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4)
1004화. 심연으로 (4)
“뭐, 뭐야?!”
갑작스럽게 사라진 남궁인의 생기에 놀란 진양이 정자 밑으로 다가왔다.
“……!!”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탁자에 고개를 박고 쓰러진 남궁인. 고개가 이쪽을 향했는데, 부릅뜬 두 눈이 몹시 탁했다.
죽었다.
한순간 창백해진 남궁인의 낯빛은 누가 봐도 시체의 그것이었다.
“대장?”
“……빌어먹을.”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 각자 거처에 머무르란 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자연히 이곳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당사자들 외에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심맥 파열이라면 자살로 볼 수도 있지만, 체외에서 들어온 침투경으로 인한 파열로도 볼 수 있다. 상대에게 목을 잘라 달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스스로 심맥을 파열시켜 자살했는데, 이게 참 묘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한 방 먹었군.’
함정에 걸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것도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연호정은 남궁세가의 앞을 가로막은 반(反) 흑도파 무사들을 기파로 억압하고 들어와 버렸다.
그 행위 자체가 남궁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몰고 갈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아니래도 같이 있는 사람이 의심을 받는 것은 상식인데, 그간 벌인 일이 워낙 파격적이라 연호정을 향한 의심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올 것이다.
물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호정이 이런 무리한 방법을 쓰지 않고도 상대를 죽일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겠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도대체.’
어느새 정자 위로 올라와 남궁인을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
‘도대체 얼마나 벼랑 끝으로 몰렸기에 당신이 자살까지 하는 거지?’
남궁인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비교 대상들이 워낙 출중할 뿐, 그도 안휘의 패자로서 무림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그런 사람이 어떤 협박을 받았기에 칼 한번 섞어 보지도 않고 자살을 택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때였다.
‘……!’
연호정은 문득 과거 흑암제 시절을 떠올렸다.
왜일까? 느닷없이 터진 무시무시한 사건 속에서 갑자기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뭔가 비슷해.’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과거, 흑암제 시절에.
사건의 흐름도 다르고 사람도 달랐지만, 상황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닮은 일들이 세 건 있었다.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진양이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장. 어쩔 거요?”
머리 쓰는 일은 소정광에게 다 맡겼지만, 그래도 흑도에서 오랫동안 굴러 본 그였다. 애초에 멍청한 사람이 이 연배에 종사급 무력을 갖출 수도 없다.
그도 아는 것이다.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될지. 남궁인이 자살한 순간, 그들의 운명이 폭풍 속으로 휘말려 버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연호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생각에만 몰두했다.
진양은 한 번 더 재촉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지금의 그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진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호정은 처음 이와 유사한 사건이 터졌을 때를 떠올렸다.
‘환야.’
부모가 누군지 몰라 이름도 없었다며, 운이 좋아 무공을 배운 후 스스로의 이름을 환야라고 지은 무사가 있었다.
그는 흑제성 오대무신(五大武神)과 함께 연호정을 추종했던 무사였다. 오대무신 중 연호정의 호위장을 담당했던 남수활의(藍手活醫) 휘하의 무사로, 유쾌하면서도 책임감 넘치고 타인에게 헌신할 줄 아는, 흑도에서도 보기 드문 호인이었다.
그러나 환야는 흑제성이 세워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죽었다.
사유는 자살이었다.
자살하기 며칠 전부터 유독 몸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런 기억이 났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었지.’
환야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눈 밑이 거무죽죽했고 살도 많이 빠졌지만, 연호정은 단순히 무리한 업무로 인해 피로가 축적된 모양이라고 판단했다.
하여 남수활의에게 말해 휴가를 지시했고, 환야는 휴가를 얻었음에도 흑제성에서 지냈다.
그리고 휴가를 얻은 지 사흘째 되던 날, 그는 자살했다.
그야말로 느닷없는 죽음이었다. 연호정도 연호정이지만, 그의 상관이었던 남수활의는 엄청난 충격에 온종일 넋이 나갔었다. 그에게도 형제 같았던 부하였기 때문이다.
환야의 죽음은 연호정이 마지막 전투를 치를 때까지도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수수께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회, 왕무병.’
평회는 흑제성 창설 삼 년째 되던 해에, 왕무병은 사음교와의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열흘 전에 죽었다.
평회는 환야처럼 자살했고, 왕무병은 며칠 동안 술독에 빠져 살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실족사했다.
‘…….’
연호정은 눈을 떴다.
환야, 평회, 왕무병.
그리고 남궁인.
사건의 흐름은 다르지만, 왕무병을 제외한 셋은 모두 자살했다. 왕무병의 경우도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한들 그만한 무인이 실족사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 때문에 자살이니 암살이니 말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네 사람 모두 느닷없이, 뜻밖의 상황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왜지?’
환야와 평회, 왕무병의 죽음에 관한 수수께끼는 끝끝내 풀지 못했다.
워낙 바빠서 인력을 총동원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환야 때는 흑제성 정비에 총력을 기울일 때였고, 평회 때는 백도의 신흥 문파 정검방과의 이권 다툼 때문에 정보력에 공백이 생겼을 때였다.
왕무병 때 역시 마찬가지. 사음교와 전투를 치르기 직전이라, 적의 공작에 당한 건 아닌지 의심만 하다가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
‘아니, 그것도 아니었어.’
전쟁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흑제성을 만들기까지 숱한 피를 보았고, 흑제성이 만들어진 연후에도 셀 수 없는 전투를 치렀다.
결국 세 사람의 죽음도 그와 연관이 된 것이라고 보았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정신력이 튼튼한 사람도 뜻밖의 사건 사고로 자아를 상실할 만큼의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내 석연치 않았다.
풀 수 없는 문제라 놔두었을 뿐, 신경을 쓰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적어도 연호정은 그러했다.
결과적으로는 사음교주를 상대하다가 당관의 암기에 맞아 죽은 탓에 끝까지 미제로 남은 사건이 되었다.
‘설마, 남궁인도?’
지나친 비약이다.
연호정도 알고 있었다. 흑제성 시절 세 부하의 석연치 않은 죽음이 남궁인의 자살과 연관되어 있을 확률은 사실상 무(無)에 가깝다는 것을.
하지만 왜 이리 신경이 쓰일까?
실제로 주변에 자살한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떠오른 기억일까? 아니면 정말로…….
“대장.”
연호정이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뭔가 수를 내야 하지 않겠소?”
“……수라.”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잠시 기다려.”
연호정은 남궁인의 맥을 쥐었다.
방금 죽었는데도 벌써 생기가 거의 다 빠져나갔다. 사람은 죽어도 짧으면 반 각, 길면 일각이 넘도록 생기가 지속되기 마련인데 벌써 몸에 사기(死氣)만이 그득했다.
‘……!’
연호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진양. 남궁가주의 맥을 짚어 봐.”
진양은 곧장 남궁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
잠시 후.
“……뭐야?”
진양의 표정은 얼떨떨함 그 자체였다.
“이건 화기(火氣)잖아?”
화기에 당하면 마치 피부에 화상을 입는 것처럼 혈도와 맥에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남궁인의 끊어진 심맥 인근에는 화기의 흔적이 역력했다. 마치 열양공을 익힌 고수의 침투경에 당해 죽은 것 같았다.
“남궁세가에 열양공이 있었소?”
연호정은 대답 없이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한 전각을 바라보았다.
그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덜컹.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명의 고수가 정자를 향해 걸어왔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기척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절정고수였다. 무종을 눈앞에 둔 진짜 고수인 것이다.
빠르게 가주의 별실로 오던 그는 순간 멈칫했다. 남궁인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걸음을 더욱 빨리하여 정자에 도착했다.
“헉!”
남궁세가에서 제일을 논하는 무력 집단의 수장, 창천뇌룡단(蒼天雷龍團)의 단주 석정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가, 가주님?!”
연호정과 진양은 보지도 않는다. 서둘러 남궁인에게 다가간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가주님.”
멍하니 남궁인의 얼굴을 보던 석정필이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석정필의 몸에서 살기가 번지려 하는 순간.
후우우웅.
연호정의 손끝에서 올올이 풀려 나온 황룡기가 정자 주변을 에워쌌다. 석정필의 살기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한 것이다.
단 한 수만으로도 수준 차이를 그대로 보여 준다. 석정필의 기도가 마구 흔들렸다. 가주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 충격마저도 순간 잊게 될 만큼 연호정의 기공 능력이 엄청났던 것이다.
연호정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조용.”
“……?!”
“당신 하나만 부른 이유가 있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지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남궁가주는 자살했다.”
“뭐?!”
“스스로 심맥을 끊었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던 석정필이 조심스레 남궁인의 맥을 짚었다.
석정필의 눈이 충혈되었다.
“말도 안 돼! 가주님께서는 열양공을 익히신 적이 없다!”
“그저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지만, 굳이 당신을 부른 것은 가주를 제외하고 이곳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함정에 당한 것 같군.”
“그걸 말이라고……!”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요란하게 찾아와 대놓고 일을 벌이진 않았을 것이다. 내 무력은 그대도 알고 있겠지.”
순간 석정필은 주춤했다. 연호정의 말에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성적인 사고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지?!”
감정이 이성을 잡아먹었다.
당연했다. 누구라도 이럴 것이다. 만약 맹주인 공공대사가 이런 모습으로 발견됐다면, 연호정 역시 주변 사람부터 잡아들이고 봤을 것이다.
“할 말이 없다. 이제부터 남궁가주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움직일 테니, 세가 무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통제해 주길 바란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차아앙!
석정필이 검을 뽑아 그의 등을 향해 겨누었다.
“꼼짝하지 마라! 당장 그 자리에서 무릎을……!”
퍽!
“크윽!”
석정필이 손목을 잡으며 비틀거렸다. 그의 손목을 후려친 사람은 진양이었다.
진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해가 풀리길 바라겠소.”
“이, 이놈들!”
그렇게 연호정과 진양이 남궁세가를 나섰다.
문이 열리자, 좌우로 흩어졌던 무인들이 치욕 가득한 얼굴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연호정은 당당하게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연호정과 진양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 * *
“……하늘이 맑군.”
맑다고 하기에는 구름이 제법 껴 있다.
한참 하늘을 보던 사내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잘 가시오, 남궁가주.”
그때, 문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용가주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사내가 매무새를 바로 했다.
“들어오시라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