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6)
1006화. 악(惡)의 목적 (1)
“빌어먹을.”
어느새 산길로 연호정을 찾아온 강량이 쌍욕을 뱉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자살이라니? 왜 자살을 해, 그 저 잘난 맛에 살던 인간이!”
진양이 고개를 저었다.
“흥분하지 마라.”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소! 우리도 우리지만 이거 잘못하다간 형님이 온갖 오명을 다 뒤집어쓰게……!”
“그러지 않으려고 상황을 알려야 할 사람한테 다 알렸고, 이렇게 대놓고 도망까지 친 거 아니냐.”
진양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그 장소에 직접 있었던 사람이었다. 남들 못지않은 머리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이성적 사고보다 직감이 더 뛰어난 부류였다.
감정적일 땐 한없이 감정적이지만, 직감에 따라 차분해져야 할 때도 아는 사람이다. 지금 진양의 본능은 흥분해서 좋을 때가 아니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진양의 차분한 말에 강량 역시 치솟는 분노와 불안을 잠재웠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강량은 짤막한 사정만 들었지, 자세한 상황은 듣지 못했다.
연호정은 남궁세가 쪽에서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말해 주었다.
강량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건 좀 이상하군요.”
얘기를 듣다 보니 확실히 차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차분해지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돌파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뭔가 어설퍼요.”
“그래, 내 생각도 그러하다.”
“천하의 묵룡부 소부주가 도주를 택하게 만들 정도로 대담하고 위험천만한 짓이었습니다. 형님까지 갈 것 없이, 남궁가주를 건드리는 것 자체가 보통 배짱으로는 시도하기 힘들죠.”
“잘 보았다.”
“일은 이미 벌어졌습니다. 바위가 비탈길을 구르고 있는데 뭐 하러 소문을 더 부풀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오히려 그러한 행동이 의심을 부추길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어설픈 짓거리라는 걸 알고도 이랬다는 건데…….”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가 뭘까요?”
연호정은 대답 없이 수풀 너머로 보이는 무림맹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맹주부 뒤편 야산에 숨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연호정은 물론 진양과 강량 모두 이룬 경지가 높아 기척을 숨기는 데에 능했다.
하지만 기척을 숨긴다는 것 자체가 싸울 때 부담을 주기 마련이다. 튀어나온 배를 억지로 힘을 줘 밋밋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능력이 되니 며칠이고 지속할 수야 있겠지만, 냉철한 이성이 필요한 지금 쓸데없는 데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다.
그래서 맹주부 뒤 야산에 오른 것이다. 맹주부 인근에는 초절정고수들이 많은바, 그들 각자가 독특한 기파를 유지하고 있으니 성천에 이른 고수가 아니라면 이곳에 진양과 강량이 있다는 걸 쉽사리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등하불명이랄까. 실제로 맹주부 인근을 수색하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뇌부 모두에게 알릴 수도 없으니, 이렇게 야산에 오른 것이다.
“형님.”
“일단 좀 쉬어라.”
강량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순간에도 배포가 참 좋으십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형님을 위시로 여럿 피 볼 수 있어요.”
“제대로 쉬지 않으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 잠깐이지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눕자고.”
연호정은 벌러덩 드러누워선 대놓고 뒤통수에 깍지까지 꼈다.
한가롭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강량은 분노한 여론이 이 모습을 보면 무림맹이 제대로 뒤집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읏차.”
진양 역시 땅에 대도를 내려놓곤 한쪽 무릎까지 세워 앉았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강량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팔짱을 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왠지 불안한데.”
말과는 달리 바람을 맞는 진양의 얼굴은 상당히 담담했다.
강량이 투덜거렸다.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 것 같수다.”
“일이야 뭐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내가 불안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뭐유?”
“흐음.”
진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무림맹에서 보는 하늘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걸?”
“아씨, 뭔 재수 없는 소리를 하셔!”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그 느낌 다시 칼집에 집어넣어!”
“왜? 너도 무림맹 싫어하잖아.”
“싫지만 죽기는 더 싫소!”
“무림맹 하늘을 보지 못한다는 게 꼭 죽는다는 소리는 아니지.”
“그럼 뭔 소린데!”
눈을 감고 있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진양의 직감에 감탄한 듯한 미소였다.
“어어? 형님은 또 왜 웃어요?”
“그냥.”
“말을 말자, 말을 말아.”
강량이 가슴을 탕탕 두들기다가 벌러덩 누웠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 것 같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역시.”
깍지를 푼 연호정이 상체를 세웠다.
“이 정도면 믿고 움직여도 되겠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리유?”
“맹주님께 보낸 서신에는 이곳의 위치만 적어 놨어. 그 외에 어떤 내용도 없었다. 내가 왜 그랬겠냐?”
“그러게요. 우리 똑똑한 형님이 왜 그런 위험천만한 짓을 하셨을까.”
강량이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 그 서신이 남의 손에 들어가는 걸 걱정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바로 저거지.”
순간 진양과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이제야 그들도 느낀 것이다. 이곳으로 다가오는 하나의 인기척을.
애써 기척을 숨겼지만,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깊은 불법진기(佛法眞氣)가 느껴졌다.
공공대사의 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공공대사의 그것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는 성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공공대사의 진기보다 더 깊은 것 같기도 했다. 내공의 질이나 밀도의 차이가 아니라, 진기 그 자체의 성질이 그렇다는 뜻이었다.
진양이 대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강량 역시 검파를 쥐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여기 계셨군요. 산이라고만 했지, 정확히 산의 어느 부분이라고는 적지 않으셔서 헤맸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역시 대범하십니다. 무림맹 정경이 다 내려다보이는 곳에 떡하니 계셨군요.”
“그래야 사바세계가 잘 보이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범오 스님.”
“아미타불.”
특유의 반장례로 인사를 받은 범오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연 시주의 무공이 천외천의 경지에 들었다는 것은 소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직접 뵈니 성취가 상상을 초월하십니다.”
“보이십니까?”
“조금은요.”
“역시, 최강의 나한당주가 될 거라는 세간의 평이 맞았습니다.”
“시주가 아니었다면 최악의 나한당주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연호정이 걸어가 범오의 손을 마주 잡았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설마 대사님께서 범오 스님을 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래서 더 반갑군요.”
“허허.”
범오의 웃음은 참으로 듣기가 좋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두 눈 가득 용암과 같은 호승심을 불태우고 강철의 자존심으로 무장했던 무투파가 바로 범오였다.
지금의 범오는 달랐다. 소림 역사상 자력으로 반야대능력을 깨달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놀라운 위업을 이룬 범오는 오랜 시간 세상을 배우며, 누가 봐도 깨달음 깊은 고승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범오가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 시주도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광동 작전에서 이미 면식을 익힌 두 사람이었다.
범오가 진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시주께서는……?”
진양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진양이라 하오. 대장과 함께하고 있소.”
대장이란 호칭은 누가 봐도 연호정을 이르는 것이었다. 범오가 웃으며 반장례를 했다.
“그나저나…….”
강량이 팔꿈치로 연호정을 툭툭 쳤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맹주님께서 직접 오시지 않고 대신할 사람을 보냈잖느냐? 설마하니 범오 스님이 마침 맹으로 오셨을 줄은 몰랐지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냐고요.”
연호정이 맹주부를 바라보았다.
한참 떨어져 있지만, 발 한번 떼면 곧장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위치였다.
“맹주님께 장소가 적힌 서신만 보낸 것은, 내 나름의 실험이었다.”
“실험이요?”
“맹주님께서는 맹주부에서 움직여선 안 돼. 하지만 홀로 오셨다면 맹주님 혼자서 막을 수 없는 상황이거나, 그럴 자신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
“그게 아니라 무사들을 파견했다면, 어떻게든 나를 잡아 놓고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무사들의 기척을 내가 다 읽고 있을 테니, 그러한 행위 자체가 얌전히 잡혀 달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
“……허!”
“한데 맹주님께서는 그저 두 사람을 보냈어. 그 말인즉, 어떻게든 성난 여론을 막아 볼 테니 그사이에 이 상황을 해결해 보라는 뜻이다.”
진양과 강량은 연호정의 두뇌에 감탄했다.
단순히 장소 하나 던져 준 것에 그토록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근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습니까? 형님 실력이면 맹주님과 독대해도 괜찮았잖습니까?”
“누가 세작인지도 모르는데 독대를 하라고?”
“아니, 서신을 던질 때도…….”
순간 진양과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형님, 맹주님까지 의심하고 계셨습니까?”
“이 상황을 유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람은 맹주님이다. 개인의 성품을 떠나서 말이야.”
“……!!”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지. 맹주님께서는 무극까지 도달하셨다. 지금 내 상단전 능력으로도 속을 꿰뚫어 볼 수가 없어. 결국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반응뿐이었다.”
정말 다른 세계에서 노는구나.
진양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저 대가리로 왜 칼을 쥐었을까. 어디서 사업 하나 일구었으면 천하를 통째로 삼킬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잠깐.”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둘이라니요?”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이만 나와.”
그러자 한 아름드리나무 꼭대기에서 웬 청년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진양과 강량은 깜짝 놀라 청년을 돌아보았다.
청년의 얼굴을 확인한 강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오랜만에 뵙소.”
연호정이 사마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슬아슬하구만. 도대체 뭔 수련을 했길래 나조차 긴가민가할 정도의 은신술을 구사하는 거냐?”
“딱히.”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다고 꽤 어색해하는 듯했다.
“잘 지냈냐?”
“뭐, 대충.”
“기도를 보아하니 이제 사람 다 됐군. 범오 스님이 고생깨나 하셨겠다.”
범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마 시주께서 노력하신 것이지, 빈승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얼마나 속을 썩였으면 스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냐.”
사마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놓고 썩은 말을 하는 그 성격은 여전하구려.”
“천성이라.”
“그것 참 대단한 천성이외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마현은 연호정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뭐, 어쨌든 능력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나야 좋지.”
연호정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슬슬 시작해 볼까.”
“아니, 형님.”
강량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게요? 괜스레 움직였다가 세작 놈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겠습니까?”
“누우면서 생각해 봤다. 세작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
“얼추 셋까지 추려지더군. 그중 하나가 맹주님이었으니, 남은 건 둘이다.”
“예?!”
“그중 하나가 유독 걸려.”
모두가 놀라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그놈이 세작이라면, 다른 한 사람은 지독하게 비통해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