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10)
1010화. 악(惡)의 목적 (5)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는 모용군의 눈은 무심함 그 자체였다.
분위기가 몹시 어수선했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누군가가 온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곳 전체에 보이지 않는 뇌정기를 뿌려 놨는데도 그러했다.
만약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정말이지 손도 못 써 보고 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극을 코앞에 둔 그의 경지를 생각하면 실로 무시무시한 은신술이었다.
모용군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명의 청년이 서 있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연호정 소부주가 보냈소.”
“……그래?”
한참 동안 청년의 얼굴을 살펴본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연락이 올 줄 알았지. 뭐라던가?”
청년이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탁자를 보던 모용군이 고개를 들었다.
“서신 하나만…….”
모용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청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은신술이었다. 천하에 이 정도 은신술을 구사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니, 하나 있긴 했지.’
과거 언젠가 연호정이 말했다. 전설의 살수, 음신의 무공을 이은 천재가 하나 있다고.
언제고 제대로 성장만 한다면 중원 암살계를 평정할 만한 놈이라고 스치듯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설마 이놈이 그놈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연호정은 무림맹에 암살자까지 들인 것이 된다.
‘신분 증명은 했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공대사나 제갈문호에겐 말을 해 뒀을 것이다. 저만한 암살자라도 신분 확인도 안 된 놈을 들일 만큼 연호정은 막 나가지 않는다.
모용군은 이내 생각을 접고 서신을 펼쳤다.
“흐음.”
눈을 빛낸 그가 한옆에 놓아둔 검을 들었다.
파지직! 화르르륵!
뇌정기로 불타오른 서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모용군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모용군이 도착한 곳은 맹주부 인근의 제법 큼직한 다루였다.
훅.
다루 안이 아니라 지붕 꼭대기다.
연호정은 대놓고 지붕의 기와 위에 앉아 있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맹주부 쪽이 아니면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이지만, 정말이지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앉을 수 없는 곳이었다.
“오셨소?”
“반갑군, 살인마.”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 당분간은 그렇게 불러도 화 안 내리다.”
모용군은 연호정이 남궁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후우, 바람 선선해서 좋군.”
연호정 옆에 앉은 모용군이 쭉 이어진 맹주부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도끼는 어디다 뒀나?”
“들고 다니기엔 너무 눈에 띄는 병기라. 량이에게 맡아 달라 했소.”
“그치들은 또 어디다 숨겨 놨는데?”
“비밀이오.”
“비밀은 무슨. 이 일의 배후로 짐작되는 누군가의 거처 주변에 깔아 뒀겠지.”
연호정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소?”
“자네가 나를 잘 아는 만큼, 나도 자네를 엔간히 안다네.”
“무섭구먼. 옛날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잖소?”
“시선을 맞춘 거지. 게다가 자네, 이런 일 한두 번 겪었나?”
“이런 일은 못 겪어 봤소. 비슷한 걸 보긴 했지만.”
“보통 이런 종류의 일은 시간이 금이야. 신중해야 하는 동시에 빨라야 하지. 자네가 나를 보자는 건 나름대로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것일 텐데, 그럼 이미 병력 배치는 끝났다는 소리 아니겠나.”
“생각해 봤는데, 마음 고쳐먹은 게 진짜 다행이오. 가주께서 그 안목을 갖고 정적이 되셨다면 정말 숨이 막혔겠소.”
“되지도 않는 공치사는 그만두게.”
공치사나 금칠하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바꿔 먹은 지금의 모용군은 예전만큼 추진력이 넘치지는 않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더 날카로워졌다.
그만큼 날카로워졌기 때문에 추진력도 필요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모용군이 아군이 되어 너무나도 든든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그 암살자는 누군가?”
“음신의 절공을 익힌 놈이오.”
“광동?”
“그렇소.”
“재능이 미쳤더군. 솔직히, 문을 열기 전까지 기척 하나 느끼지 못했다네.”
“내 기감도 뚫고 들어오는 놈이오. 오죽하겠소.”
그 말을 들으며, 새삼 모용군은 실감했다. 연호정이 자신과 차원이 다른 고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씁쓸하면서도 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쫓아갈 대상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오히려 맹주위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자, 잊고 있던 무공의 열망이 순간순간 불타올랐다.
또 한 번 타오르는 호승심을 다독인 모용군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그래서, 자네가 생각하는 범인은 누군가?”
“그 전에 나도 뭐 하나 물어봅시다.”
“말씀하시게.”
연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사람을 말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거, 믿소?”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농담 같지는 않고.”
“농담 아니오.”
“섭혼술 따위를 말하는 것 같지도 않고.”
“물론 아니오.”
“사람은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법이야. 부모의 가르침을 받은 자식들이 부모와 똑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도, 나쁘게 말하자면 기나긴 조종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
“악의 없는 조종이라고 볼 수 있을 거요.”
“그렇겠지. 한데 갑자기 그건 왜?”
연호정은 남궁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그의 기억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덕분에 그는 남궁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자살이 맞았군?”
“그렇소.”
“자네가 죽이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정말 자살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어.”
“솔직히 눈앞에서 본 나조차 믿기지 않더이다.”
모용군이 턱을 쓰다듬었다.
“……어려운 문제인데.”
절정고수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초절정고수는 진기,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도 탈바꿈되는 경지다. 환골탈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미하지만, 크게 보면 그 또한 환골탈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 정도로 무공을 연마하면 상단전이 알아서 커진다. 운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성장은 한단 말이다.
범부보다 커진 상단전은 곧 정신력의 강화로 이어진다.
타고난 천성이 다르고 성품이 다를지언정 범부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누군가는 그걸 자존심으로도 보고, 자신감으로도 본다.
물론 그 경지에 도달하고도 타인의 말에 쉽사리 흔들리는 사람은 많다. 당장 연호정이 그 무시무시한 화술로 흔들어 댄 사람 중 태반이 무종을 넘긴 고수가 아니었나.
하지만 자살은 조금 다른 문제다.
자살이란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자살을 한다? 그건 정말 쉽지 않다.
“……?!”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모용군은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께서는 신앙에 가까운 욕망을 버렸소.”
“…….”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으리라는 건 짐작해 볼 수 있소.”
“……죽을 만큼이 아니야.”
모용군은 솔직하게 말했다.
“실제로 자살을 떠올렸지.”
“……그랬군.”
“서둘러 자신을 찾지 않았다면, 폐관 도중 목숨을 끊었을 걸세.”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짐작대로요.”
“무슨 의미인가?”
“술법이든 단순한 화술이든, 고수의 상단전을 뚫기란 몹시 어렵소.”
“그렇지.”
“그러나 한번 뚫려 버리면, 범부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는 것도 사실이오.”
“……!!”
강한 자아로 지탱되던 삶이 한순간 부서져 버린다.
당연히 그 충격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는 죽고 사는 문제가 정신력이 아닌 회복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회복되면 살고, 안 되면 스스로를 죽인다.
마치 줄 하나만 잡고 만장절애에 매달린 사람과 같은 것이다.
“무극에 도달한 고수들은 하나같이 괴짜 기질이 있소. 본래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인간의 조막만 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깨달음을 담고 살기에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병행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수도 있소.”
“…….”
“즉, 고수도 자살할 수 있소. 오히려 한번 무너지면 남들보다 재기하기가 훨씬 더 힘들어지는 것이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그럴 리가 있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명백했다. 그 자신이 이미 그러한 과정을 겪어 봤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남궁가주처럼 느닷없이 자살한 고수들을 몇몇 알고 있소.”
“…….”
“그들의 자살에는 다른 점이 많소. 하지만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공통점들도 있지. 그중 가장 열받는 건…….”
연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악의(惡意)라고 밖에 표현되지 않는 악취가 나는데, 이게 그저 느낌인지라 설명이 안 된다는 거지.”
“악의라…….”
“어떠한 목적이 있긴 할 거요. 하지만 뭐랄까…… 목적도 목적이지만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소.”
“어떤 이유를 말함인가?”
“그게 설명이 안 되니까 투덜거리는 것 아니겠소.”
모용군은 연호정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연호정의 직감이 얼마나 매서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말로써 사람을 조종하는 걸 넘어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 자가 배후에 있는데, 그 배후가 원하는 게 단순히 무림맹의 혼란만이 아닌 것 같다는 뜻인가?”
“그렇소.”
“흠.”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남궁가주에게 세뇌된 흔적은 없었나?”
“없었소.”
“대화만으로 사람을 망가트린다라…….”
“그거, 생각보다 어려운 거 아니오.”
“음?”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미쳐 버리는 데엔 단 하루면 충분하오. 나아가, 단 한 번의 사건으로도 충분하지.”
“재미있는 말이로군.”
“과거 동료에게 들었던 말이오.”
“맞는 말이야. 타인의 눈에는 뭣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건 하나 때문에 무너져 버릴 때도 있는 법이지.”
“사람은 누구나 어둠을 품고 살아가오. 그 어둠을 어떻게 자극하느냐에 따라, 성인군자처럼 살던 사람도 희대의 악한이 될 수 있소이다.”
“단 한 번의 선택이라…….”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바로 선(線)이라고 하셨소.”
고개를 주억거리던 모용군이 다시 물었다.
“해서, 자네가 생각하는 배후는 누구인가?”
연호정은 가만히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날 의심했나?”
“의심했던 사람 중 하나였소.”
“……뭐, 그럴 수도 있겠군. 남궁가주가 지껄인 세작 부대 어쩌고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말이야.”
“역시 똑똑하시단 말이지.”
“한데 보아하니 나는 용의 선상에서 벗어난 듯한데?”
“이제 확신했소. 가주께서는 배후가 아니라는 걸.”
“그 직감, 참 쉽구먼. 그래서 자네가 생각하는 게 누군데?”
잠시 말이 없던 연호정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가주께서는 무림맹에 혼자 오셨지.”
“갑자기 또 무슨 말인가? 대답이나 해 보게.”
“그렇다면, 가주께서 속해 있는 강서 상무 연합의 주인장은 언제 무림맹으로 들어왔소?”
“……뭐?”
“상무 연합의 맹주, 가주께서 직접 맹주로 추대한 그 천재가 언제 맹으로 들어왔냔 말이오.”
“……?!”
모용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네 설마?”
연호정의 표정이 무심해졌다.
“그놈 이름이 무엇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