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8)
1008화. 악(惡)의 목적 (3)
단순하고도 핵심적인 발언이었다.
다른 걸 떠나서, 공공대사의 첫 발언은 너무나도 적절했다고 할 것이다. 맹원들을 찍어 누르고자 하는 게 아닌, 구성원들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맹주로서 올바른 대처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반흑파 무사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었다.
그들 대다수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맹주가 직접 나타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한데 나타나자마자 연호정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 발언은 곧, 반흑파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뜻했다.
맹주가 직접 나서서 연호정에 대한 조치를 취했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언했다?
그걸로 끝이다. 이보다 더 명쾌한 해명이 또 있을까? 만에 하나 그조차 믿을 수 없다고 뻗댄다면, 그거야말로 진짜로 선을 넘는 행위가 된다.
다른 사람 앞에서라면 몰라도 감히 맹주 앞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다. 하물며 그 맹주란 사람이 태산북두 소림의 방장이기까지 하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그 길로 무림에서 퇴출이다. 실제로 그렇게는 안 되겠지만, 자칫 소문이라도 나면 소림사와도 척을 진 문파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
광장에 침묵이 어렸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가만히 무사들을 둘러보던 공공대사가 말했다.
“이해하오.”
이해한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흔들림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공공대사의 성품 그대로다. 부드럽고 담백했다. 반흑파 무사들을 향한 분노나 혐오의 감정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해하오. 이해하고말고. 내 어찌 이해하지 않을 수 있겠소? 우리는 평생을 흑도 사파와 싸워 왔고, 나아가 우리의 선대(先代)들도 그랬소. 그 역사의 시작이 어디부터였는지 되짚어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백도와 흑도의 골은 깊고 깊소이다.”
마치 잠자리에 드는 손자에게 옛날얘기를 건네는 조부처럼.
공공대사의 목소리는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을 기반으로 했다.
그것은 분노보다, 증오보다, 혐오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렇게나 기세등등했던 무사들의 얼굴에 숙연함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말 몇 마디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능력.
대단한 화술도, 놀라운 기세도 필요치 않다.
공공대사가 무림맹주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걸, 오히려 차고 넘치는 그릇을 지닌 거인이라는 걸 그대로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모르게 파멸의 씨앗에 물을 주던 정체불명의 적을 맞이하게 되었소.”
“…….”
“우리는 그들이 다른 지역에서 살기 때문에 경계하는 게 아니오. 그들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우리의 고향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힘을 합쳤소.”
그때, 용기를 낸 반흑파 무사 중 하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흑도 놈들과 손을 잡은 것은 너무 섣부른 결정이 아니었는지요.”
어조는 공손했지만, 흑도에 대한 혐오가 강하게 묻어 나오는 말이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내, 소중한 우리 맹원들을 앞에 두고 가르침 같은 것을 내릴 생각은 없소. 애초에 누굴 가르칠 만한 사람도 아니외다. 다만, 그대들이 빈승을 맹주로 인정한다면 잠시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 하오.”
“…….”
“푸른 문파가 있소. 푸른 문파의 문주는 붉은 문파를 증오하오. 이유인즉, 푸른 문파의 선조들이 붉은 문파에게 수차례 당했기 때문이라오. 지금에 와서는 힘의 균형이 무너졌지만, 그때만 해도 붉은 문파의 힘은 푸른 문파 이상이었지.”
“…….”
“지금은 다르오. 오히려 붉은 문파는 힘을 잃고 있소. 거칠고, 법도도 빈약하고, 배신과 살인이 판을 쳤기 때문이오. 그러고도 무너지지 않은 것은 붉은 문파 측에서도 현실을 아는 사람들이 작금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겠지.”
“…….”
“푸른 문파의 문주는 붉은 문파를 멸문시키고 싶소.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소. 붉은 문파에는 악인도 많지만, 악인이 아닌 이들도 많소. 어린아이들도 있고, 힘없는 아낙네들도 있었지.”
푸른 문파는 정파를, 붉은 문파는 사파를 의미한다.
실제로 오랜 옛날에는 흑도 사파가 백도 정파를 압도했다고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공이 체계적으로 발전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거칠고 단호한 쪽이 우세를 잡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흑백의 구분조차도 희미하던 시절이었다. 천하가 혼란하기 그지없던 시절, 지금의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힘의 균형이 깨지고 난 후, 붉은 문파 측의 사람들도 푸른 문파를 증오하게 되었소. 이유인즉, 죄가 없어도 붉은 문파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오.”
“그것은……!”
누군가가 목소리를 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입을 열어 봤자 우리는 그놈들과 다르다느니,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느니 따위의 말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들은 변명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희언이다. 오히려 그들이 증오하는 악랄한 흑도인들이나 하는 요언이란 말이다.
“붉고 푸른 두 문파는 명백한 적이오. 선대부터 싸워 왔소이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선, 서로와 원수를 지지 않았는데도 무턱대고 칼을 겨누는 이들이 태반이 되었소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말했다.
말꼬리 잡기에 불과했지만, 공공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모두가 그렇진 않소이다. 푸른 문파만이 문제가 아니라 붉은 문파도 문제였기 때문이오. 그저 미워하고 죽이는 것만이 전부가 된 두 문파 사이에서, 우정과 이해라는 가치는 스며들기 힘든 탁한 빗물이 되었소.”
“…….”
“서로가 서로를 끝장내지도 못하는 이 판국에, 붉고 푸른 두 문파를 모조리 집어삼킬 수 있는 초록빛 문파가 기세를 일으켰소.”
“…….”
“심지어 그들은 붉고 푸른 두 문파의 고향에서 사람들을 납치하고 살인, 방화, 이유 없는 폭력 등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다녔소이다.”
무사들의 얼굴에 불편함이 어렸다.
공공대사의 말은 사실이다. 삼교가 사천에서 행한, 광동성에서 행한 일만 해도 가히 불구지천의 원수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했소. 붉고 푸른 문파들끼리는 원수지간이지만, 초록 문파는 존재 자체가 재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로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는 재해라는 것이지.”
공공대사의 눈이 빛났다.
정파와 사파, 그리고 삼교 사이의 일을 그저 붉고 푸른 문파로 대입해서 말한 것뿐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 비유조차도 몹시 크게 와닿는다.
이유는 단순했다. 비유만으로도 제삼자 입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편했다. 원수지간임을 떠나, 정의는 언제나 자신들에게 있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언제나 백도 정파가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맹주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백도 정파의 길은 분명히 존재하나, 우리 역시 사람이기에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우리 정파도 잘못이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따지고 들었겠지만,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들어 보면 또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불편함이라도 느끼는 상황이 되었으니, 공공대사의 선택은 이번에도 괜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서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많소. 그대들 하나하나가 그러할 것이고, 나 또한 그렇소이다. 같은 지파에 속해 있다 한들 생각이 이리도 다른데, 대화를 이어 나간다면 몇 날 며칠이 아쉽겠소?”
“…….”
“그러나 그토록 생각이 다른 우리에게, 이 세상은 절대적인 진실 하나를 던져 주고 있소.”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삼교가 우리를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
“……!!”
“우리가 여기서 분열하게 되면, 오히려 한데 뭉치지 못하고 갈라져 버린 정파와 사파 사이를 파고들기 쉬워진 삼교는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겠다며 껄껄껄 웃음을 터트릴 것이오.”
오싹!
공공대사의 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마음 깊숙한 곳까지 한 방에 스며들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반흑파 무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아가 육룡단의 무사들도 조금은 해쓱해진 얼굴로 공공대사를 보았다.
“우리가 여기서 서로 싸우면, 우리의 터전을 불태우고 내 가족, 내 친구, 내 스승과 제자를 죽이려 드는 삼교만 좋아할 거란 말이오.”
“…….”
“우리라고 쉬운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외다. 심지어 그때 당시만 해도 그대들 중 대부분이 안도했을 거라 믿소. 다 같은 중원인으로서 말이오.”
“…….”
“부디 조금만 더 차분해지시길 바라오.”
무사들이 하나둘 고개를 떨어트렸다.
숙연한 분위기가 광장을 메웠다. 공공대사의 진심 어린 부탁에, 광기에 가깝게 불타오르던 그들의 기세가 많이 꺾인 것이다.
그때였다.
“맹주님의 말씀은 이해합니다만.”
입을 연 것은 구일백이었다.
“삼교의 침공이 진실이라면, 남궁가주의 죽음도 진실입니다.”
다시금, 광기의 불씨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흑도와 힘을 합친다? 좋습니다. 그들이 동맹으로서 분명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힘을 합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구일백의 눈이 흔들렸다.
제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감히 맹주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란 보통 부담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백도 정파의 기둥 중 하나라는 남궁세가의 주인이 흑도 연맹의 차기 맹주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 그들을 믿겠습니까? 일개 무사도 아니고 묵룡부의 이인자라는 작자가 저지른 짓입니다.”
“이보시오, 구 문주.”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맹주님.”
순간 공공대사는 구일백이 잠시 침을 삼키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긴장해서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적어도 공공대사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자가 떳떳했다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진실을 파헤치려 하였을 것입니다. 한데 그는 제 발로 남궁세가에서 나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심지어 형제들이라고 한 무사들까지 모조리 데리고서.”
“…….”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찌 흑도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반흑파 무사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꼬리 잡는 것처럼 느껴질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구일백이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공공대사가 다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 문주에게 하나 물어봅시다.”
“예.”
“만에 하나 빈승이 남궁가주를 제거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요란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가 일을 치렀겠소?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새에, 아무도 모르는 수법으로 은밀히 죽였을 것 같소?”
“……!!”
“빈승에게 그 정도 능력이 없을 것 같소?”
고고하기 그지없는 소림의 방장이 진흙탕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내, 마음만 먹는다면 성천을 제외하고 누구라도 몰래 죽이는 것이 가능하오.”
“매, 맹주님.”
“그렇다면 연 소부주는!”
공공대사의 목소리가 강렬해졌다.
“남들이 모르는 사정이 있어, 기어이 대문으로 들어가 죽일 수밖에 없던 것이었겠소?”
“……!”
“어떤 사정이 있다 한들 그처럼 무모하고 다급한 일 처리를 감행할 사람은 없소. 하물며 다른 누구도 아닌, 무림 출도 이후 하루하루를 삼교 타파를 위해 목숨 걸고 전 중원을 오갔던 연 소부주라면 더더욱!”
“……!!”
“연 소부주에게 죄가 있다면 하나요. 그대들 말마따나 직접 출두하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말해 주지 않은 것.”
“…….”
“그것을 제외하고, 아직 연 소부주가 남궁가주를 죽였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소이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연 소부주를 체포하려는 것이오. 용의자로서, 사건의 참고인으로서.”
“…….”
“만에 하나 연 소부주가 남궁가주를 죽였다는 것이 진실로서 드러난다면.”
우우우우웅.
공공대사의 몸에서 화려하기까지 한 금빛 광채가 피어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내가, 직접 그를 단죄할 것이오.”
“…….”
“반대로, 그에게 아무 죄가 없다면.”
공공대사가 무사들을 쓸어 보았다.
위엄 넘치는 무림맹주의 안광에 무사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했다.
“사건 경위가 어떤가에 따라 무림맹주로서 공식적으로 연 소부주에게 모두를 대표해 사죄하겠소. 그대들이 지금 이곳에서 벌였던 그에 대한 모든 모욕을 이고 갈 것이오.”
“…….”
“더 할 말들이 있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