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0)
1000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17)
“맹주님 오셨습니까.”
“음.”
“앉으시지요.”
느닷없는 공공대사의 등장에도 제갈문호는 놀라지 않았다.
제갈아연이 서둘러 차를 내온 후 집무실에서 나갔다.
공공대사는 탁자 위에 찻잔이 놓일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갈문호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담담하고 여유롭다. 천하의 무림맹 총괄 군사라도 지금 공공대사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긴 힘들었다.
“드시지요.”
“나쁘지 않소이다.”
순간 다향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공공대사가 찻잔을 들며 덧붙였다.
“나쁘지는 않지만, 너무 위험해 보이는구려.”
그제야 제갈문호는 공공대사가 하는 말이 연호정에 관련된 사안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위험하지요.”
“내, 군사께서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거라 믿고 달리 묻지를 않았소.”
“예. 알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같소. 그것은 내가 맹 내 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님을 군사께서도 아실 게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소부주가 벌인 일은 필경 군사에게 허가를 받았기에 벌어졌을 테고, 조금 전 소부주가 남궁세가 측으로 향한다는 보고를 들었소.”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저도 맹주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들었습니다.”
담담히 제갈문호를 보던 공공대사가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시지도 않고 내려놓는다. 그리 표정이 풍부했던 공공대사의 얼굴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세상 어떤 고수가 앞에 있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제갈문호였지만, 공공대사의 이러한 모습 앞에서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군사.”
“예, 맹주님.”
“공포를 드리우려 하오?”
이것이다.
공공대사가 단순히 무공이 강하고 인품이 좋은 것만이 아니라, 누구 못지않게 뛰어난 안목을 지녔다는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갈문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떤 불호령이 떨어지더라도 감수하리라.
제갈문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역할은 내가 하리다.”
“……예?”
“내가 하는 것이 맞소.”
“매, 맹주님.”
제갈문호는 드물게 당황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군사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소부주의 행동을 보고 난 연후에 깨달았소. 이 사태를 유연하게 처리하려 했다면 소부주가 직접 적창문으로 향하지는 않았겠지.”
“…….”
“맹주는 바뀔 수 있소. 그러나 군사는 바꿀 수 없소. 그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한 말이오.”
“맹주님. 하지만…….”
“맹주위(盟主位)는 그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아니외다. 그저 군림하기 위한 자리도 아니오.”
공공대사의 눈빛은 깊고 선명했다.
“책임을 다하는 자리외다.”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미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괜스레 울컥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안 됩니다, 맹주님.”
“…….”
“맹주님께서는 무림맹의 주인이요, 흑백 연합의 두 축 중 하나입니다. 그런 분께서 이런 오명을…….”
“오명이라 하셨소?”
순간 공공대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게 있어 오명은, 내 아랫사람 몸 상태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굴렸다가 나중에 사람 관리 못 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오.”
“……!!”
“군사의 몸이 많이 약해졌음은 알았소. 하지만 그 정도인 줄 알았다면, 내 모든 걸 걸고서라도 다 나을 때까지 쉬게 했을 것이오.”
“……맹주님.”
“모용가주가 설명해 주더이다.”
제갈문호가 이를 악물었다.
“모용가주는 내게 화를 냈소. 솔직히 맹주라서 참은 거지, 그조차 아니었다면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요.”
“그 정도로…….”
“그리고 모용가주의 분노는 당연하오. 누군들 화가 안 나겠소?”
“맹주님.”
“결과적으로는 내 잘못이오. 내가 더 살피고,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소. 하지만, 군사께서 본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면 내게 언질 정도는 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오.”
공공대사는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담담한 얼굴로, 담담한 목소리로 내는 화라서 더 무섭고 강렬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그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제갈문호에게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그저 약간의 서운함이 있을 뿐이었다.
“서로가 책임을 지려 하면, 그 조직의 앞날은 찬란할 것이오. 그러나 제대로 된 대화가 없다면, 각자가 잘해도 언제고 무너지게 마련이오.”
“…….”
“우리 서로 많이 얘기하고, 많이 책임집시다.”
떨리는 눈으로 공공대사를 보던 제갈문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맹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는 내가 구해야 옳소.”
빈승이 아니라 나다. 그 표현만으로도 공공대사가 이 일로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품에서 붉은 천으로 쌓인 물건을 내밀었다.
“받으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맹주 명령이오. 이 자리에서 드시오.”
“맹주님?”
“어서.”
가만히 공공대사를 보던 제갈문호가 천을 풀었다.
천 안에는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는 금빛 단약 하나가 있었다.
“이것은……?”
“드시오.”
가만히 공공대사를 바라보던 제갈문호가 단약을 입에 넣었다.
단약은 혀에 닿자마자 마치 물처럼 풀어졌다. 입을 제때 다물지 않았다면 금빛 액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단숨에 약을 삼킨 제갈문호.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약력이 강한 것이지만, 본사 약제원주가 직접 다뤄서 힘은 대부분 간직한 채 부작용만 최소화한 소환단(小丸丹)이오.”
순간 제갈문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 소환단이었습니까?!”
“내력 증강보다는 원정을 보하는 데에 특화된 놈이오. 달리 운공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활력이 돋을 것이외다.”
“맹주님……!”
이 귀한 것을 어찌 내게 주었냐고, 제갈문호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감격한 눈으로 공공대사를 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공공대사가 한층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군사가 말해 주지 않길래, 빈승 또한 맹 내의 이런저런 일들을 조사해 보았소.”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린다.
제갈문호는 격동하는 마음을 다스렸다. 할 일이 없어 보여도 맹주 역시 바쁘다.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예.”
“조사를 하다 보니 또 한 번 깨달았소. 군사께서 많이 지쳤다는 것을.”
“예?”
공공대사가 품에서 작은 문서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읽어 보시오.”
제갈문호는 곧장 문서를 펼쳐 읽었다.
잠시 후.
“…….”
제갈문호의 눈빛이 돌변했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과연, 군사께서는 일련의 정보만 보고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는구려.”
“이것은 설마…….”
“군사부의 정보원들은 그 수가 많고 정예화되어 있어서, 맹 내보다 맹 외의 일에 더 힘을 쏟고 있소이다.”
그렇다고 군사부 정보원들이 일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업무 능력만 보면 개방에 비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그들이었다.
다만 더 특화된 장기가 무엇이냐, 어느 곳을 더 제대로 분석하는가의 차이일 것이다.
“후개의 명을 받아 직접 내게 정보를 물어다 주는 이들이 있소. 본사와 연관된 문파원들도 있고. 그들의 정보들을 하나하나 걸러서 받은 것이오.”
“이것은……!”
“만약 군사께서 체력적으로 굴강했다면, 분명 놓치지 않았을 부분이외다.”
지금은 실수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었다.
제갈문호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설마, 호정을?”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문호가 이를 악물었다.
“이런 멍청한……!”
그가 욕하는 대상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이럴 수가…… 내가 왜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던가.”
“결과적으로 놈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예상하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소. 다만 미리 알아차렸다면 소부주에게 곧장 적창문으로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있었겠지.”
“이럴 때가 아니로군요. 어서 호정에게……!”
황급히 일어난 제갈문호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미 일은 벌어졌소.”
“대비를 해야 합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
“예?”
“모용가주가 데리고 온 세작 색출 부대를 지금 당장 운용해 봅시다.”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게 되면, 호정은 계속 고생하게 됩니다.”
“알고 있소.”
“맹주님?!”
공공대사가 눈을 감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립시다. 내가 책임을 질 수 있을 때까지.”
“……!”
“그리고 소부주 역시 지금쯤 이 사태의 본질에 접근했을 것이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때를 봐서 사람을 풀어 소부주에게 사실을 확인시켜 줘야겠지.”
공공대사가 창밖을 보며 한숨을 토해 냈다.
“우리도 준비를 합시다. 찢겨 나갈 준비를.”
* * *
연호정이 남궁세가의 거처 앞에 도달했을 때.
“…….”
걸음을 멈춘 연호정이 남궁세가 앞을 가로막고 선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진양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야, 시발…….”
무려 백여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무장을 한 채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성천의 일인이니까.
그러나 모두에게서 적의(敵意)라는 한 가지 마음이 분명하게 읽혔다. 눈빛에서, 기도에서 솔직하게 드러났다.
진양이 연호정에게 속삭였다.
“뭐요, 이거? 뭔가 좆 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뭐긴. 내가 느낀 불안감이 사실이었다는 거지.”
“그 불안감이 대체 뭐요?”
연호정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기감을 확장했다.
“……차라리 다행이군. 검제와 도제 어르신은 안 계시는 듯해.”
“무상들은 죽이 맞아서 대별산맥 너머로 수련하러 갔다고 하오. 무슨 일이 터지면 부르라고 했다던가.”
“무상이라는 직위가 그렇지. 소속되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야.”
“그런데 그 불안감이 뭔지 정말 말 안 해 줄 거요?”
“응.”
“퉤.”
눈을 뜬 연호정은 다시 한번 무사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저 항요처럼 불순한 의도를 지닌 이들도 있었다. 세상일을 주도하고 싶은 자들, 그 욕망으로 움직인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의 행동이 옳은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신념이 보였다. 유약한 주관을 파고들어 단단하게 봉합된, 악의 넘치는 선동에 의해 탄생한 신념이었다.
연호정은 문득,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이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것은 곧 흐름을 만드는 핵(核)이야. 그리고 너는 그 몇 안 되는 핵 중 하나다.’
‘다른 놈들은 됐다. 어떻게든 저 도끼부터 죽여야 한다. 저놈이 이 병력의 핵이야.’
‘현 무림맹의 핵심 고수 중 하나이자 유군 부대의 수장을 묵룡부로 파견 보내야 할 상황이야. 묵룡부주에 관해서만큼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도 알아 둬야 하네.’
‘자네야말로 무림맹 정치판의 핵이었군.’
‘너다. 바로 네가 당대 강호의 중심이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 어느새 그는 강호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 전쟁에서, 이 세상에서 누구와도 비견되기 힘든 태풍의 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려놓으니 비로소 하늘이 보이는구나.”
담담한 목소리로 하늘의 비정함을 비난해 본 연호정이 다시 고개를 내렸다.
숨 막히는 대치.
‘기어이 흑돌만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면야.’
한참 동안 그들을 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비켜라.”
스륵.
무사들이 도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다 댔다.
담담했던 연호정의 얼굴이 일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비키라 하였다!”
쿠르릉!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터져 나오는 일갈에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드리워졌다.
“지금 이 시간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씨 성을 버리겠다! 오로지 차기 흑도 연맹의 총수로서 말하니, 감히 내 앞길을 막는 자는 지위 고하 이유를 막론하고 쓰러트리겠다!”
콰르르릉!!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기파가 온 세상을 뒤덮을 듯했다.
쾅!
광룡부가 지진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명한다.”
무사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창백해졌다.
무지막지한 살기의 폭풍 앞에 절반 이상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전부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