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12)
1012화. 개변된 역사 (2)
문을 열고 들어온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주무셨는가.”
“예, 잠깐 눈을 좀 붙였습니다.”
“피곤했겠지. 워낙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자네도 신경이 곤두섰을 게야.”
“가주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묘한 말이었다.
겸양의 말처럼 들리지만, 진실을 보려 하는 자의 귀에는 액면 그대로의 뜻으로 들린다.
“앉으시지요. 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모용군이 탁자 앞에 앉았다.
홍익천은 익숙한 듯 방 안에 있는 화로에 물을 끓였다. 한곳에 구비해 놓은 찻잎을 골라내는 그의 손길은 익숙하면서도 신중했다.
홍익천이 등을 돌린 채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잘되었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홍익천의 시선에는 보이지 않는, 메마르고 서늘한 미소였다.
“지나치게 잘되었지.”
홍익천의 얼굴에도 미소가 드리워졌다.
모용군에게는 보이지 않는, 깊고 담백한 미소였다.
“그랬군요.”
“연합원들은 지금도 여기저기 움직이고 있나?”
“그랬었는데, 남궁가주께서 갑작스레 사망하셔서 맹 전체에 비상이 걸리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각자 처소로 돌아가서 대기 중입니다.”
“그렇구먼.”
“아무래도 이런 사태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 많이 불안해하시더군요. 가주님께서 떠나신 후에 일일이 찾아가 적당히 다독였습니다만, 그런 걸로 불안함이 사라지진 않겠지요.”
“자네는 역시 대단해. 젊은 나이임에도 그렇게 섬세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하, 다 가주님께 배운 처세술입니다.”
“그렇지 않네.”
모용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네는 비범했네. 근골도 뛰어났지만, 무림인이라기보다는 머리가 대단히 좋고 배짱도 있는 상인이었지.”
쪼르르.
적당히 달아오른 물을 찻잔에 따르며, 홍익천이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전에 말씀드렸지만, 사실 저는 무림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상인보다는요.”
“자네는 이미 훌륭한 무림인이라네.”
“그렇습니까.”
“물론 무공보다는 술법 비슷한 걸 익히고 있지만 말일세.”
“하하.”
모용군의 잔을 채우고, 이내 자신의 잔을 채우는 홍익천의 손길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유연했다.
“수룡신침도(水龍神針道)는 분명 뛰어난 공부가 맞습니다만, 아직도 술법인지 무공인지 모르겠습니다. 다 제가 모자란 탓이지요.”
“전에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운용법은 여느 내공심법과 달리 상단전을 기반으로 하되, 신기(神氣)를 풀어 내는 방식은 내가공부의 구결 운용법과 흡사하다고.”
“그랬지요.”
“무공을 배운 이들도 상단전을 다루지만, 상단전 자체를 주요 단전으로 삼는 무공은 들어 본 바 없네. 상단전을 주단전으로 쓰는 것은 술법의 영역이라 볼 수 있지.”
“그러나 그러한 공부로 신이(神異)한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술법이라고도 볼 수 없지요.”
홍익천이 완성된 차 두 잔을 탁자에 놓았다.
모용군은 찻잔에 손을 가져다 댈 뿐, 차를 마시진 않았다.
“무공 또한 범부의 눈으로 볼 때는 신이하기 그지없는 능력이야. 게다가 자네는 그 공부로 침술까지 행하지 않나.”
“하하, 그렇지요. 다만 침술이야 수룡신침도를 익히다 보면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이치라서요.”
“그렇다고 보기에는 실력이 뛰어나더군. 솔직히, 침술만 보면 어지간한 명의들은 상대도 안 될 정도던데.”
홍익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수룡신침도는 민중의 염원으로 탄생한 공부라, 무공에 가깝지만 술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애초에 술법이란 불운한 현실을 타파하고 싶은 민중의 마음이 대변된 공부라고 하셨습니다. 부적술이나 기도 같은 것의 연장이지요.”
“나도 그렇게 알고 있네.”
“민중의 염원이란 곧 건강히,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하여 생명의 원천인 물을 다루는 공부가 태어났고, 나아가 그것으로 몸을 돌볼 수 있어야만 한다고 사부님께선 말씀하셨지요.”
“훌륭한 분이셨군.”
“예. 훌륭한 분입니다.”
홍익천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 훌륭한 분이라도 천명(天命)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 병을 앓고 돌아가셨지만요.”
“우리 모두 그렇게 하나둘 떠나가는 것이지.”
“그렇겠지요.”
고개를 돌린 홍익천이 웃으며 말했다.
“차 드시지요. 온도는 적당히 맞췄습니다.”
“수룡신침도 말일세.”
“예? 아, 제 무공이요?”
“일전에 양 부주가 자네의 무공을 단숨에 꿰뚫어 보더군. 과연 무극에 이른 고수의 눈은 뭔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야.”
“초월자의 경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럴 만도 하지요.”
“그는 말했었네. 도문이나 불사의 술법 같지는 않다고. 그 말을 듣고 내심 무척 놀랐네. 술법의 연원까지 꿰뚫어 봤으니.”
“엄청나게 정확하군요. 하기야, 투왕께선 평생을 대륙을 돌아다니며 발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경험이 많으신 게지요.”
“그랬겠지.”
홍익천이 빙긋 웃었다.
“한데 어쩐 일로 제 무공에 대해 그리 깊이 물으십니까?”
“선사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나?”
홍익천의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함(含)씨 성을 쓰는 분입니다. 이름은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구먼.”
“왜 그러십니까?”
“그 사람이 중원 사람이 맞나 싶어서.”
날카롭고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홍익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궁금하셨습니까?”
“그 외에도 궁금한 것이 많다네. 그중 하나를 꼽자면…….”
찻잔을 잡은 모용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네를 후원해 준 진씨상회의 회주를 제외하면, 어릴 적 자네와 함께한 사람들은 왜 다 죽었을까.”
“…….”
“물론 그런 사람이야 흔하지. 이 난세에 고아가 얼마나 많으며, 재능 있는 고아를 후원해 세를 불리는 세력도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일세.”
“…….”
“그래서 의심하지 않았네. 내가 봐도 자네는 뛰어난 인재야.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어.”
모용군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진씨상회 회주는 왜 자네를 멀리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을까.”
홍익천이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모용군의 눈빛이 한없이 깊어졌다. 표정 변화 없이 차를 마시는 홍익천의 행동이, 의심을 점차 확신으로 바꿔 주고 있었다.
“그는 자네를 아들처럼 대했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나는 분명 그가 자네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았네.”
“그렇습니까?”
“상무 연합을 만들면서 모인 상회에 대해 이것저것 조사해 봤지. 사실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네. 그들 대다수가 내 뒤치다꺼리를 했었으니까. 돈 좀 벌자고 오물깨나 묻혔지.”
“…….”
“자네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상회주가 겁을 먹은 것이 아닌가 했네. 후원은 해 줬지만, 자네가 너무 커져서 혹여 내가 모르는 상회의 비밀을 밝혀 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게 아닌가 했어.”
“그러셨군요.”
“하지만 아니었군.”
찻잔에서 손을 뗀 모용군이 허리를 펴고 턱을 들었다.
“그는 그저 자네라는 사람 자체를 두려워한 것이었어. 내 말이 틀렸는가?”
“…….”
“어찌하여 대답을 못 하는가.”
“사람이란.”
홍익천의 목소리는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덧없는 존재지요.”
바뀌었다.
목소리는 같았지만, 모용군은 그의 음성이 조금은 달라졌다고 느꼈다.
“그래서일 겁니다. 연약하고 연약해서, 서로 기대어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 둘 이상이 모이면 어떻게든 화합을 통한 사회(社會)를 이루려 하지요. 그래요, 시작은 화합이지요.”
“…….”
“하지만 뭉치기 시작하면 신분도 생깁니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면 될 것을, 내가 더 편하기 위해 계급을 만들고 등차를 만들지요.”
홍익천이 미소를 지었다.
모용군의 눈에는 더 이상 호남아(好男兒)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함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가기 힘든 존재. 어느 순간, 생(生)의 장절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우월해지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
“…….”
“우월해지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불안함이 길어지면 남을 깎아내립니다. 내가 우월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
“사람이란 그토록 나약하고, 겁이 많고, 또한 멍청한 존재입니다.”
“홍익천.”
“남궁가주가 왜 죽었을까요?”
“……!!”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갑작스레 남궁인의 죽음을 입 밖에 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즉시 홍익천을 포박하려던 모용군의 손이 움찔했다.
홍익천은 여유롭게 찻잔을 내리며 말했다.
“남궁인은 최고가 되려 했습니다. 우스운 것은,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최고가 되려 하는지조차 모르는 반편이었다는 것이지요.”
“너…….”
“그저 최고만이 그가 품은 욕망이었습니다. 아마 남궁이 천하제일세가가 되어도, 그 자신이 천하제일검이 되어도 만족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 그의 눈에 비치는, 그 자신과 연관된 모든 것이 최고가 되어야 했을 테니까.”
“……!”
“남궁이 천하제일 세력이 되고, 그 자신이 천하제일인이 되고, 나아가 그의 자식들 또한 최고가 되기 전까지 그는 절대 멈추지 않았을 겁니다.”
홍익천이 환하게 웃었다.
“맹목적이기까지 한 최고로의 집착. 그 위태로운 외줄 타기를 하는 그를 향해, 저는 그저 후, 하고 바람을 불어 주었지요.”
“…….”
“그 어이없을 정도로 미약한 바람 한 줄기에, 남궁가주는 줄 밑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모용군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지간히 화가 나도 타인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준 적 없던 그였다.
그만큼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 역시 홍익천을 오랫동안 믿을 만한 후배이자 배울 만한 청년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개심한 후 그 중심이 되어 준 젊은 인재.
그를 위해서 살아 본 적은 없지만, 한 번씩 공허할 때 귀신처럼 나타나 술 한잔하자고 말해 준 이 청년 덕분에 올곧게 바로 설 수 있었다.
한데 그가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인간이었다니.
“처음으로 실패했습니다.”
홍익천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아니, 다른 표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은 너무나도 인간다운 가면 같았지만, 동시에 가면이 아니기도 했다.
죄책감도, 서글픔도, 동정심도, 박애도 그 무엇도 없는 얼굴.
아리땁기까지 한 한 줄기 미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은 삼라만상의 모든 마음을 담아내고 있는 듯했다.
“처음으로 한 대상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조종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주님입니다.”
“너!”
“술에 취해 나의 변화가 정녕 올바른 것일까, 라고 중얼거리던 가주님께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왜 변해야 합니까? 있는 그대로도 좋은데.
모용군은 그 말을 바로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왜 변해야 합니까? 있는 그대로도 좋은데.”
“…….”
“지금껏 보아 왔던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제가 아는 가주님의 성정이라면 그때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폭주했어야 했지요. 그간 억누르고 참아 왔던 모든 것이 폭발해, 예전보다 훨씬 더 음험해지고 사나워졌어야 했습니다.”
“…….”
“가주님은 달랐어요. 오히려 웃으며 제게 이렇게 말했지요.”
죽다가 살아났는데, 뭐라도 변해야 멍청하다는 소리 안 듣지.
“죽다가 살아났는데, 뭐라도 변해야 멍청하다는 소리 안 듣지, 이 사람아.”
모용군의 눈이 충혈되었다.
“최초로 제게 좌절감을 안겨 주신 당신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한 번 죽음을 겪고 돌아온 사람이라, 뭐가 달라도 달랐던 걸까요?”
“…….”
“사람이 미치기까진 하루면 족합니다. 한 번의 사건으로 충분해요. 가주님께서는 이미 그 과정을 거치신 모양입니다.”
홍익천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같이 온 사람들을 부르세요.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