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5)
1005화. 심연으로 (5)
“뭐라고?!”
제갈문호가 벌떡 일어났다.
“남궁가주가 죽었어?”
“그, 그렇습니다.”
평소 냉정하기로 이름 높은 군사부 정보원조차 말을 더듬을 만한 일이었다.
남궁세가는 안휘의 패자임과 동시에 육대세가의 일각이다. 전성기 때는 천하제일세가라는 이름까지 붙었을 정도로 막강한 세를 자랑하는 명문가다.
남궁인이 가주가 아니래도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일인데, 심지어 가문의 주인이기까지 하니 이건 보통 사태가 아니다.
“어, 어떻게? 범인이 누구라더냐!”
“묵룡부 소부주, 연호정이랍니다.”
“……뭐?!”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아연이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불같은 면모가 있긴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다스린다고 장담할 만큼 연호정의 이성은 차갑다.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이 아니다. 제갈아연은 물론 제갈문호 역시 연호정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보원이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일단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소문이 들불처럼 거세게 퍼져 나가고 있어요. 남궁세가는 비상이 걸렸고, 소가주 남궁표가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합니다.”
“이, 이런…….”
“현재 내성을 넘어 외성까지 소문이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소문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순간 제갈문호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예?”
“남궁가주의 사망 시각이 언제지?”
엄청난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애써 냉정함을 지키는 그였다.
“미시(未時) 정(正)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반 시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 짧은 시간에 외성까지 소문이 번졌다고?”
“아!”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소문이란 여느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치명적인 전파성을 지닌다.
하지만 한나절도 아니요, 반 시진이 조금 넘은 사이에 무림맹 외성에까지 소문이 돈다는 것은 너무 지나쳤다.
“소문을 주도하는 자가 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
온갖 정보를 토대로 전략 전술을 짜는 군사의 눈으로 봤을 때, 이것은 절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제갈문호가 빠르게 말했다.
“무슨 사태가 벌어진 건지 면밀히 조사토록 한다. 형법당주에게 연락해서 곧장 남궁세가 영역으로 무사들을 파견하라 이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때였다.
“군사님!”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또 다른 정보원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반흑파(反黑派)로 분류된 이들이 내성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다 같이 모여서 맹주부로 향할 거라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뭣이?!”
소문의 확산도 엄청나게 빨랐지만, 반흑파의 움직임도 그에 못지않게 빨랐다.
남궁가주의 죽음은 반흑파의 불만에 불을 지피는 일이었다. 이성을 지우고 감성에 폭발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쾅!
탁자를 내리치는 제갈문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치솟는 울분을 참지 못했지만, 탁자를 내리치는 순간 그는 또 한 번 냉정을 되찾았다.
‘아무리 소문이 빨리 퍼졌다 해도, 반흑파 사이에서 여론을 모아 맹주부로 가겠다고 결의한 사고의 흐름은 정상적이지 않아.’
진정 연호정이 남궁가주를 죽였다고 한들 보통은 놀라서 남궁세가를 주시하거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는 보기 마련이다.
분노도 놀라움이 사그라들어야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는 법. 모습을 드러낸 분노가 쌓이고 또 쌓이다가, 이후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통상적인 여론의 모습이었다.
한데 한나절도 아니고, 하다못해 한 시진도 아니다.
고작 반 시진이 갓 넘었는데 벌써 행동에 들어갔다는 것은 중간에서 전략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주체가 있다는 뜻이었다.
“반흑파의 누가 제일 강하게 그 주장을 했다고 하더냐?”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솔직히 이 복잡한 상황에서 답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보원은 답을 갖고 있었다.
“청사자문의 문주라고 합니다.”
“뭐, 뭐라?!”
청사자문은 섬서에 기반을 둔 문파로, 화산파와 종남파를 제외하면 가장 유명한 문파라고 할 수 있었다.
청사자문 역시 흑도를 몹시 증오하는 문파였다. 말하자면, 평범한 백도 정파의 무사들보다 흑도와의 골이 더 깊다는 뜻이다.
그러나 청사자문의 문주는 단호하고 강력한 권법을 자랑하는 것과 달리, 신중하고 깊은 통찰력을 지닌 명사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반흑파를 선동하여 맹주부로 가자고 이끌었단 말인가?
“이런 미친!”
뭔가가 있다.
지독한 악의가 느껴진다. 눈살조차 찌푸려지지 않는 강한 악취가 났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제갈문호는 하나의 절대적인 전제를 세워 두었다.
연호정은 남궁가주를 죽이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 전제만큼은 절대적인 사실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제하에 생각하면, 이 일을 꾸민 배후는 너무나도 어중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상해요.”
어느새 충격에서 벗어난 제갈아연이 떠듬떠듬 말했다.
“이런 엄청난 짓을 벌여 놓고, 왜 이어지는 흐름이 이토록 허술한 거죠?”
정답이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천하의 남궁가주를 죽게 했다.
보통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연호정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웠으니, 결과적으로 계략 면에서 만점을 받을 만한 짓거리였다.
한데 그 뒤가 지나치게 허술했다.
연호정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으면, 그냥 그대로 놔두면 될 일이었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자연스럽고 확실하니까.
달리 말하자면 굳이 소문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빨리 돌게 하고 반흑파의 여론을 조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한데 이미 내리막길을 구르기 시작한 마차를 힘 좋은 장정들이 달려들어서 더 밀어 버렸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이건 마치 대놓고 흑막이 있다는 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그래, 그래서 더 무섭다.”
“네?!”
제갈문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만약 이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면 맹원들은 호정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겠지. 그것 하나만큼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무림맹에 대한 맹원들의 신뢰는 어떨 것 같으냐?”
“아!”
“무림은 힘의 집단이다. 대의니 협의니 하는 것들은 제쳐 두고, 그만한 힘을 구비하고 있는 집단에게 믿음을 준다. 그건 무림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공통적인 마음이야.”
무림맹이 창설된 후 여러 부침이 있었다. 하지만 남궁가주가 죽는 정도의 사건은 없었다.
이전에 세작을 잡을 때도 조용히 진행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무림맹은 힘의 결정체임과 동시에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맹원들도 신뢰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대놓고 터지면?
신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봉공 세작 건 때도 일이 다 끝난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적으로 밝혔다.
그건 괜찮다. 모든 일이 완료된 이후니까.
오히려 멋지게 대처한 무림맹의 능력에 맹원들의 신뢰가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처럼 폭탄이 터지는 과정을 일일이 보게 되면 맹원들의 신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다. 이미 한 번 세작을 잡았는데,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림맹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다.’
평화 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작을 보낸 것 자체가 평화롭지 않다는 방증이지만, ‘전쟁’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 번이나 세작에게 당했다면, 이는 무림맹의 명성에 치명적인 오점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일단 사태를 무마해야 한다. 내성에 남은 병력 중 절반은 맹주부 앞으로 집결시키고, 나머지 절반은 중앙 광장 쪽으로 보내도록 해라.”
“하지만 아버지! 그랬다가는 반흑파의 더 큰 반발이……!”
“그렇다고 가만히 두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당장 명령을 하달해!”
“……네!”
그때, 정보원이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이 말씀도 드렸어야 했는데, 장고하시는 듯하여 이제야 꺼냅니다.”
“또 무슨 일인가?”
“연호정 소부주가 놓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입니다.”
“……!!”
제갈문호가 서둘러 서신을 받아 펼쳤다.
“……이런.”
“아버지? 뭐라고 쓰여 있나요?”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며 제갈아연에게 서신을 건넸다.
서신을 본 제갈아연이 이를 악물었다.
서신에는 짧은 문장 몇 줄이 적혀 있었다.
저는 결백합니다. 남궁가주는 자살했어요. 그러나 무림맹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끝까지 도망치며 해결해 볼 테니, 군사님께서는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남궁가주의 자살, 연호정의 결백 주장.
설마하니 남궁가주가 자살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 뒤의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아버지!”
“맹주부에 연락을 넣어 맹에 비상령을 내리도록 해라. 선 조치, 후 보고다.”
제갈문호가 눈을 감았다.
“내외성 모든 무사에게 묵룡부 소부주를 찾아 체포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겠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장 사형.”
“그래, 좋아 보이는구나.”
정작 범오에게 그 말을 하는 공공대사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범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면서 들었습니다. 연호정 소부주가 남궁가주 살해 의혹을 받고 있다고요?”
“그렇다고 하더구나.”
이미 맹주부까지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봉공들은 물론 장로들도 난리가 났다.
“연 시주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이상,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선 체포하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사형.”
“아마 군사부에서 선 조치를 했을 것이다. 나 역시 공식적으로 나서야겠구나.”
“연 시주를 아시잖습니까.”
“아니까 이러는 것이다. 연 소부주의 성품을 몰랐다면 내가 직접 찾으러 다녔을 것이다.”
범오가 한숨을 쉬었다.
공공대사가 범오의 뒤에 선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천하의 무림맹주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예의가 지나치게 부족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청년과는 잘 어울렸다.
“무림맹주님을 뵙습니다.”
“놀라운 암살공을 익히셨구려.”
“……!”
“시주가 바로 그 사마현이라는 분이오?”
청년, 사마현은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공대사가 웃으며 범오를 가리켰다.
“이 화상이 몇 번 서신을 보냈소이다. 부처의 자비 속에 스스로를 반성하며 훌륭히 변화했다고 들었소.”
사마현이 피식 웃었다.
“이미 저에 대해 알려 드렸군요.”
“그렇소. 그리고 그대가 연 소부주와 친분이 있다는 것도.”
“친분까지는 아닙니다만, 빚을 졌지요.”
공공대사는 물끄러미 사마현을 바라보았다.
냉담하고 무심했던 사마현의 얼굴에 차츰 불편한 기색이 어렸다. 공공대사의 시선이 마치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범오야.”
“예, 방장 사형.”
“너와 사마 시주가 마침 이럴 때 맹으로 온 것도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예?”
“현재 무림맹 수뇌부와 고수들은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 맹원들의 분위기가 워낙 날카롭기 때문이지. 자칫 잘못하다간 괜한 누명까지도 쓸 수 있을 것 같구나.”
범오의 눈이 빛났다.
공공대사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연 소부주가 보낸 서신이다. 창밖에서 날아들더구나.”
범오가 공손히 서신을 받아 펼쳤다.
그곳에는 한 장소가 적혀 있었다.
공공대사가 사마현에게 말했다.
“빚은 빨리 갚을수록 좋지 않겠소?”
사마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자마자 일부터 하겠군요.”
“시주께서는 무척 똑똑하시구려.”
“이런 일에 워낙 익숙해서 그럽니다.”
공공대사가 범오에게 말했다.
“서신에 적힌 곳으로 가라. 가서 연 소부주를 도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