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arre Restaurant RAW novel - Chapter (261)
괴식식당-261화(261/613)
261화. 원수를 은혜로 (4)
크라이의 상태창은 아주 긴 세월 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스킬은 조금씩 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경험치나 마나코어의 양, 레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초마왕 토벌로부터 삼천 년.
정신이 아득해지는 전쟁의 시간.
그러나 세 번째 신명으로 가는 벽은 높고 두껍다.
변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여태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세 번째 신명을 가진 신은 지금까지 유승우 하나.
그를 제외한 모두가 그러했듯이, 크라이도 벽에 막혀 있었다.
안간힘을 쓰고 발버둥을 쳐도 상태창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상태창은 평소와 달랐다.
마나코어의 개수가 늘었다.
딱 한 개.
99,999개의 마나코어가 100,000개가 됐다.
“이건-!”
아주 적은 양.
인간이 레벨1에서 2로 변할 정도의 티끌 같은 성장이지만 성장했다.
처음으로 수치가 변했다.
세 번째 신명으로 가는 벽에 아주 작은 금이 생겼다.
가능성이 열렸다.
“말도 안 돼.”
분명 괴식을 먹다가 죽을 뻔했다.
그렇다고 해도 먹는 것만으로 이렇게 간단하게 성장하다니.
크라이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자 승우가 말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야. 너는 수천 년간 싸워왔다고 했지?”
“그래. 수도 없이 싸웠다.”
“그런데 그 싸움의 밀도는 어땠어?”
“밀도…….”
“우리가 용사로서 여행을 떠날 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쉬웠을 거야.”
인간에게도 레벨이 있다면 세계에도 레벨이 있다.
월드 레벨이라고 한다.
게이트가 열린 지 10년째인 지구의 월드 레벨은 4다.
그럼 테라의 레벨은 어떨까?
“테라의 월드 레벨은 32. 전 차원 중에서도 톱클래스지.”
승우에게 무참하게 썰려서 그렇지, 테라의 신들은 아주 막강한 신들이다.
신명은 전 차원에 하나만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하늘, 바다, 대지, 죽음, 전쟁, 공포, 지혜, 벼락 등 좋다는 신명이 죄다 몰려 있는 올림포스의 저력은 손꼽힐 정도로 강력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너무 월드 레벨이 높아서 마왕군과 초마왕까지 출연했던 거지만.
“그런데 테라 같은 엄청나게 높은 월드 레벨의 차원에서 싸우다가 다른 차원으로 가서 용병 일을 했다? 수천 년을 했어도 무의미해. 너희 차원은 월드 레벨이 낮았지?”
“그래.”
크라이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임페리얼 오크의 차원은 그리 썩 높은 레벨이진 않았다.
문명이 워낙 낙후됐고, 종족도 다양하지 않았으며 파괴를 일삼는지라 자신의 차원들도 태반이 파괴된 탓이다.
승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만 싸웠다는 거지? 반복 숙달은 나쁘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해서 성장하는 자들은 아주 낮은 경지의 이야기야. 우리쯤 되면 그런 게 문제가 아니잖아.”
자세를 잡고, 공격법을 수련하는 단순 반복 숙달로 성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일정 단계를 넘으면 실전이 필요하고, 그 실전도 약한 몬스터 수천 마리를 잡는 것보다 하나의 몬스터를 잡더라도 강한 녀석을 잡는 게 좋다.
레벨과 신격, 마나코어를 올리는 기본 상식이다.
승우가 살짝 조소를 띠면서 말했다.
“너보다 강한 상대를 찾는 일은 쉽지가 않아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반복해 봐야 얻을 거라곤 약자 멸시, 벌레 잡기, 강약약강,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하찮은 신명뿐이야.”
“그건 아니지만……. 큼. 그래, 부정할 수는 없군. 나는 확실히 초마왕 토벌 이후로 생사를 건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강해서도 그렇지만 적이 너무 약했어.”
“거봐.”
“하지만.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가 왜 이까짓 돈가스 한 장에 마나코어가 늘어났지?”
“그건 그 음식이 5성 요리기도 하고, 너의 약점을 정확하게 공격해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세웠으니까.”
두 개의 신명을 가진 투신이 돈가스 한 장에 스틱스 강을 넘을 뻔했다.
우스갯소리도 못될 이야기지만 실로 격렬한 전투였다.
불과 매운맛에 내성이 있는 백강혁이 0.1㎖도 안 되는 양으로 기절할 정도의 강한 독, 아니, 괴식이다.
크라이는 그걸 한 대접을 먹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 한 번.
뇌가 과부하로 타버리기 직전까지 몰리길 수십 차례.
비명도 지르지 않고 참았지만, 그의 혀와 내장, 식도는 이미 수백 번 녹아내렸고 재생했다.
트롤 뺨치는 임페리얼 오크의 재생능력과 크라이의 엄청난 플라나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다.
“그리고 또 하나.”
승우가 씩 웃으면서 스스로를 가리켰다.
“내가 한 요리니까.”
괴식의 신이 직접 만든 오리지널 레시피의 5성 요리다.
드워프가 보답으로 준 100년 산 비법 식초를 아낌없이 쓰고, 거기에 천 번의 강화마법을 건 정성 덩어리 괴식이니 효과가 좋을 수밖에!
“아, 진짜 나는 너무 착한 거 같아. 원수를 은혜로 갚았네. 아주 호구가 따로 없어. 친구가 좋긴 좋다. 그지?”
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이나 해.
친구라서 고맙지? 좋지?
강요하는 태도로 승우가 눈을 까닥였다.
“후우우우-”
크라이는 깊게 공기를 들이마시며 땀을 닦았다.
물수건이 붉게 물들었다.
아직도 모공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오크의 피는 산성인 탓에 녹아내리는 수건을 보며 크라이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속에서 두 가지 마음이 싸운다.
고마움과 분노다.
두 마음은 길항하면서 대립했다.
크라이는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다.
“오, 친구여.”
크라이가 손을 내밀었다.
화해의 악수는 아니었다.
질풍 같은 정권지르기다.
“죽어!”
“!”
“그래도 그렇지 남의 겟슈를 이용해서 저런 걸 처먹였어야 했냐?!”
“좋은 뜻으로 한 거라고! 결과도 좋았잖아!”
“그런 건 모르겠고 어금니 꽉 물어.”
2차전의 포문이 열렸다.
둘은 서로의 멱살을 잡았다.
진짜 40년간 원 없이 싸우던 사이라서 그런지 자세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승우는 바로 반격을 하려다가 주먹을 거뒀다.
“냐아아…….”
나비가 귀를 눕히고는 꼬리를 축 늘어트린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싸우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결국 싸우는구나.
그것도 실내에서.
애옹 하고 구슬프게 나비가 울었다.
“윽.”
양심이 아프다.
승우는 치켜든 주먹을 내리며 인상을 썼다.
“야. 밑 게이트로 따라와.”
“좋아. 바라던 바다.”
둘은 쿵쾅거리면서 계단 아래, 게이트로 내려갔다.
* * *
싸움의 결과는 예상대로 승우의 승리였다.
마나코어가 한 개 늘어난다고 해도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었다.
어쨌든 크게 한바탕 또 붙었고, 하룻밤이 지나 정신을 차린 크라이는 떠났다.
그에게는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도장을 차리기 위해서 서류 접수도 해야 되고, 허가증도 따야 하며 한국 정부가 제시하는 교육자로서의 자격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시험도 봐야 한다.
신명 두 개의 신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있다.
그렇게 크라이가 떠나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가게는 정상영업을 시작했고 손님들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소란스러운 일은 끝나고 이제야 일상으로 돌아온다.
“수고하셨습니다냐아.”
“나비도 수고했어. 영식이도 수고했고.”
“뿌!”
8시. 밥집치고는 이른 시각이지만 항상 닫는 시간이 됐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비가 종종걸음으로 욕탕으로 향했다.
꼬리에는 수건을 걸고 콧노래도 부른다.
녀석은 씻는 걸 엄청 좋아하는 물냥이다.
그 뒤로 은하가 쪼르르르 달렸다.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나비랑 같이 씻으려고 기다린 모양이다.
원래는 영식이도 씻겠지만 시차적응을 못 했는지 며칠째 일찍 잔다.
그래서 씻는 것도 그냥 물을 대량으로 삼키고 가글가글- 하고 행군 후에 뱉는 걸로 끝냈다.
슬라임은 그래도 목욕이 되긴 하는지라, 은하가 치사하다고 볼을 부풀렸다.
어쨌든 씻고 나서부터는 자유시간이다.
그래서 8시가 되는 순간, 떠들썩했던 가게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입구의 팻말을 닫음으로 돌려놓은 후, 승우가 가게에 들어섰다.
“하.”
잔잔하게 들리는 재즈 소리.
창밖으로 보이는 인적 드문 길거리.
간간히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대재앙 이후로 번화함을 잃은 서울이기에 가능한 한적함이다.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시라노에게 선물 받은 최고급 원두다.
공교롭게도 황지현으로부터도 완벽하게 똑같은 원두를 받았다.
우연이겠지만 리비도 똑같은 선물을 줬다.
“요즘은 이걸로 선물이 통일인가?”
맛이 좋다.
향도 좋고.
코를 간질이는 커피 향.
등을 기대고 흔들의자에 앉았다.
이럴 때면 우울함 반, 편안함 반의 기묘한 기분이 된다.
승우는 소란스러움보다는 조용함을 좋아한다.
도시보다는 시골이 좋고, 번화한 백화점보다는 시장이 좋다.
화려하고 빛나는 별이 다섯 개 달린 호텔보다 모르는 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호의를 베푼 작은 집이 더 좋다.
그런 취향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막연히 좋아할 수는 없다.
서울이 마치 시골처럼 조용해지고, 사람이 드물어지며 차가 희귀한 것이 된 이유는 게이트가 열렸기 때문이고 사람이 죽은 탓이니까.
“흐흥. 오늘은 좀 감성적인걸.”
쓸데없는 고민과 생각이다.
이틀 전까지는 신난 고딩처럼,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주먹으로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다.
이제 와서 감성에 빠진들 뭣하리.
승우는 실소를 내뱉으며 책을 들었다.
비싼 돈 주고 산 차원 법 책이다.
‘차원 법 공부를 해야겠어. 요즘 월드 레벨 올라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
게이트가 처음 열릴 때는 월드 레벨이 1이다.
9년이 지났을 때, 그러니까 승우가 지구로 돌아왔을 때는 월드 레벨 3이었다.
그런데 반년이 지난 지금은 4다.
레벨 업에 가속도가 붙었다는 뜻이다.
‘아마 나 때문이겠지.’
승우의 존재.
테라의 신들의 출입.
크라이의 출연.
이 모든 것이 월드 레벨의 상승 속도를 빠르게 만들고 있다.
‘물론 급한 일은 아냐. 솔직히 이 수준에서 지구의 월드 레벨이 4라는 건 말이 안 돼.’
지금의 대응 수준을 보면 월드 레벨 10이 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테라보다도 우수한 면이 있다.
‘지구는 상당히 준비가 된 편이라 믿고 쉴 수 있어. 나는 나대로 차근차근 나아가자.’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승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노트를 꺼냈다.
커피, 조용한 음악, 깨끗한 환경과 볶은 버섯.
공부할 준비는 다 됐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
공부하기 싫다.
이 정도로 준비를 다 해놨더니 오히려 하기 싫어졌다.
승우는 의지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 강했다.
공부만 해서 고시원에서는 독종꽃미남이라고 불렸다
“최악의 별명이야. 진짜로…….”
꽃미남 부분은 둘째 치고 그는 독종이란 별명답게 임용고시도 한 방에 패스했다.
공부는 자고로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거라 했다.
꾸준히 의자에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게 공부다.
‘아니, 요즘은 그런 구닥다리 공부 방법보다는 효율적으로 확- 하고 쉬는 게 낫다고도 하는 거 같은데… 뭔가 신개념의 공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잡생각이 많다.
머리에 마구니가 꼈나.
보던 만화책이 아른거리고 영화 목록이 떠오른다.
요즘은 리모콘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의 수많은 영화를 볼 수 있다.
중고 만화책도 사러갈 필요도 없이 E북으로 명작 만화도 다 살 수 있다.
“놀 게 너무 많아.”
고시원에서 죽어라 공부해야 했던 예전과는 다르다.
아무래도 집중이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엉덩이를 떼면 끝장이다.
한 번 꺾인 의지는 두 번도 쉽게 꺾인다.
굳건한 의지! 강한 정신력!
끙끙거리면서 안 되는 공부를 하던 승우가 미소를 지었다.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민이다.
그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업 종료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시간 괜찮냐고?
승우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공부하려고 했는데 민이 왔으니까 어쩔 수 없네.
아끼는 동생이 왔는데 공부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승우는 냉큼 책을 인벤토리에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은 먹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