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09)
1009화. 악(惡)의 목적 (4)
공공대사의 연설은 진실되었기에 무거웠고, 자신감이 있었기에 무서웠다.
광장에 모인 반흑파 무사들은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흩어져야 했다. 여기서 더 기를 쓰면, 무림맹에 반기를 든 문파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
흩어지는 무사들과 함께하던 구일백은 힐끔 이결을 바라보았다.
맹주부로 이어지는 성문 앞에서 당당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화 속 천왕이 따로 없었다. 적어도 구일백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 구 문주님.”
광장에 모였던 무사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일단은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누군가가 그의 말을 받았다.
“솔직히, 맹주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저런 말씀을 해 주실지도 몰랐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어딥니까?”
“그렇습니다. 맹주님, 아니 공공대사님은 모두가 인정하는 선인이십니다. 직접 공언을 하셨으니 당분간은 지켜보시는 것이…….”
구일백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먼저 가겠소.”
“아, 예.”
그렇게 구일백은 휘하 권사들과 함께 광장에서 벗어났다.
사자권사의 수장, 허중이 입을 열었다.
“문주님. 일단 거처로 돌아가셔서…….”
“너희들은 거처로 돌아가거라.”
“예?”
“나는 남궁세가 쪽에 들렀다 가겠다. 너희는 먼저 가도록 해라.”
“문주님. 저희가 모시…….”
구일백이 서늘한 눈으로 허중을 돌아보았다.
허중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권사들도 구일백의 명을 받아 거처로 돌아갔다.
혼자가 된 구일백은 남궁세가 방향으로 걸었다.
관도는 넓었고 건물들도 많았다. 그러나 남궁가주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탓인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차 한잔하고 가시오.”
구일백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가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름 모를 건물 한 채가 있었다. 아마도 공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울렸다.
구일백의 얼굴에 불안함이 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건물에 들어갔다.
“오셨소?”
놀랍게도 그 건물의 정방에는 공공대사와 승현진인이 있었다.
언제 이곳에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차까지 이미 준비해 놓았다.
구일백이 고개를 숙였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승현진인도요.”
승현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무당산에서 나는 찻잎으로 우렸습니다. 향은 좀 텁텁해도 맛은 괜찮을 것입니다.”
“…….”
“앉으시구려.”
공공대사와 승현진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구일백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구 문주.”
“반흑파 무사들을 어떻게 해 달라는 요청이시라면, 안타깝게도 제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조금은 이죽거리는 듯한 말투다.
눈빛과 목소리, 전체적인 표정을 보면 구일백은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내뱉고 있다.
마치 애를 쓰는 듯한 느낌.
가만히 구일백을 보던 공공대사가 손으로 탁자를 가볍게 내리쳤다.
투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금빛 진기가 건물 전체를 아울렀다.
구일백의 얼굴이 다소 창백해졌다.
그 한순간에 이 넓은 공간 전체에 진기의 막을 씌웠다.
경이로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력이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성천의 고수들끼리 비무를 하는 것도 봤지만, 이렇게 코앞에서 그 능력을 목격하니 느낌이 또 달랐다.
“구 문주.”
공공대사의 목소리는 연설을 할 때처럼 깊고 담백했다.
“자주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구 문주가 누구보다 정파인다운 사람이라 생각했소.”
“…….”
“신중하고 협의 넘치는 무사라는 소문도 많이 들었소이다. 하지만 직접 뵈니, 소문만큼 고결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소.”
승현진인이 놀란 눈으로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공공대사의 그런 말이 구일백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 모양이었다. 창백했던 구일백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러셨습니까.”
“그렇소. 다만, 실로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소.”
“…….”
“백도 정파를 자처하는 우리 모두가 고결하고 선할 사람일 필요는 없소. 오히려 구 문주 같은, 흠도 있고 욕심도 있지만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오.”
불법을 따르는 자로서가 아닌, 맹주로서 하는 말이었다.
“흠도 있고 욕심도 있다…….”
공공대사의 말을 곱씹듯 중얼거리던 구일백이 눈을 감았다.
“저에 대해서 조사를 하신 것입니까?”
“그대가 반흑파에 속했을 때부터 깊은 조사에 들어갔소.”
“…….”
“구 문주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소. 다만, 그대 역시 남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소.”
“……그러셨군요.”
“더하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본론부터 말하겠소.”
공공대사의 눈이 차가워졌다.
“누구요?”
“…….”
“구 문주께서 살아온 인생을 살폈고, 성정을 보았소. 구 문주께서는 본인의 행위가 맹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아는 분이오.”
“맹…….”
“나아가, 이런 일에 나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한데도 전면에 나서서 불씨를 일으키시니, 빈승으로서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소이다.”
“…….”
“구 문주께서 미치셨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거나.”
승현진인이 굳은 눈으로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미쳤냐는 말을 할 만큼 공공대사는 막돼먹지 않았다.
그만큼 이 일을 맹주로서 제대로 파헤쳐 보겠다는 뜻이었다.
“섬서 권법가들의 추앙을 받을 만큼 수양이 깊은 구 문주께서 미치셨을 리는 없을 터.”
“…….”
“누구요?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소?”
구일백이 눈이 충혈되었다.
“나는…….”
“일부러 휘하 권사들을 보낸 걸 알고 있소.”
“……!”
“뭔가 남들 몰래 일을 벌이기 위해 보낸 것은 아닐 것이오. 내가 보기에, 구 문주는 누군가가 자신의 상황을 알아채고 구해 주기를 바라는 듯하오.”
“…….”
“틀렸소?”
공공대사의 말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구일백은 실제로 반쯤 자포자기한 상황이었다.
물끄러미 공공대사를 보던 구일백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승현진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향은 좀 텁텁했지만 맛은 아주 좋았다. 뜨끈한 찻물이 들어가자 확실히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차를 마신 후 한참 동안 찻잔만 내려다보던 구일백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일각 뒤였다.
“시작은 연 소부주였지요.”
“……?”
“휘하 권사들에게 연 소부주를 모시고 오라 명을 내렸습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말이지요.”
“전해 들어 알고 있소.”
구일백이 쓰게 웃었다.
“거절하더군요.”
“그럴 수밖에.”
“이해합니다. 적창문과의 일이 있고 난 직후였으니, 연 소부주라고 복잡한 일에 얽히고 싶었겠습니까.”
승현진인의 눈이 깊어졌다.
구일백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연 소부주의 눈치는 누구보다 빠르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알아챌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을?”
“……제 상태를 말입니다.”
“상태?”
“상태 이전에, 넌지시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습니다.”
“무슨?”
“남궁세가 측에 가지 말라는.”
순간 공공대사와 승현진인의 눈이 흔들렸다.
구일백의 이 발언은 그 자체로 이번 사건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구일백은 남궁인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호정이 결국 남궁세가로 갈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해 주더군요. 연 소부주는 남궁세가로 향할 거라고. 빠르든 늦든 말입니다.”
“대체 ‘그’가 누구요?”
“…….”
“구 문주.”
“저 때문입니다.”
“……?”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잘못 살았습니다.”
“구 문주, 진정하고 말을 해 보시오. 대체 그가…….”
“저는 동생을 암살했고 아비를 독살했습니다.”
“……?!”
“아무도 모르게 진행했지요. 저보다 뛰어난 동생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저를 벌레 보듯 하는 아버지의 시선을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
“나아가, 문주가 되지 못하면 사자문에서 배운 모든 것을 내놓고 떠나라는 아버지의 말이 저의 두려움을 자극했습니다.”
구일백의 턱이 툭 불거졌다.
“완벽한 범죄였지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적어도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진실이었다.
협의로 이름 높은 청사자문의 문주가 소싯적 그런 패륜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면, 저의 죄도 사해질 줄 알았지요.”
“…….”
“말도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만 번의 선행을 했다 한들, 제 형제와 아비를 죽인 패륜아가 어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살 수 있겠습니까.”
“……구 문주.”
“결국 삼십 년 전 저지른 제 악행이, 이렇게 돌아와 버렸군요.”
구일백은 지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죄를 말하고 있었다.
공공대사는 침착하게 물었다.
“구 문주가 말한 ‘그’가, 그것을 빌미로 협박을 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증거를 갖고 있었던 것이오?”
인도(人道)적 차원에서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맹주로서 어떻게 협박을 받았는지 정도는 알아야만 했다.
“없었습니다.”
“……?!”
“그에게는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런 증거가 있었다면 제가 지금껏 멀쩡히 숨을 쉬면서 살 수 있었겠습니까.”
“증거도 없이 협박을 하는데…….”
“예. 증거는 없습니다. ‘그’는 그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잔뜩 충혈된 구일백의 눈은 당장이라도 핏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제게 인식시켰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때부터 저는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공공대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승현진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해서, 그자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이오?”
“시켰다…… 말로 시킨 적은 없지요.”
“……?”
“그저 이해했을 뿐입니다. 아니, 받아들였지요.”
“무엇을 말이오?”
“본래 세상은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구일백의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멍해져만 갔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
“나는,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공공대사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멈추시오!”
우우우웅!
무상대능력의 진기가 구일백의 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늦었다. 어느새 구일백의 코와 입에서는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이런!”
승현진인이 쓰러지는 구일백의 몸을 재빨리 안았다.
공공대사의 대처는 눈이 부시게 빨랐다. 덕분에 심맥이 절반만 파열되었다.
물론, 그래도 죽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즉사를 면했을 뿐이었다.
“구 문주! 구 문주! 정신 차리시오!”
“……승현진인.”
“그래, 내가 승현이오!”
구일백의 눈이 점차 혼탁해졌다.
“사람이…… 광기에 젖는 것은 하루…… 아니, 한 번의 사건으로 충분…….”
“구 문주!”
“세상은…… 나는 대체 왜…….”
구일백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어도 동생과 아버지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고개를 떨어트린 구일백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얼이 빠진 승현진인은 멍한 눈으로 구일백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공공대사가 침중한 얼굴로 구일백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섭혼술 따위의 술법이 아니오.”
“…….”
“그냥…… 자살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