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3)
1003화. 심연으로 (3)
악마라…….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연호정은 남궁인의 얼굴을 보았다.
핏발 선 눈. 창백한 안색.
골격은 평범했지만, 탄탄한 근육을 숨기고 있던 몸은 상당히 쪼그라들었다.
독에 당해서 쪼그라든 게 아니다. 식사를 걸러서 근육이 빠진 것도 아니었다.
이건 전적으로 정신적 충격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제 연호정은 인체에 대해 누구보다도 빠삭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황룡을 깨우치고 난 뒤부터 신체가 어떤 작용으로 움직이는지, 사람 몸 안에서 얼마나 신비로운 물질들이 분비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정신에 강한 충격을 받으면,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청년이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남궁인의 몸도 그와 같다. 강력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으나, 초절정에 이른 내공조차도 신체의 급격한 변화를 막아 내지 못했다. 그 정도로 충격이 컸던 것이다.
가만히 남궁인의 몸을 살피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는 나를 알고 있군.”
“알고 있지. 뉘라서 자네를 모르겠나.”
남궁인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또는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자포자기했으며,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리라.
“자네에 대한 소문은 실제 벌인 일보다 많이 축소된 감이 있지. 그것만으로도 자네의 유명세는 중원 제일을 논할 만하네. 하기야, 그 연배에 성천에 이른 것만으로도 일대 기사라 할 만하지만.”
“…….”
“어쩌면 그자의 말이 맞는지도 몰라. 자네는 악마야. 악마 같은 재능과 신들린 안목으로 불과 몇 년 만에 천하의 판도를 뒤집어 버렸지. 누가 있어 그런 게 가능하겠는가. 이 끝이 안 보이는 천하에서 말이야.”
남궁인이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제 보니 손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공을 운용하면 그럴 일도 없을 텐데도.
달리 말하자면, 내공을 운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호정이 말했다.
“술은 그만 마시지.”
“술조차 마시지 않으면 이 정신을 붙들기 힘들다네. 자네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내 정신까지 죽일 셈인가?”
“…….”
“내버려 둬. 자네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진 거야.”
“나 때문에?”
쿵!
거칠게 술병을 놓은 남궁인의 눈에 강렬한 질투와 깊은 분노, 끝이 보이지 않는 자괴감이 일었다.
“너 때문이야.”
말투가 바뀌었다.
“너와 엮여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내 딸도, 내 아들도, 나아가 본가도! 너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본가가 최고가 될 수도 있었어!”
“그런 말을 하기에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너무 많았지.”
“우리는 언제나 최고를 꿈꿔 왔다! 구주명가? 하! 천하제일가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했지만, 정작 역사 있는 가문과 문파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세력만 크다고 천하제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
“우리는 놈들을 무너트릴 수 있는 증거를 여럿 갖고 있었다! 언제가 그들을 밟고 비상할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전에 네놈이 나타났지!”
남궁인의 눈빛은 이제 숫제 광인의 그것이 되었다.
“그때부터다. 그때부터 네놈은 모든 걸 망쳤다. 네놈이 그리 강해지지 않았다면, 맹 내 사건들을 네놈이 전담하지 않았다면!”
“…….”
“네놈이 삼교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공유했다면! 그랬다면, 본가는 모두를 앞지르고 최고가 될 수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네놈이 최고가 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해.”
“너 때문이지!”
“아니, 세상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네놈의 안목 때문이지.”
남궁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연호정은 담담하고도 치명적인 어조로 말했다.
“구주명가를 무너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그런 준비는 모용세가도 했다. 하지만 남궁과 모용 둘 다 충분한 증거가 있음에도 곧장 터트리려 하지 않았지. 자신들이 최고가 될 판을 만들기 위함이었어.”
“그게 잘못이란 말이냐?!”
“너희가 제때 나섰다면 고통받던 사람들이 하루라도 더 빨리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들이 살 수도 있었지.”
“그것은!”
“나는 그저 행동했을 뿐이다. 어떻게든 놈들을 박살 내기 위해서. 너희처럼 음흉하고 제 생각만 할 줄 아는 놈들과 다르게 곧바로 움직였을 뿐이지.”
남궁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희생이라는 것은……!”
“퇴물이 다 됐다지만 마지막 선을 넘는 발언까지는 하지 마라.”
“뭐?”
“고통받던 사람들의 목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말하려던 거 아니었나?”
“……!”
“넌 한 가문의 주인으로서도, 백도 정파의 무인으로서도 실격이야. 흑도에도 너 같은 위선자는 많지 않아.”
“이……!”
“꿈은 누구나 꾼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생명을 지닌 모든 이의 특권이지. 하지만 넌 남 탓만 하는군. 악행만을 이어 온 모용가주가 오히려 너보다 훨씬 더 대단한 남자다. 방향은 틀렸을지언정 그는 언제나 자신의 삶에 열정적이었어.”
남궁인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연호정 자신에 빗대서 말하는 게 아니라 모용가주에 빗대서 말한다. 그래서 더더욱 가슴에 비수가 박혔다.
“최선을 다해 보고 안 되면 포기하는 것도 인생이다. 그 끝을 죽음으로 둔다면, 죽을 때까지 노력해 보는 것도 인생이지. 넌 포기할 줄도 몰랐고, 끝까지 노력도 안 해 본 주제에 세상일이 쉽게 안 풀렸다고 떼를 쓰고 있다.”
“…….”
“그리고 나는, 인생을 살 줄도 모르는 머저리의 화를 받아 주러 온 게 아니야.”
툭. 툭.
연호정의 검지가 탁자를 두들겼다.
“나는 무림맹에서 일어나는 일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너를 찾아왔다. 내 목적은 오직 그것 하나야. 쓸데없는 헛소리나 늘어놓을 생각이라면, 더 이상 너에게 볼일이 없어.”
남궁인의 호흡은 무척이나 거칠어져 있었다.
감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말을 해 봤자 자신만 손해다. 반박할 수가 없으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그는 반박이 될 만한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화는 나는데 풀 방법이 없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볼 생각도 없다. 그저 이 세상이 나를 위해 돌아갔으면 좋겠다. 내가 세상의 주인이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남궁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일로 대화가 될 수가 없는 이유였다.
“말해라. 남궁현은 어디 있나? 그 악마는 누구지?”
“…….”
“진흙탕에 뒹굴었대도 보석은 보석이지. 네놈이 그렇게 두려움에 젖어 미쳐 버리기 직전까지 갔다면, 당연히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어도 초절정고수급이라고 생각한다. 실력만 따지자면 말이야.”
“…….”
“맹 내 고위층이냐?”
“……큭큭.”
남궁인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연호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남궁인을 보았다.
한참이나 웃던 남궁인이 일그러진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네놈의 상상력도 빈곤하기 짝이 없구나. 고위층? 하! 악마에게는 무공 따위 아무 의미가 없다. 무공은 무공일 뿐이야. 무공이 삼류든 술법이 삼류든, 누구나 악마는 될 수 있다. 거기까지 도달하기가 지난할 뿐이지.”
기묘한 말이었다.
남궁인의 말은 곧, 그 악마라는 놈의 무공이 절대 강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저 ‘이해’했다고. 나는 그자에 대해 말할 수 없어. 말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도 잘 아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남궁인의 눈이 조금 더 충혈되었다.
“……너는 누구지?”
“……?”
“그 악마조차도 치를 떠는 네놈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냐?”
“대화가 안 되는군.”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인이 차갑게 웃었다.
“예상대로구나. 그 작자는 말했지. 네놈이 곧 내게 도달할 거라고. 하지만 캐낼 게 없음을 확신하고 금세 자리에서 일어날 거라고도 말했다.”
“한 번 봤다면서 참 여러 가지 얘기를 해 준 모양이군. 그래서, 내가 이다음엔 어떤 행동을 할 거라고도 예측했나?”
“……그자가 말하기를, 네놈의 사고 회로는 너무나도 독특하고 파격적이라 유추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더군.”
“칭찬인지 악담인지 모르겠구만.”
연호정이 정자 아래로 걸어갔다.
남궁인이 말했다.
“다만, 네놈에 대해서 아주 깊게 조사를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할 만한 파격적인 행동 몇 가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호정의 걸음이 멈추었다.
남궁인이 말을 이었다.
“그는 세 가지 경우를 말해 주었어.”
“뭔데?”
“첫째는 곧장 맹주에게 가는 것. 하지만 이건 너무 식상하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
“둘째는 모용가주가 데리고 온 세작 부대와 함께 맹의 상부부터 은밀하게 조사를 진행하는 것. 예전 세작을 잡을 때도 그런 방법을 택했으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직접 보고 대화를 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하였어.”
제법 으스스하군.
남궁인의 말을 들으며, 연호정은 꽤 놀랐다. 누군지 모르는 그 악마라는 놈이 자신의 행동 원리를 제법 잘 꿰뚫어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흥미가 돋았다.
“마지막 세 번째는 뭐지?”
남궁인의 눈이 깊어졌다.
“검제 남궁승을 찾아가는 것.”
“……!”
“가장 가능성이 큰 선택지라고 했지.”
연호정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실제로 그는 남궁승을 찾아가려 하였다.
검제 남궁승은 냉정하고 엄한 어른이었다.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맡긴 뒤로 가내 대소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직접 가인들을 다스리는 건 물론 자신에 대한 지지까지 해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연호정으로서도 가장 파격적이고 확실한 묘수가 바로 남궁승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볼 때는 절대 남궁승이라는 선택지를 떠올릴 수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 남궁승이 연호정을 배척할 가능성을 상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호정과 남궁승의 정신적 교류는 둘밖에 모르는 일이다. 그걸 꿰뚫어 봤다는 것은 안목이 엄청나게 예리하다는 뜻이다.
‘어?’
순간 연호정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모용가주와 세작 부대?’
모용가주가 세작 부대를 이끌고 온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맹주와 군사, 조금 더 넓히면 봉공들 정도?
그걸 안다는 것은 정보력 또한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과거의 일도 아니고 최근의 일이다. 세작 부대가 운용될 거라는 사실까지도 유추하고 연호정의 난입, 이후 그의 행동까지 꿰뚫어 본다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분석력과 정보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당대 강호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설마 개방에?’
사람 일은 모르는 것. 방주와 후개가 아무리 일을 잘 처리해도 휘하 방도들을 일일이 제어하지 않는 이상 무슨 일이든 터질 수 있는 게 이쪽 바닥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개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후보군에 올려놓을 수는 있지만, 그 확률이 낮다고 보았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단서를 준다면 누구나 개방을 지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남궁인과의 대화를 하나하나 복기하던 연호정은 문득 그가 묘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술조차 마시지 않으면 이 정신을 붙들기 힘들다네. 자네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내 정신까지 죽일 셈인가?’
정신까지 죽일 셈이냐는 그 말.
달리 말하면 몸은 이미 죽었다는 뜻이 된다.
연호정이 남궁인을 돌아보았다.
충혈된 남궁인의 눈동자는, 서글픔과 애환까지도 담고 있었다.
“너는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
“너……!”
주르륵.
남궁인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쿵!
탁자에 머리를 박은 남궁인에게서 생기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연호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심맥(心脈) 파열!’
스스로 내공을 이용해 생명의 맥을 끊어 버렸다.
자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