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arre Restaurant RAW novel - Chapter (430)
괴식식당-430화(430/613)
430화. 눈이 오면 (3)
한쪽에서는 배추를 썰고.
한쪽에서는 무를 썬다.
한쪽에서는 양념장을 만들고 있다.
은하는 생강차를 양손으로 쥐고 오빠 언니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앉아서 눈을 보면서, 잡담한다.
웃으며 간식을 먹는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뭔가 일을 한다.
보고 있으면 알 수 있다.
다들 재밌어 보인다.
영식이랑 같이 그냥 따뜻한 방안에서 간식을 먹으며 노는 거보다 훨씬 재밌어 보인다. 이유가 뭘까?
“틀림없어요. 김장은 재밌는 게 분명해요.”
“뿌?”
“우리도 김장하면 더 재밌을 거예요.”
“뿌??”
영식이가 땡글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김장은 중노동이라 재미없는 거라고 빤짝이가 그랬다뿌?”
“…이건 비밀인데요.”
은하가 슬쩍 눈치를 보면서 영식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지현 언니가, 강혁 오빠 말은 우선 95%는 믿지 말라고 했어요.”
“뿌?!”
옳은 말의 반대말은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뒤집으면 옳은 말이 된다.
“강혁 오빠가 재미없는 거라고 했다면, 그건 재밌는 게 분명해요!”
처음엔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까 그럴듯하다. 영식의 눈이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자기들만 재밌는 거 하려고 거짓말한 거뿌?”
“지현 언니의 말에 따르면, 그럴 확률이 약 95%예요.”
빤짝이 녀석. 나쁜 놈은 아니라고 믿었는데 결국 나를 배신했구나.
영식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폴짝, 침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뒤적뒤적, 서랍을 뒤진다. 영식이는 화염 내성도 있고 빙결 내성도 있다. 추위에는 강한 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슬라임이라서 내성이 있어도 몸이 굳는 일은 피할 수가 없다.
말랑말랑한 젤리 바디는 겨울이 되면 딱딱하게 굳는다. 그게 싫어서 꽁꽁 싸매고 외출한다만, 일하면서까지 꽁꽁 싸매고 일할 수는 없지.
“찾았다뿌.”
영식이가 서랍에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라고 적힌 작은 향수병을 꺼냈다. 이 향수병은 혹시 겨울에 외출할 때가 있으면 그때 쓰라고 헤르메스가 선물한 것이다.
쉽게 말에 뇌물이다.
이 향수를 몸에 뿌리면 탱글탱글함이 유지되고, 심지어 따끈따끈하다고 했다.
“뿌으우!”
향수를 뿌리자, 과연 몸이 따뜻해진다. 힘이 솟는다.
재밌는 김장을 할 수 있다.
후다다닥 영식이가 달려간다.
“가, 같이 가요!”
은하도 뒤따라 달렸다.
* * *
이야기를 다 들은 승우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래서 너희도 김장하고 싶다?”
“뿌.”
“네.”
“…….”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아이들조차도 강혁을 믿지 않고 있다는 건가. 그도 아니면 아이들에게는 진짜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건가.
‘김장은 진짜로 힘든 일인데.’
백화점에서 받아온 배추는 아주 실한 중생종의 배추로 한 포기에 3㎏쯤 된다.
그런 배추 삼천 포기를 네 등분해서 소금물에 절여야 한다. 배추 무게만 9t이다.
그걸 소금물에 절이기 위해 담갔다가 빼서, 다시 옮겨서 숙성을 시키고, 양념장을 넣는 게 김장의 과정이다.
적어도 네 번에서 다섯 번 이상을 들어야 하니, 오늘 하루 들어야 할 배추의 무게는 약 50t가량.
‘솔직히 헌터가 아니면 사람을 열 명을 더 불러야 할 일이지.’
중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다. 헌터라서 힘이 별로 안 든다고 해도 애한테 힘든 일은 확실하다.
영식이나 은하나 레벨과 근력은 충분하지만 애다. 평소의 가게 일을 조금 거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개노가다.
아이들은 피하게 해주고 싶은 게 승우의 마음이었지만.
‘설마 하고 싶어 할 줄이야.’
남이 하는 걸 보면 재밌어 보이는 건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진가 보다. 승우는 씩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뿌!”
“김장은 너무 재밌어서 아이들이 할 게 아니야.”
“앗, 치사.”
“따뜻한 방으로 돌아가서, 코코아나 마시면서 게임이나 해.”
심술쟁이다.
자기만 재밌는 거 하려고 한다.
은하와 영식이의 볼이 빵빵해지기 시작했다.
그걸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가며, 승우가 슬쩍 자리를 비웠다.
은하와 영식이는 혼자만 재밌는 걸 하려는 심술쟁이의 뒤를 보다가 둘이 소곤소곤 말했다.
“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뿌.”
“맞아요. 이렇게 됐다면…….”
몰래 김장할 수밖에.
매의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어디가 좋을까.
지금 마당은 사람들이 세 군데에 나누어져 있었다.
배추를 썰던 두 언니들 사이에 삼촌이 가서, 황지현 언니가 백강혁 오빠에게 갔다.
자리를 바꿔준 모양이다.
그래서 백강혁 오빠와 황지현 언니. 문선아 언니와 삼촌. 민 오빠와 나비가 셋으로 나뉘어 일하고 있다. 어디에 끼어볼까?
“저기는 안 대뿌.”
영식이가 손을 뻗어 가리킨 곳에는 황지현과 백강혁이 있었다.
은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요. 저기는 안 돼요.”
황지현 언니는 멋있고 예쁘고 일도 잘하지만, 뭔가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는 느낌이 있다.
백강혁 오빠는 멋있지는 않고, 일도 잘하지는 않지만, 뭔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멋있어지는 사람이다.
거울에 비춘 듯 사물은 좌우가 반전되어 닮은 듯 닮지 않는다던데, 둘은 딱 그런 사이다.
저런 사람들이 밖에선 아닌 척하면서 뒤에서 손잡고 뽀뽀하고 그런다고 헤르메스 오빠가 그랬었다.
헤르메스의 말빨 덕에 은하와 영식이는 둘이 뽀뽀하는 사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저 둘 사이에 껴 있으면 예의가 아니겠지.
“삼촌과 선아 언니도 안 돼요.”
“맞다뿌.”
자기들끼리만 김장하려고 하는, 삼촌은 우리가 김장을 못 하게 할 수도 있다.
소거법으로 둘을 제거하고 보니 민과 나비 쪽이 남았다.
“홀쭉이. 믿음직해뿌.”
조금 말라서 어깨에 타면 좁지만, 민은 듬직한 남자였다.
무게중심을 잡는 기술이 대단해서 머리에 영식이를 올려놔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뿐인가.
백강혁의 머리를 치면 텅 빈 소리가 나지만, 민의 머리면 꽉 찬 소리가 난다. 민은 그게 바로 지성이라고 했었다.
…….
아무튼.
“저쪽에 가자뿌.”
“네.”
아이들이 신나서 민에게 다가갔다.
민은 아이들을 보다가 잠깐 눈을 깜빡이고는, 굴이 담긴 작은 접시에 백강혁이 가져온 무채를 올렸다. 그리고 양념장을 버무린 후에 영식이의 코앞에 내밀었다.
“먹어봐. 간이 잘된 거 같아?”
“뿌, 홀쭉이. 좋은 사람. 냠.”
영식이는 쩌업 하고 입을 벌려서 굴 무채를 먹었다. 싱싱한 생굴에 매콤한 양념장. 그리고 아삭한 무채.
뿌웁뿌웁 하고 공기를 몇 번 내뱉으면서 영식이가 혀를 팔랑거렸다. 맛있지만 맵다. 은하도 같은 마음인지 입을 오물거렸다.
“아이들에게는 굴보다는 수육이 낫나?”
민이 동의를 구하듯이 나비를 보았다. 나비는 애옹, 하고 울더니만 한 덩어리의 수육을 썰었다.
수육까지 풀기에는 아직은 조금 이르지만, 뭐 어떤가. 천천히 하라고 용사님도 말씀하셨다.
“기왕이면 겉절이로 주는 게 아이들에게도 낫겠지.”
슬쩍 백강혁이 다가와서 소금물에 절인 배추 반 포기를 찔러주었다. 백강혁 뒤의 사람들을 보니 저쪽은 벌써 시작한 모양이다.
빨리 아이들을 배 채워서 보내고, 소주나 까자고 백강혁과 문선아가 신호도 보낸다.
오늘의 아이들 담당은 어째, 민으로 정해진 모양이다. 민은 헛기침하고는 겉절이를 무쳤다.
“얘들아, 이건 겉절이라는 건데…….”
막 소금물에 절인 배추를 손으로 떼서 양념장을 묻힌다. 사각사각하고 아삭아삭한 배춧잎에 가마솥에서 방금 꺼내 따끈따끈한 수육을 한 점. 거기에 조그마한 굴.
맛있지만 먹다 보면 맵다.
그렇게 매워서 힘들다 싶으면 이제 홍게, 그리고 대게의 등장이다.
오늘 아침 영덕에서 잡혀 온 신선한 영덕대게는 검신의 천재적인 실력으로 먹기 좋게 손질되어 화려하게 접시 위에 놓여 있다.
껍질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손으로 잡으면 껍질과 살이 순식간에 분리된다.
이 호화로움, 이 사치스러움.
아이들은 배가 뽈록해질 때까지 수육과 대게, 홍게, 굴 김치를 먹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김장 재밌다뿌.”
“김장 너무 좋아요. 매일 했으면 좋겠어.”
이걸 매일?
어쩜 그렇게 무서운 생각을 하는지. 민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 * *
배를 채운 아이들이 따뜻한 방으로 돌아가면, 그때부터는 어른들의 시간이다.
당연히, 술이 등장한다.
승우가 소주의 빨간 뚜껑을 보면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기하게도 이 맛없는 술이 이세계에서는 먹고 싶어지더라. 지구에 있을 땐 희석식 소주는 알콜 덩어리라고, 안 먹는다고 그렇게 싫어했는데 말이지.”
“한국인은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저도 소주랑 김치 생각나서 미치겠더라고요.”
“저는 별로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확실히 제대로 된 한국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군요.”
승우의 푸념에 백강혁이 긍정했고, 민이 부정했다.
하지만 셋 다 긍정하는 게 있다.
“그래도 오늘은 먹을 만하네.”
객관적으로 보아 소주는 맛이 없다. 근데 이 맛없는 소주가 맛있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오늘 같은 날이다.
삼천 포기라는 엄청난 숫자의 김장을 끝내고, 수육과 대게, 홍게, 굴 김치를 안주로 술을 먹는데 맛없기는 힘들지.
아니, 그럼 술이 맛있는 게 아니라 안주가 맛있는 거잖아? 아무렴 어때, 맛만 좋으면 됐지.
귀환자 셋의 귀환자 토크를 한 귀로 흘리며 문선아가 홀린 듯 수육을 입에 넣었다.
옛날식은 옛날식만의 맛이 있다며 커다란 전통 가마솥에서 쪄낸 수육은 눈이 번쩍 떠지게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수육을 좀 전에 만든 김장김치에 싸서 한입에 쏙. 그리고 뒤따라서 소주 한 잔.
이걸 위해서 일했다.
“크으하아. 조흣타.”
“…….”
황지현이 뭐라 말하려다가, 조용히 소주잔을 홀짝였다.
이 언니는 다 좋은데, 인간이 털털하다 못해서 아저씨처럼 보일 때가 있다. 크으하아는 뭔 크으하아인지. 한숨이 나온다.
그 한숨을 대게 집게살로 막았다. 손가락 두 개 정도의 굵기를 가진 집게살은 살짝 껍질을 들자 쏙 하고 빠져 오도통통하고, 영롱한 자태를 뽐냈다.
한 입 크게 먹고, 소주를 마신다.
“크으하아아, 조오타.”
“…….”
이번엔 선아가 물끄러미 지현을 봤다. 이 아이는 다 좋은데, 인간이 털털하다 못해서 아저씨처럼 보일 때가 있다.
크으하아아 조오타는 뭔 크으하아아야. 한숨이 나온다. 선아는 그 한숨을 그냥 내뱉었다.
“에휴. 얘, 너 쫌 아저씨 같다.”
“지금 누가 할 말을 하는 건데요!”
투덜거리면서 굴김치를 한 입. 버터처럼 달달한 굴에 김치의 매콤함이 더해지니 술이 죽죽 넘어간다.
안 그래도 주량이 강한 사람들이다. 각성자가 돼서 주량이 강해지면 몇십 배가 강해졌지, 약해지지 않는다. 술병이 점차 늘어난다.
그렇게 즐거운 뒤풀이가 이어지고, 술이 박스가 될 무렵. 능하가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
다섯의 눈이 능하를 향했다. 백강혁이 살짝 풀린 입으로 말했다.
“에헤이, 고삐리가 어딜 와. 절루가 얌마얌마.”
“술 마시러 온 거 아닙니다! 소주 안 마셔요!”
“이생키이생키. 소주 말고 위스키 마시는구만.”
“어떻게 알았…….”
“척하면 척이짐마. 얌전한 원래 고양이가 야자 째고 피방 가고, 아빠 몰래 술 까고 그런 거여. 저 쉑 뒤에서 담배도 필겨. 발랑 까진 놈 같으니.”
백강혁은 권능하가 발랑 까진 놈인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왜냐, 본인이 발랑 까졌기 때문이다.
능하가 뭐라 항변하려다가 말을 말았다. 취객과 논리로 말하는 건 손해였고, 백강혁과 논리로 말하는 건 대손해였다.
진지하게 대화하면 자신만 하찮아진다. 똑똑한 권능하는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말했다.
“혹시 지금 도와주실 수 있는 분 계십니까?”
제법, 간절한 눈이다.
흥미가 동한 민이 되물었다.
“뭔 일인데 그래?”
“B섹터와 C섹터의 헌터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뭐?”
“눈싸움의 상품을 노리고, 난입했어요.”
유승우 배 전투 눈싸움의 보상인 아티팩트를 노린 약탈자가 등장했다.
“삼백 명이 넘어요. 본부가 완전히 털리고 있어요.”
상품을 노리고, 원정을 왔다?
상상도 못 했던 말에, 술이 깬다.
벌떡 하고 헌터들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