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arre Restaurant RAW novel - Chapter (490)
괴식식당-490화(490/613)
490화. FA (1)
화신이 됐다. 민은 솔직히 말해서 계약서의 내용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눈에 뵈지도 않았다.
일단은 서명한다. 화신이 된다. 마음이 변하기 전에 도장 쾅 찍고 빨리 화신이 되고 싶다.
그 모습에 승우가 걱정한 모양이지만.
‘선생님은 근본적인 착각을 하고 계신다.’
승우의 삶 중 태반은 테라에서의 삶이다. 하지만 민은 지구인이다.
지구에서 글로벌하게 놀았다. 용병 계약도 해 보고, 군인 계약도 해 보고, 헌터 계약도 했다.
계약서의 중요성은 민도 아주 잘 알았다. 그저,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서둘렀다. 마음이라도 변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어쨌든 민은 화신의 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것은 의미가 크다.
어째서 의미가 큰가.
두 번째 화신인데도, 백강혁의 뒤를 이어서 화신이 됐는데도 의미가 클 수 있나?
‘당연하지.’
백강혁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저놈은 화신의 서를 본 적도 없다.
서명도 안 하고 그냥 어느 날부터인가 화신이 됐다. 이 정보는 엄청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백강혁 저놈. 정식 계약 아냐.’
계약이란 서명을 자신의 의지로, 투명하게, 당당하게 적었을 때 체결된다.
지금의 백강혁은 화신이지만 화신의 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저 녀석은 정식 계약한 화신이 아니라, 임시 계약한 화신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임시직 화신!”
백강혁은 임시직이다. 수습 기간 중인 인턴이다.
아직 정규직원, 진짜 화신이 아니다. 분명하다. 민이 아는 유승우라는 사람은 계약을 그렇게 멋대로 체결할 사람이 아니다.
서명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백강혁은 임시직이 맞다는 뜻이고.
그것은!
“내가 첫 번째라는 뜻이지.”
엄밀하게 따지면 첫 번째 화신이 아니라 두 번째 화신이긴 하다.
검과 승리. 괴식의 신의 첫 번째 화신은 ‘설정’ 상, 승우 본인이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첫 번째 신명인 검, 검의 화신은 승우인 걸로 해야 한다.
백강혁에게 진실을 숨기려고 하다 보니 첫 번째 화신의 자리는 비워 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인 화신은 민이 백강혁보다 먼저다. 수습직과 정규직을 같이 보면 곤란하다.
“핫하-!”
민은 기쁨의 탭댄스를 췄다. 기쁠 때는 사람이 춤을 출 정도로 기분이 좋다는데, 이해 못 했었다. 하지만 오늘이 되어서야 그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사람은 기분이 좋으면 노래가 나오고 춤이 나온다.
“♪~”
민이 어깨를 들썩이면서 출근했다. 평소 가장 일찍 출근하는 그가, 아슬아슬한 시간에 도착했다.
이것만도 이상한 일인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회전문을 통과했다.
“허어, 로, 로또라도 맞으셨나?”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런 민의 모습에 경비병이 눈을 크게 떴고, 야근 중이던 황지현은 눈을 비볐다.
“응? 응? 민 씨가 맞는데.”
그렇게 한참을 콧노래와 어깨춤을 추며 출근하는 민을 본 황지현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밤샘 야근 적당히 하고 숙직실에서 자야겠다. 지치고 피곤하니까 헛것이 보이네.”
터벅터벅 숙직실로 걷는 황지현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거듭 말하지만 민은 화신이 됐다. 화신이 됐으니, 처음에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서 멈춘다. 그곳은 바로 백강혁의 집무실이었다.
문을 열고.
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 인턴 화신.”
당연히 처음 해야 할 일은 티배깅이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백강혁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뭐, 뭐, 뭐? 인턴?”
민의 말을 들은 백강혁의 얼굴이 알루미늄 캔처럼 뭉개졌다.
* * *
백강혁은 화신의 계약 당시의 기억이 없다. 술 꼴아서 자다가 일어나니까 이세계였고, 이세계에서 겁나 구르면서 퀘스트나 깨다 보니까 화신이 됐다.
어쩌다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화신이 됐는지는 자기도 정확하게 모른다.
아는 거라고는 양고기나 뜯고 있으니까, 신이 화신의 자리를 줬다는 거 정도.
“하지만 내가 인턴일 줄은 몰랐다고요!”
“아. 그래…….”
벌써 시간은 일곱 시가 됐다. 가게를 닫은 지 한 시간이나 지났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백강혁이 가질 않는다.
밥을 먹고, 혼자서 분노를 터뜨린다.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꼬장부릴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상식인인 민과 승우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한다. 승우가 영혼 없는 말투로 받아주니 백강혁이 다시금 분노를 토했다.
“제가 한 일이 이렇게 많은데! 이렇게 많은 공적을 올렸는데! 아직 수습이에요! 이게 말이 돼요?”
“으, 으음…….”
부정하기 힘든 일이다. 백강혁은 인간으로서는 조금 애매하지만, 화신으로서는 매우 유능하다.
화신의 업무가 신을 보좌하고, 신력을 벌어 오는 거라고 했을 때. 백강혁만큼 유능한 화신은 정말 몇 없다. 승우조차도 백강혁이 벌어 온 신력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벌어오는 신력이 크라이의 챔피언이 벌어오는 신력의 만 배가 넘는다던가…….’
크라이의 화신, 챔피언은 이미 죽었다. 임페리얼 오크의 침공 중에 윤은형이 마인화하여 단번에 베어 버렸다.
강한 힘 때문에 뽑은 챔피언이었나 본데, 신들 사이에서는 화신의 힘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강해 봐야 화신이고, 그 급에서 강한 거니까 힘만으로 신력을 벌어오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정치적이거나, 모략을 잘 짜는 화신이 선호된다.
백강혁의 정치적인 재능은 평범하지만, 행운과 미친 짓을 통한 버프를 고려한다면 단연코 현존 화신 중에서도 톱 클래스다.
“제가! 왜! 수습입니까!?”
“윽.”
“어떤 블랙 기업도 이렇진 않아요! 자, 봐요, 봐! 이게 고용노동부가 제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이에요. 뭐라고 적혀 있나요!”
“어디 보자…….”
– 근속 기간 3개월이 넘은 자, 앞으로도 1년 이상 지속될 것이 예상되는 직종의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을 의무화함.
새롭게 개정된 고용노동부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다. 승우는 자신이 알던 것보다 완화된 정책에 조금 감동했다.
“와, 예전보다 좋아졌네.”
“지구는 항상 좋아지고 있죠. 봐요, 봐! 3개월 이상 근속하면 정규직으로 바꿔 줘야 하잖아요! 거기다가 여기 봐요, 여기!”
“어디 보자… 여긴.”
백강혁이 손으로 짚은 곳에는 특별 추가 조항이 적혀 있다.
“생명과 안전 관련 업무는 수습 없이 무조건 정규직으로 고용.”
“화신 일만큼 생명과 안전이 중요한 업무가 있어요!? 틀려요?!”
“으음, 그 밑에 있는 간헐적 업무 종사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에 제외된다는 규정이 있는데.”
“꾸짖을 갈(喝)! 24시간 연중무휴로 봉사하는 제가 무슨 간헐적 업무 종사입니까!”
그것도 그렇다. 이놈은 진짜 24시간 중 24시간을 일한다.
백강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전환 예외 규정이라고 해 봐야, 60세 이상의 고령자! 휴직 대체 보충 근로자! 실업 복지 대책 근로자가 전부잖아요! 내가 어디에 해당돼서 정규직 전환이 안 되는 건데요! 60세 이상 고령자는 싸장님이지 제가 아니에요!”
“거기서 나이를 들먹이네.”
“에이씨. 해명을 하란 말입니다. 해명을! 알아들을 수 있게!”
“으.”
“해명을 못 하면! 정규직으로 승격시켜 주던가요! 싸장님이 첫째 화신이잖아요! 선임이잖아, 선배잖아! 예쁘고 귀여운 후배의 인권을 챙겨 줘야 할 의무가 있잖아!”
급기야는 바닥에 들이 누워서 등으로 바닥을 청소한다.
이미 나비가 깔끔하게 청소하고, 잔 때도 영식이가 녹였기에 바닥은 반질반질하다. 그러니 옷이 더럽혀지진 않겠지.
힐끔, 바닥의 상태를 확인한 백강혁이 깨끗한 걸 알고 더 격렬하게 발버둥 쳤다.
“이 교활한 놈. 바닥 확인하고 뒹구는 거보소…….”
“아무튼! 해명하라아아! 해명하라! 부당고용계약! 해명하라아!”
승우는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할 말은 참 많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백강혁이 믿는 신은 승우 본인이다.
‘정식 화신 계약을 하려면, 얼굴을 보고 서명을 해야 한단 말이다.’
마법적인 계약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 진명(眞名)을 알고, 서로의 진실된 모습을 보이고, 언령으로서 계약을 확인하고, 귀로서 통하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서 화신의 서에 서명을 적어야 완료된다.
거짓이 섞이면 계약은 완료되지 않는다. 신력으로 얼굴을 바꾸고, 모습을 바꾸고, 존재를 바꾸면 화신의 서는 변질된다.
거짓으로 점철된 계약은 어떠한 효력도 보이지 않고, 존중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승우는 백강혁과의 계약을 가계약으로 체결했다.
‘애초에 수습이라고 해도 말이지. 별로 다르지도 않는데…….’
가계약과 계약의 차이는 신의 본질을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의 차이 정도다.
힘도 혜택도 전혀 다르지 않다. 수습이니 인턴이니, 정규직이니 진짜 화신이니 해도 실은 다 같다. 그래서 아무런 대비를 안 했는데.
‘설마 민이 티배깅을 할 줄이야.’
그 냉정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민이 설마 백강혁에게 그렇게 도발할 줄은 몰랐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다. 민은 착해서 평소에 백강혁에게 당한 것을 담아 두다가 그만 폭발한 것이다.
우리 순둥이가 그럴 리가 없지. 우리 애는 착해서 사람을 안 물어요. 분명히 평소 백강혁의 행실이 나빠서 물린 거다.
‘아.’
승우는 어딘가 그릇된 대형견 사육사 같은 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쨌든 물은 엎질러졌고, 수습은 해야겠다. 그래서 살짝 손을 올리며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였다.
승우의 기감을 뚫고, 공간 장악력을 뚫고, 한 사내가 백강혁의 머리 쪽에 나타났다.
“불공정한 계약에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 찾아왔도다.”
그것은 테오였다.
테오를 보자마자 승우가 눈가를 구겼다.
“야,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갈등. 침묵의 노조, 고통받는 서민의 애환은 혁명의 훌륭한 연료지. 그들의 분노는 의분이 되어 하늘을 붉게 물들이리. 푸른 하늘은 죽고(蒼天已死), 붉은 하늘의 시대가 온다.(赤天當立). 일어서라 비정규직이여!”
“너까지 나오면 일이 복잡해진다. 빨리 가라, 빨갱아.”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테오까지 왔다. 일이 더 복잡해진다.
테오라는 놈이 끼어들어서 일이 정리되는 적이 없다. 무조건 일이 더 어려워진다. 엉킨 실타래처럼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녀석이다.
테오가 팔짱을 꼈다.
“네가 빨리 가라고 하면 나는 절대 안 가지.”
“아, 제기랄.”
명령어로 말하면 말을 안 듣는다. 저것은 징크스나 습관이 아니라, 병이다. 그것을 잠깐 잊고, 명령어로 말해 버렸다.
승우가 아차하고 혀를 차는 사이에 강혁이 테오에게 인사했다.
“혁명의 신님. 그때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연봉 올랐어요.”
“너의 혁명이 올바르게 보답받은 것으로 나도 보답받았으니, 감사의 인사는 필요 없다.”
“어떻게 그렇게 멋있는 말씀을!”
“혁명이 좀 멋있지.”
“그럼 혁명의 신님. 제게 뭐 조언할 게 있나요? 혹시 예전처럼 일단 다 불태워 버리고 부수면 되는 걸까요?”
“그건 하지 마. 절대 하지 마.”
테오가 정색했다. 혁명과 반역의 신이라고 해도 선은 있다.
승우에게 그 짓 했다가는 별 모양으로 썰린다. 계란을 존나 세게 던져서 바위도 뚫을 수 있는 테오였지만, 아무래도 벙커는 못 부순다.
긁어 부스럼. 건드렸다가는 진짜 뒈지는 수가 있다. 친구 부활 찬스도 한계가 있고, 친구 면책 특권도 횟수 제한이 있다.
2층에서 자고 있는 꼬마 애나, 아일루로스, 슬라임에게 생채기라도 생기면 테오는 저 하늘의 별이 되어 혁명의 자리 따위가 되고 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있다.”
“고견을 들려주십쇼.”
“혹, FA라는 말을 알고 있느냐.”
FA, Free Agent.
자유계약선수제도.
야구에서 즐겨 쓰이는 말로, 선수가 팀과 자율적으로 계약하는 제도다. 백강혁도 당연히 알고 있다.
“알죠. 아, 설마?!”
“그래. 그 설마다.”
테오가 양손의 엄지를 세웠다.
“화신 FA 선언을 해서, 새 신을 찾아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