졌다. 살짝 내려간 차창 틈으로 뽀얀 연기가 새어 나갔다.
“후.”
숨을 깊게 내뱉자, 이제야 좀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죽진 말라며 누군가 제게 베푼 숨구멍처럼.
참 자비롭기도 하시지. 그는 실소하며 필터를 깊게 빨았다. 조금 야윈 두 뺨이 홀쭉하게 팼다.
찌르르,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 들려올 뿐 사방은 고요했다. 상념으로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번에 비워졌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제가 기억하는 여자의 흔적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작은 보폭으로 오래 걷던 골목. 검은 밤, 희게 웃는 그 얼굴을 비추던 주홍빛 가로등.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늘 걸터앉아 있던 계단. 뻔질나게 여닫고 다니던 파란색 대문까지.
눈길이 닿는 곳마다 그녀의 모습이 선연히 그려졌다. 마치,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듣지 않아도 들리는 것처럼.
그래서였다. 견디고 버티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힘든 날이면, 이곳 희진의 집 앞에 찾아와 앉아 몇 시간이고 가만히 시간을 보내다 가곤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녀의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더없이 운이 좋은 거였고.
오늘은 운이 좋은 건가.
멍하니 윈드실드 너머를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저 멀리, 한 점을 향해 고정됐다. 골목 어귀를 돌아 걸어 들어오는 작고 하얀 인영은 분명 희진이었다.
양손 가득 바리바리 짐을 들고 있는 걸로 봐선 엄마 집에 갔다 반찬이라도 얻어 온 모양이었다. 무겁다며 또 얼마나 실랑이를 했을지, 바라보는 그의 입매가 설핏 올라갔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 찰랑대는 갈색빛 단발머리. 어둠에도 반짝이는 눈동자엔 별이 박혔다. 누구랑 통화를 하는지, 이어폰을 끼고 종알종알 떠들어 대는 불그스름한 입술은 여상히도 앙증맞았다.
“다행이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안도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간의 불안이 다 무색해졌다. 여전히 여기저기 물건 흘리고 다니진 않는지, 어디 가서 괜히 넘어져 다치진 않는지, 또 상대 배려한답시고 우유부단하게 굴어서 곤란한 일을 겪는 건 아닐지….
저 하나 없다고 그 씩씩한 유희진이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건만, 그렇게 대차게 차여 놓고도 걱정만 많았었다. 속도 없이.
이 상황에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승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낑낑대고 걷던 희진의 작은 머리꼭지가 기어코 파란 대문 안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야속하기도 하지. 여전히 해갈되지 않은 그리움에 되레 목 끝이 까끌댔다.
지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엄 회장이었다.
-퇴근했다면서. 어디냐.
“밖입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그럼 들어가기 전에 이리 들러라.
“피곤한데 그냥 말씀하시죠.”
하는 짓이 완전히 달라지긴 했어도, 그 까칠한 성질머리와 여전한 말본새에 엄 회장이 혀끝을 끌끌 찼다.
-김 박사한테 들었다. 너 요즘 약 먹는다며.
무슨 의사가 환자 비밀 유지의 의무를 개똥으로 아는지. 직업 윤리라곤 한 톨도 없는 김 박사를 탓하며 미간을 꾹꾹 눌렀다.
“다 들으셔 놓고 뭐가 더 궁금하세요.”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그러는 게야? 그럼 일을 좀 줄이면 될 게 아니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제일 신나 했던 분이 회장님이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 못 줄여요. 잘 아시면서.”
-내가 줄여 주랴?
무슨 꿍꿍이인가.
-두정그룹 최 회장이 왜 말만 꺼내 놓고 연락이 없냐고 성화다.
“무슨 말요?”
-정화가 그 집 막내딸하고 자리 마련했다던 거 말이다.
한동안 좀 잠잠하다 했던 얘기였다.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했던 건 엄 회장 당신이었으니. 정작 회사에 들어와 제대로 일을 하니, 차마 결혼 얘기를 다시 꺼내진 못했었다. 근데 또 그새 노욕 하나가 더해진 모양이었다.
대단도 하시지.
“아. 그게 용건이신 것 같은데, 알아들었으니 이만 끊습니다. 운전 중이라서요.”
툭, 전화를 끊어 던지고 담배를 껐다. 언제까지 이 연극을 계속할 수 있을지, 관자놀이가 욱신욱신 조여들었다.
주홍빛 아래, 파랗게 닫힌 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머리를 기댔다. 저 문 너머엔 어쩐지 꼭 딴 세상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저는 결코 열어 볼 수도 없을.
가슴이 뻐근했다. 혼자만 여기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아서.
희진의 자취방에 불이 꺼졌다.
“잘 자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주문이라도 외듯이.
* * *
얄밉고 괘씸했다. 온 직원이 제품을 박스째 들어 옮기며 낑낑거리는데도 멀뚱히 서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인간.
조만간 명예퇴직한다던 소문은 다 헛소문이었던가 싶어, 희진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본부장님,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일부러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고 다가가 뼈 있는 질문을 던져 보지만,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정신이 팔린 건지 천진한 대답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아아, 주식, 주식. 염 대리가 YOONA 화장품 사서 재미 좀 봤다길래.”
“그래서 재미는 좀 보셨고요?”
“봤지, 봤어. 여기 요즘 미쳤다, 정말. 아주 쏠쏠해.”
진짜 정신이 팔린 게 분명했다. 입꼬리가 귀에 걸려선, 시뻘건 액정 화면을 제게 돌려 보여 주기까지 하는 걸 보면.
“차승조였던가. 거기 회장 외손주라는 그 사람 말야. 그 사람 능력이 그렇게 대단해? 뭐 사람 하나 때문에 주가가 그렇게 올라?”
“업계 톱이니 규모는 원래 큰 회사긴 했는데, 그동안은 좀 올드하고 식상한 이미지라 주가도 저평가되어 있었거든. 이번에 그게 팟 튄 거지, 뭐. 제품 리뉴얼에 모델까지 싹 다 교체하고 나서부턴 완전 상승세.”
“안 그래도 어제 제품 리스트 보더니 장 PD님이 묻더라고요. 이거 굳이 PPL 필요하냐고.”
이젠 일하면서도 차승조 얘기를 들어야 하나 싶어 다시 박스를 들었다. 차라리 그냥 생각 없이 일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리 줘요.”
들어 올리던 박스의 무게가 번득 가벼워졌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나타난 동윤이 들고 있던 걸 채어 간 거였다.
“아, 뭐야. 대체 언제까지 닭살일 건데?”
그칠 줄 모르는 호들갑에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직원들은 여전히 동윤과의 사이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걸로 알았다. 비밀 연애도 아니고 비밀 이별이라니, 퍽 우습기도 했으나 이것 또한 이젠 꽤 적응이 되어 가는 중이라 할 만해졌다.
“암튼, 다들 여윳돈 있으면 YOONA 주식 사. 앞으로 더 오르면 올랐지 떨어질 일은 없다고 본다.”
흥분한 본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게요. 지라시도 돌더라고요? 조만간 두정그룹이랑 사돈맺을지도 모른다던데?”
새 박스를 들던 희진의 손이 멈칫, 미끄러졌다.
“뭐야. 정략결혼이라도 한대?”
“모르죠. 그냥 헛소문인지 뭔지는. 근데 꽤 가능성 있는 썰 아니에요?”
심장이 내려앉고, 입술이 말랐다.
유명 인사를 짝사랑 상대로 뒀단 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울 일이던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그의 이름, 그의 소식은 정말이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차라리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 엉망으로 망가져 지내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궁금해하고 상상하고 그리워하는 편이 훨씬 덜 아플 것 같았다.
나쁜 놈.
이놈은 끝까지, 제멋대로다. 나는 아직 제대로 정리도 못 했는데.
“유 팀장, 왜 그래? 어디 아파?”
갑자기 왈칵,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저도 모르게 멍청히 몸이 굳어 버린 모양이었다.
“머리가 좀 아파서. 저 화장실 좀….”
고개를 푹 숙이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억눌렀던 감정이 소나기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 * *
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사업이니 경영이니, 다 사람 갈아 제 주머니 채우는 일이라 폄하했었는데 하다 보니 의외로 제 적성에 딱이라 당황스러웠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이는 건가도 싶었다. 그렇게 치를 떨며 비난하던 일을 이젠 제가 하고 있으니.
다만 이런 자리는 여전히 영 적응이 안 됐다. 무익하고 역겨운 인간들과 얼굴을 맞대고 허허실실 상대해 줘야 한다는 것, 그게 이 일의 가장 엿 같은 점이었다.
“비위 거슬려도 대충 맞춰 주고, 들어 주고 해. 알아 두면 다 도움 되는 인간들이야. 혼자만 잘났다고 돈 벌 수 있는 게 아니다.”
연회장으로 향하며, 엄 회장은 혹여나 승조가 제 성질을 참지 못하고 또 일을 칠까 싶어 계속 신신당부를 했다. 꼰대 같긴 해도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로열 클럽 자선 기부 파티. 기부는 핑계였고, 진짜는 재벌들의 친목 담합회였다. 딱히 누군가와 친목을 다지고 싶지도 않고, 부패와 담합을 주도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나 기왕 진흙탕에 발을 들인 이상 언제까지 독야청청 고상을 떨 수도 없는 일이었다. 모르고 시작한 일도 아닌데.
홀에 들어서자 하나같이 사치스럽고 천박하게 차려입은 인간들이 수두룩했다. 도대체 이런 정신없고 쓸데없는 자리에, 뭐 신난다고 다들 나와 유세를 떨고 앉아 있는 건지. 새삼 인간이 환멸스러웠다.
엄 회장과 승조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그 의도 짙은 관심과 눈빛들이 역겨워 그는 적당히 상대하다 자리를 빠져나왔다.
목이나 더 축일까 싶어 바로 향할 때였다. 문득, 낯익지만 반갑지는 않은 얼굴 하나가 제 앞에 다가와 섰다. 한동윤이었다. 짙은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오랜만에 뵙네요.”
동윤이 알은체를 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는 제 앞의 손을 맞잡지는 않고 그저 느릿하게 훑어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눈빛이, 전혀 반갑지 않다는 속내를 오롯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기억은 하나 보네요. 표정 보니.”
기억 못 할 리가 있나. 사람 하나를 가지고 놀아도 더럽게 가지고 놀아 놓고는. 이놈 때문에 훌쩍이던 그 말간 얼굴이 떠올라 괜스레 짜증이 났다. 대체 이딴 놈을 어딜 보고.
동윤이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내밀었던 손을 거뒀다.
승조는 바위에 제 빈 잔을 올렸다. 대기하고 있던 바텐더가 빈 잔에 샴페인을 채웠다.
“자리가 좀 불편하죠. 신경 쓰이고.”
옆에 다가와 선 동윤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 이러는가, 승조는 가만 그 눈을 들여다보며 의도를 추궁했다.
“여긴 지루하니 같이 나가서 한잔하잔 소린 아닐 거고.”
노골적 조롱에 동윤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시죠.”
오만무례하고 건방지기 짝 없는 놈. 제가 잘나 빠졌다는 걸 너무 잘 알고 그걸 확실히 이용할 줄 아는 놈. 태어나 좌절감 같은 건, 박탈감 같은 건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을 것 같은 인간.
하지만 동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차승조를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게 뭔지.
그래서일까. 샴페인 잔을 빙그르, 흔들며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는 그의 옆얼굴이 퍽 가증스러워 보였다. 나른한 표정은 용건이 있으면 어디 떠들어 보라는 듯했다. 내심 궁금해졌다.
차승조가 언제까지 이렇게 건방지게 굴 수 있을지.
“희진 씨랑은 아직도 연락 안 하고 지내시는 것 같던데.”
아니나 다를까, 빙글빙글, 규칙적으로 돌아가던 그의 잔이 멈췄다.
“두 분, 뭔가 감정이 크게 상할 일이 있었나 봅니다.”
매끈한 콧등에 미세한 균열이 갔다. 아닌 척 애를 썼지만 무방비하게 들려온 희진의 이름에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내려앉는 건 당연했다.
“친한 사이였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연락도 안 하고 완전히 절교할 만큼의 일이 뭐가 있을까. 꽤 궁금하긴 하더라고요. 희진 씨한테 슬쩍 떠봐도 전혀 말을 안 하니.”
들고 있던 샴페인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꿀꺽꿀꺽, 목을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 향이 알싸했다. 더는 쓸데없는 잡설 들어 줄 아량은 없다는 듯 유리잔을 탁, 내려놨다.
“조만간 희진 씨랑 다시 시작해 볼까 하는데.”
뜻밖의 얘기에, 돌아서던 구두 끝이 멈칫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의 의도가 너무 뻔하게 느껴져 실소가 터졌다.
“그걸 왜 나한테 물으시는지.”
돌아본 동윤은 웃고 있었으나 눈빛엔 적의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어쩌면 어렴풋이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과 희진이 연락을 끊은 이유에 대해서.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어쩐지 차승조 씨한테는 미리 말을 해 놔야 제가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급한 경고가 분명했다. 승조의 표정이 일순 서늘히 굳었다.
“번지수 잘못찾으셨네. 유희진이랑 잘해 보고 싶거든 내가 아니라 당신 주변부터 정리하는 게 순서 같은데.”
“그건 걱정 마시죠. 법적으로 문제 될 부분 다 깨끗이 해결했으니까.”
“깨끗?”
픽, 입매를 끌어 올리며, 대놓고 조소를 했다. 유부남이었던 것도 속이고 시작했던 주제에 뭘 그리 당당히도 지껄이시는지.
성질 같아선 개수작 부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며 욕을 퍼붓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제겐 명분이 없었다. 이젠 정말 친구도 뭣도 아닌 사이였으니 그녀의 연애사에 끼어들어 간섭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세요, 그럼.”
다시 차갑게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렇게 깨끗하면 잘해 보시라고.”
끓는 속을 누르며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이 역겨운 순간마저 참아 낸 비위라면 누구든, 상대 못 할 인간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