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arre Restaurant RAW novel - Chapter (612)
괴식식당-612화 (외전 2)(612/613)
외전. 2화 – 둥지 짓는 드래곤 (2)
지구권 전역을 덮은 제2차 대재앙 당시, 과연 게르니아의 주민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예예.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미스 제로, 국가 공인 엘프 명장인 알리스터. 영광스러운 게르니아 입주자 1호. 세계수 전담 관리사 겸 대장장이인 그녀는 놀랍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전쟁이 나든. 재앙이 닥쳐오든. 게이트가 브레이크하건, 상공에 마계 직통 게이트가 열려 악마의 대군단이 몰려오든 게르니아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다.
그래서 그냥 몰랐다.
그래서 그냥 평소처럼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세계수를 손질하고, 밥을 먹고, 대량 구매해 두어 넘쳐나는 재료로 병장기를 만들고, 다시 밥 먹고, 잤다.
세상이 멸망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며칠 전이다. 황당해서 꺼 두었던 폰을 키는 순간 날라 온 긴급 소집 문자만 천 건 이상.
그녀는 엘프이기 이전에 귀화 서류에 서명한 지구인이었기에 지자체에 소속되어 있었다.
크게는 한국이었고, 작게는 서울이었으며 더 작게는 최고의 장인이 모여 구성된 크리스털 밸리의 소속이다.
크리스털 밸리의 장인들은 ISAC와 한국의 지원을 받아 평소 창작 활동에 전념하는 대신 유사시에는 협조해야 할 의무사항이 있다.
지금은 게르니아에서 먹고 자고 하고 있지만, 본래 소속은 크리스털 밸리다.
지금의 그녀는 초장기 휴가를 내고 게르니아에서 쉬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초비상 사태에서 잠수를 탔으니 위원회로 끌려가서 코로 설렁탕을 먹어도 변명할 말이 없는 상황!
그리고 시국이 안 좋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벼르고 있었다.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장인 놈들에게 족쇄를 채울 기회를!
서울 대법원은 벼르고 있었다.
탈법과 위법을 오가면서 위험 물자를 몰래 다루는 장인에게 일벌백계할 기회를!
ISAC는 벼르고 있었다.
소집에 응하지 않는.
건방진 놈을 후려칠 기회를!
하나에게만 찍혀도 인생이 고달파지는데 셋에게 찍혔다.
운이 없었다. 이제는 정말 끝장인가 싶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게 유승우였다.
[그녀에게는 제가 따로 부탁해 둔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번만 넘어가지요?]한국 정부와 서울 대법원과 헌협의 입이 조개처럼 꼭 다물어지는 것에는 2분이 필요 없었다.
넘어가졌다. 거짓말처럼 쉽게 넘어가졌다. 막대한 배상금이나 문책은 없었고 5,500자의 반성문 한 장으로 끝났다.
알리스터는 고마웠지만, 고맙지 않았다. 유승우가 싱긋 웃으며 바로 말했기 때문이다.
[이거 빚으로 달아 둔다?]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짜는 없으니 일로 갚아야 한다.
“강혁이가 둥지를 짓고 싶어 하는데 도와줘.”
“잠깐. 난 프로다. 도와주려고 해도 보수가 있어야 도와주지.”
“응. 그래. 공짜로 해.”
말끝이 해로 끝난다.
이젠 부탁도 아니고 명령이다.
하지만 목줄을 잡힌 알리스터는 거부할 방도가 없었다.
“크흑… 알았다.”
노예 1호.
미스 제로 알리스터, 합류.
* * *
게르니아에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자는 또 있었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다. 그는 자신의 본거지인 렘노스섬에서 게르니아로 이사를 감행했다.
화산의 고열을 사용한 제련법은 이제 구식이라 태양열 가공이 더 친환경적이며 피부 미용에 좋다는 이유가 첫 번째였고, 밥 먹을 곳이 가깝다는 이유가 두 번째였다.
그렇게 이사를 온 건 참 좋은 일이었다만, 문제가 있다.
“한가하군.”
렘노 섬에 있을 때는 하루가 멀다고 방문자가 백 명은 왔다. 검을 받고 싶은 용사 꿈나무들, 수행은 쥐뿔만큼도 안 하면서 템빨로 강해지고 싶은 마음을 품고, 아닌 척하는 생식 애호가. 날로 먹는 걸 좋아하는 싹수 없는 것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을 품은 신이 수도 없이 왔다.
놈들을 추리고 추려서, 그나마 괜찮은 놈들에게 가끔 무구를 선물하는 게 헤파이스토스의 취미였다. 하지만 이사를 온 후에는 그런 방문객이 뚝 끊어졌다.
용사들은 멀어서 못 오고 신들은 무서워서 못 온다.
‘이곳. 검신의 차원에 방문해서 칼 좀 주세요, 하는 배짱이 있다면야 배짱만으로도 합격이지.’
구르는 바위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평생을 수련한 장인의 솜씨도 쉬면 녹이 슨다.
대장장이의 신명은 노리는 자가 많다. 잠깐이라도 쉬면 차순위 경쟁자가 바로 치고 올라온다. 그래서 소일거리 삼아서 영식이를 위한 마법 무구나, 은하를 위한 마법 무구와 나비를 위한 마법 무구. 가끔 가게에서 밥 먹고 있을 때 몇 번 마주친 황씨 처자를 위한 마법 무구 따위를 만들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러니 승우가 건넨 ‘한가하지?’라는 말에 ‘한가하오’라고 밖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백강혁의 둥지 짓기 계획에 단숨에 두 명의 전문가가 붙었다.
헤파이스토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대형 건축물 작업도 이번이 두 번째이니 더 잘할 수 있겠군.”
“협업도 두 번째고 말이지.”
알리스터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굉장히 꽁한 얼굴이다. 물론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알리스터는 건축가라기보단 대장장이다. 건축가는 부업조차도 못 되는 일종의 곁다리에 가깝다. 그런데도 자꾸 일을 시키니 입술이 삐죽 나올 만도 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헤파이스토스는 이 어린 대장장이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이게 다 경험이라고 생각해야 하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않소.”
“우, 꼰대 냄새. 하지만 대장장이의 신으로서 건네는 조언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쉽게 무시할 수는 없지. 알았어.”
“음. 좋소.”
“그런데 짓는 사람은 우리 둘이 전부야?”
건물을 짓는 건 신으로서 보통 일이 아니다. 측량, 설계는 둘이서 할 수 있다. 하지만 작업 단계에서는 많은 인력과 물리력.
즉 노동력이 필요하다. 굴착기도 필요하고, 기중기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런 귀찮은 것 대신 더 포터블하며 편리한 녀석을 썼었다.
“그 아레스라는 녀석은 없어?”
(구)전쟁의 신이자 현직 굴착기 겸 기중기. 아레스!
아레스 하나만 있으면 공사장의 인력 부족이 해결된다. 녀석은 혼자서 3톤짜리 철골도 들어 올리며 아주 세밀한 작업도 가능.
심지어 미장이까지 가능한 전천후 공병이다. 알리스터가 만약 무인도로 끌려갈 때 소지품을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기꺼이 아레스를 선택할 만큼 놈은 유용하다.
기대감에 물었으나 헤파이스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레스는 지금 입원 중이오.”
“아니, 웬 입원? 걔도 신 나부랭이잖아.”
“그게 참, 눈물이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있소.”
제2차 대재앙에 맞서 제우스는 지구인 최우수로서 싸웠다. 그리고 아레스는 최우수의 팬클럽인 베스트 오브 베스트의 회장으로서 최우수의 지휘를 받아 싸웠다.
회장답게 웹사이트에서 싸운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튀어오는 현장에 달려가서 쌍검 들고 칼춤을 췄다. 썩어도 준치라고 나름 칼밥을 먹은 그였기에 적잖은 활약을 했고, 소소하게나마 팬클럽의 인원을 확충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좋은 이야기잖아. 뭐가 문제야?”
“문제는 그렇게 설치다가 크게 상처를 입었다는 거요.”
재해복구 지역 A섹터, 현 서울 상공에 열린 게이트는 보통의 게이트가 아니다.
악마들의 총공세, 악마가 악마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한 찬탈의 게이트였다. 거기서 나오는 악마들은 어마어마하게 강했고 수가 많았다. 아레스라고 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많았다.
“다쳤으면 금방 신력으로 회복하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레스는 신력이 없소.”
“없어? 아예?”
“아레스의 신력 계좌는 10P 이상이 적립되면 바로 검신에게 자동 이체되도록 등록되었는지라. 놈은 정말 신력이 한 푼도 없소. 뭇 신 중에서 놈보다 가난한 신이 없어서 ‘가난뱅이의 신명’이 생성될 뻔한 적도 있지. 기를 쓰고 거부하는 중이라던데…….”
“…….”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소.”
아레스는 부상을 고칠 방도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레나토의 광범위 부활 기적을 믿고 죽었다가 살아나고 싶었다만, 저 광범위 부활 기적은 어디까지나 인간 한정의 부활 기적이다.
아레스는 아무리 신명을 잃었다고 해도 일단은 필멸자가 아닌지라, 부활의 대상자가 되지 못했다. 즉, 개죽음만 당할 가능성이 너무나 컸다.
“그런 이유로 지금 중환자실에서 요양 중이오.”
“인연이 있으니 문병이라도 한 번 가야겠네. 걔 과일 좋아해?”
“내가 그놈 취향을 어찌 아오.”
“그래도 노동력으로 그렇게 부려 먹었으니 문병은 가야지.”
“됐소. 놈 때문에 오쟁이 지게 된 것도 억울한데 무슨 문병.”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가정사라면 끼어들지 않는다. 그게 프로다. 알리스터는 헤파이스토스가 건넨 도면을 받았다.
“나로서는 더하고 뺄 게 없는 도면이네. 이대로 만들면 되겠다만, 역시 노동력이 문제네. 그건 어떻게 해결할까?”
“어떻게 해결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검신이 이리 말하면 알 거라고 하더군.”
“뭐라고?”
* * *
“용의 둥지를 짓는 자는 당연히 용이지 않겠나.”
“엑? 싸장님. 제가 지어야 해요?”
“응. 원래 용의 법칙이 그래.”
승우가 싱긋 웃었다. 용은 아주 부모와 자식 간의 우애가 끈끈하다. 태어난 이후로 성룡이 될 때까지 부모의 둥지에서 애지중지 키워진다. 하지만 그건 용이 성룡이 될 때까지다.
“성룡이 되면 둥지를 떠나야 해.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둥지를 지어야 하지.”
“이의 있습니다. 제가 용이긴 한데, 일단은 지구인이거덩요? 꼭 용의 법칙을 따라야 할까요.”
“맞아. 그건 그래. 하지만 근데 그럼 너 사람 사서 작업할 거였어?”
“우, 우우.”
백강혁은 절대로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보기보다도 자신의 영역이 확고한 사람이다.
집 같은 내밀한 장소는 몇몇 한정된 사람. 민이라던가 아레스라던가 황지현 말고는 죽어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냥 집도 그런데 앞으로 편하게 있을 둥지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절대로 싫다.
거기다가 백강혁은 예술가적인 면모도 있는데 자신의 작업물에 타인이 간섭하는 걸 죽도록 싫어한다. 자기가 지을 집에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해? 못 참는다.
둥지 건설 작업에 참가하는 사람이 전문가 중의 전문가. 백강혁 이상의 능력을 갖춘 헤파이스토스와 알리스터이기에 용납할 수 있지. 다른 이는 싫다.
“으, 그러네요. 사람 사서 할 수가 없네요.”
“그럼 네가 해야지 별수 있겠냐.”
“그냥 아레스를 치료해 주면 안 돼요?”
“농담이 심하구나.”
“넹. 죄송합니다.”
백강혁은 4 용사 중에서 셋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승우의 화신이었으며 한때 테오의 화신이기도 했고, 크라이의 제자이기도 했다.
승우는 과거의 일을 거의 입에 담지 않았지만, 테오와 크라이는 종종 과거의 일을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때마다 올림포스 신들의 악행을 읊어 주는데 듣고 있는 백강혁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할 만큼 악독하고 사악하며, 치졸한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려두고 있는 게 용하다. 자신이었으면 진짜 곱게 갈아서 탄산수에 타서 마셨을 정도의 악행이다.
“그럼 일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서울시 외곽에서 5미터짜리 짜리몽땅한 용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진 건 그날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