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7)
1007화. 악(惡)의 목적 (2)
“모두 물러나시오!”
“이곳은 무림맹 광장이오! 단체 행동을 금하오!”
강경하기 짝이 없는 무사들의 외침에도 모인 군웅들의 눈빛은 식을 줄 몰랐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불타올랐다. 한번 불붙은 광기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몇 방울 물이 튀면 더 거칠게 일렁이는 것이 불이다.
“당장 길을 열어라!”
“맹주님을 뵐 것이다!”
“군사! 군사를 나오라고 해!”
“언제부터 무림맹이 맹원들을 강제할 수 있었나!”
광장에 모인 무사들의 숫자는 족히 오백을 헤아렸다.
이곳에 모인 정파 소속 문파들은 모든 전력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많으면 일백이 넘고, 적으면 열 명도 되지 않는다.
하물며 모인 이들 중 구대문파급 대문파 소속은 없다. 애초에 데리고 온 무사들의 수가 적다는 말이다. 게다가 광장에 소속 무사들을 다 데리고 온 것도 아니었으니, 이곳에 모인 문파 대표들의 숫자는 수십이 넘는다고 봐야 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숫자였다. 그조차도 전부가 아닌지라, 저 멀리서 수많은 무인이 줄지어서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죠?”
대룡단주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화룡단주 이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뒷일은 생각지 마세. 우리는 명령을 받았어. 받은 명령을 이해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대룡단주 역시 누구 못지않게 명령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무림맹 육단의 단주가 되려면 실력 이전에 상부의 명령에 절대복종할 줄 알아야 했다.
하지만 사건이 너무 삽시간에 커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칫 저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그때부터는 육단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칼부림이 벌어진다 한들 저 많은 사람을 맹주부로 보낼 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칼부림이 일어나면, 그때는 무림맹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이미 소문은 번질 대로 번졌다. 무력 충돌이 벌어져 저들 모두를 베어 버린다면, 백도 정파 무림인들은 무림맹을 얼마나 신뢰할 것인가.
“우리는 칼일세.”
이결이 도갑을 꾹 쥐며 말했다.
“칼의 본분은 베는 것이지. 방향은 칼을 쥔 자가 선택하는 것이야.”
“……!”
“우리가 뒷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런 것까지 생각하다간 해야 할 일을 못 하게 될 걸세.”
대룡단주는 물론 다른 단주들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들 모두가 눈을 부릅뜨며 오백이 넘는 무림인들을 노려보았다.
이결의 말이 옳다. 그들은 무림맹 전투 부대 소속이다.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졌다면, 명령을 이행하면 그뿐이었다.
대의와 뒷수습은 상부가 알아서 생각할 문제다.
“제발…….”
남룡단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발, 쓸데없는 행동들은 말아 주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다. 부디 저들이 섣부른 판단으로 칼을 뽑지 않기를.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모두 잠시만 조용해 주시오.”
시끌벅적했던 반흑파 무사들의 목소리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스르륵.
제멋대로 모인 인파 가운데에 길이 생겼다.
그 길의 선두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은 체격 좋은 노인이었다.
풀어 헤친 회색빛 머리카락은 산발한 게 아닌데도 사자의 갈기처럼 보였다. 족히 육십은 되었을 법한 얼굴인데 두툼한 어깨와 널찍한 등 근육은 홍안의 청년들 못지않았다.
이결의 눈이 깊어졌다.
‘사자문주.’
섬서 청사자문의 주인, 청면사자(淸面獅子) 구일백(邱一栢)이 그였다.
구일백의 등장에 달아올랐던 공기가 싹 가라앉았다.
대단한 기파였다.
화산과 종남을 제외하면 섬서 최고를 논한다는 청사자문의 주인다운 무력이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파는 대문파 장로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반흑파 무리의 앞에 선 구일백이 이결을 향해 말했다.
“길을 열어 주시게.”
이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구일백과 나름의 친분이 있었다. 애초에 무림맹에 들어오기 전 활동했던 지역이 섬서성이었다.
구일백은 강자를 존중하고 협사를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이결은 강했고, 민중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칼을 뽑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구일백은 그런 이결을 존경하여 몇 차례 청사자문으로 초대했고, 이결 역시 기꺼이 초대에 응하여 간간이 구일백과 술잔을 나누었다.
이 드넓은 천하에 일파의 문주와 낭인끼리 그 정도 인연을 만들기란 쉽지 않은바. 이결을 향한 구일백의 존경심만큼이나 이결 또한 구일백의 청렴함과 담백한 성정을 흠모하여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런 두 사람이 여기 무림맹에서, 완전히 반대되는 진영에 선 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대협.”
“저는 무림맹 화룡단주입니다. 사적 호칭은 허용치 않겠습니다.”
냉담하고 고압적인 태도였다.
그 태도가 바로 이결의 답이었다. 나는 지금 무림맹의 무사이지, 당신과 인연을 나누었던 무사가 아니니 사적인 친분에 기대어 이 상황을 해결하려 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저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망발을!”
재차 달아오른 반흑파 무사들의 분노를 손짓으로 잠재운 구일백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대협. 우리가 너무해 보이나?”
“…….”
“소림 방장 공공대사, 맹주님의 무공은 천외천이야. 무사로서 약한 소리 하고 싶지는 않네만, 아닌 말로 우리 모두가 함께 덤벼도 맹주님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남기기 쉽지 않을 걸세.”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무극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대문파급의 전력을 지닌 규격 외의 강자들이다.
초절정고수와의 격차도 아득히 크다. 마음만 먹는다면 어지간한 문파 하나를 잿더미로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단순히 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법.
방심해도 죽고 마음이 약해져도 죽는다. 공공대사는 심신 모두 완성형에 이른 고수임이 분명하지만, 만에 하나 이들과 부딪치게 되면 그 깊디깊은 자비심 때문에 한순간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었다. 굳이 명령이 아니더라도 무림맹의 일원으로서 이들에게 길을 열어 줄 수는 없다.
“구 문주께서 이들의 수장이십니까?”
“허튼소리. 우리에게 위아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그저 한뜻으로 모였을 뿐이야. 이 사람들은 내 무공과 뜻을 존중해 주었을 뿐, 누구도 나의 아래는 아니라네.”
“결국 이들 중 영향력이 가장 큰 분이라는 것은 사실이군요.”
이결의 눈이 깊어졌다.
“실망입니다, 구 문주.”
“…….”
“사람들은 저마다의 주관과 사상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자유지요. 그러나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을 허용치 않기 위해, 어떤 세상이든 규범과 법도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순간 반흑파 무사들 사이에서 또 한 차례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결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은 규범과 법도를 무시한 채 방종을 저지른 이들이 된다. 지극히 감정적으로 변한 그들에게 있어 이결의 발언은, 끓는 기름에 불씨를 던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구일백이 침착하게 말했다.
“규범과 법도를 어긴 적 없네. 이 정도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면 어찌 백도 정파의 무림인이라 하겠는가.”
이결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구 문주께서 이럴 줄은 진정 몰랐습니다.”
“이 대협!”
“무림인이란 결국 힘의 논리로 살아가는 인종들이지요. 그러나 힘의 논리만큼이나 올바름과 대의를 중요시했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백도라 칭하고 정파라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올바름과 대의를 안고 우리는 이곳에 왔네.”
“그렇다면 정식으로 이 문제에 대해 건의를 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특히나 구 문주만큼 영향력이 강한 분이라면 더더욱 신중하게 행동하셨어야 합니다. 평소에 신중하고 고결한 인품으로 명성이 높으신 분께서 어찌 이리 무모한 짓을 하십니까.”
구일백의 눈이 차가워졌다.
“건의? 남궁가주가 죽었네. 그것도 흑도맹주의 제자에게! 신중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 그자는 맹주님을 물론 군사 등 수뇌부들과 깊은 친분이 있는 자야. 당장 봐주기식 수사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찌 신중함을 논하겠나.”
화아아악!
이결은 물론 육단의 무사들 전원이 매서운 기파를 피워 올렸다.
“구 문주께서는 지금, 무림맹이 사적 인연 때문에 진실을 묻고 거짓으로 여론을 선동하는 위선적인 집단이라 모욕하신 겁니다.”
아무리 구일백이라도 그 말 앞에서는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장에 모인 반흑파 무사들 모두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사람 일이라는 것은 모르는 법. 천하 어떤 조직이라도 자정 작용이 될 만한 기관이나 행위는 꼭 필요한 법이라네.”
“그래서, 그 자정 작용을 본인이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런 조직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이야. 무림맹은 절대 권력으로 운용되는 조직이 아닐세! 구성원 하나하나가 곧 무림맹이야!”
“그 구성원 하나하나가 권력을 쥐여 주고 올려 보낸 자리가 맹주위입니다! 제 편할 때만 맹주고, 본인이 불편할 때는 일개 무사 나부랭이라고 보는 그대들의 논리에 어찌 정의가 있단 말이오!”
구일백의 답답한 언행에 이결의 말투도 거칠어졌다. 구일백을 존중하고, 나아가 존경했던 그였기에 더더욱 실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자네와는 더 할 말이 없네. 이만 비켜 주게.”
“그럴 수 없습니다.”
“진정 무림맹의 이름에 먹칠을 하려는가.”
“우리는 명령을 받은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하십시오. 무림맹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대들입니다!”
“이결!”
그때였다.
“참으로 오랜만이오.”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음에도 광장 전체로 메아리쳤다.
은은하고도 담백한 목소리. 단순하기 그지없는 말인데도 마치 산사에 울려 퍼지는 독경 소리 같다.
“이토록 뜨겁고 격렬한 감정들이 부딪치는 광경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오.”
모두가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온 맹주부 방향을 바라보았다.
맹주부로 향하는 성문 위.
어느새 공공대사가 뒷짐을 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
육단 무사들은 물론 반흑파의 무사들도 침을 삼켰다.
기파를 발산한 것도 아닌데 등장 자체만으로 일천이 넘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한다. 굉장한 존재감이었다.
훅.
한 줄기 바람이 분다 싶은 순간, 공공대사는 이미 이결 옆에 나타났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법이었다. 누구도 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질 못했다.
소리보다도 더 빠른 듯한데, 충격파는 없었다. 고절함이 하늘에 닿은 신법, 소림의 금강부동신법이었다.
공공대사가 구일백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으로 공공대사를 보던 구일백이 고개를 숙였다.
“청사자문의 구일백이 맹주님을 뵙습니다.”
반흑파 무사들 역시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바람 없는 호숫가의 정경처럼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가만히 그들을 둘러보던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모인 무사들을 제외한 맹의 모든 무사가 연호정 소부주를 찾고 있소.”
“…….”
“단순 수색 명령이 아닌 체포 명령을 내렸소이다.”
공공대사가 심유한 눈으로 구일백을 바라보았다.
“더 듣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