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13)
1013화. 개변된 역사 (3)
“얘기가 길어지는군요.”
그림자 진 담벼락에 선 강량의 말에도 연호정은 미동이 없었다.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고성도 들려오지 않고, 얘기도 길어지고. 이거 확실한 거 같은데요?”
“…….”
“게다가 뭔지 모를 기운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네요. 형님도 그러십니까?”
“…….”
“형님?”
연호정을 돌아본 강량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형님?!”
연호정은 부릅뜬 눈으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강량의 말은 연호정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뭐지?’
모용군과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은 후, 그는 말 못 할 익숙함을 느꼈다.
정확히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감각.
남궁인의 자살, 그리고 옛 수하들의 자살에서 느꼈던 악취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자살 건은 악취였지만, 지금은…….
‘왜 익숙하지?’
두근두근.
심박수가 올라갔다.
손발이 차가워진다. 귀밑이 후끈거리고, 목덜미가 뜨거운 듯 차가운 듯 괴상한 변화를 일으켰다.
‘어째서……?!’
이 익숙함은 분명 긍정적인 기억에 기인했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은 그에게 있어 어떠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될 수 없었다.
무엇에 익숙함을 느끼는가.
왜 이리 심장이 두근거리는가.
‘기억이 흐릿해.’
연호정의 기억력은, 쓸데없는 정보는 일절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만 쌓아 둔 보고와도 같았다.
그런데도 기억이 이렇게 흐릿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죽어 나간 부하들의 이름과 소속 전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였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그때였다.
핏!
연호정의 가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황룡기가 꿈틀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모든 기척이 감춰지도록 애써 잠가 놓았던 단전에서 한 줄기 진기가 새어 나왔다.
그 진기는 서서히 목을 지나 머리로 향해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
그제야 연호정은 이 익숙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수룡신기(水龍神氣)?!”
그렇다.
저 건물을 은은하게 둘러싸고 있는 수기(水氣)는 수룡신기와 판박이였다.
산중인 데다 근처에 커다란 우물도 있으며, 산 그림자가 진 지역이라 유독 습기가 많은 곳이었다. 하여, 대기에 퍼진 수기의 농도가 애초에 짙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정말 수룡신기가 맞나?!’
수룡신기, 정확히는 수룡신침공이라 부르는 이 무공은 무공보다 술법에 가까운 공부였다.
이유는 명백했다. 하단전이나 중단전이 아닌 상단전을 주단전으로 쓰기 때문이었다.
상단전은 그 특성상 어느 한 기질의 힘을 담아 놓기 힘든 곳이었다. 상단전에 모이는 모든 기운은 신기(神氣)라 이름 붙여진 영혼의 힘이다.
영혼의 힘은 곧 자연기와 상통하여, 대자연에서 가장 순후하고 자연스러운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특정 기운을 모으진 못한다.
‘그’도 그러했다.
수룡신기는 상단전에 머무는 진기가 아닌, 상단전의 신기로 즉각 발출되는 형태의 기였다. 말이 진기(眞氣)일 뿐, 실제로 진기라 부를 만한 특성이 없다는 것이다.
즉, 수룡신기나 일반 수기나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구현되는 미지의 형태가 미미하게 수기와 다르다. 그래서 연호정조차 위화감을 느꼈을 뿐, 건물 전체에 흐르는 수기를 수룡신기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싸움을 싫어하고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피할 수 없는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우긴 했으나, 애초에 무공 자체를 자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는 무공보다는 흑암제의 호위라는 위치와 최고 수준의 의술로 더 이름이 높은 흑도의 무신(武神)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마(魔)로 오인될 수 있는 흑제성의 정체성을, 신궁 묵비와 함께 바로잡아 준 보이지 않는 흑도 영웅이었다.
‘설마.’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그때였다.
파지직!
건물 주변으로 선명한 푸른 뇌기가 일렁였다.
신호였다. 연호정은 곧장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로, 사방에 흩어져 숨어 있던 강량과 진양, 범오와 사마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들어갈 테니 여기서 기다려.”
돌아보지도 않고 그리 말한다.
그러고는 동료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건물의 대문을 힘으로 열고 들어가 정방까지 도달했다.
‘짙다.’
수기가 짙었다.
아니, 수룡신기가 짙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짙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조절하지 않은 이상, 이 정도로 수기가 풍부해질 수는 없는 법.
연호정의 손이 정방의 문에 닿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렇게 천천히 문이 열리고.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 연호정의 눈이 모용군의 뒷모습과 그 너머에서 꼿꼿하게 앉아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을 포착했다.
“……!!”
연호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오셨군요.”
그 목소리, 그 말투.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이지요?”
처음이 아닌 사람이 처음이라 말한다.
회귀한 후, 상대만 모를 뿐 자신은 아는 과거의 인연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런 반응은 익숙하다. 익숙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리둥절하지 않은 눈으로, 지극히 여유로운 얼굴로, 너무나도 선명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들으니 오히려 당황한 것은 자신이었다.
‘이럴 수가.’
눈매, 피부, 콧대, 입술, 턱.
정갈하게 뒤로 넘긴 머리카락부터 체격, 손가락의 마디까지.
자신이 기억하는 ‘그’가, 기억보다 더 젊고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눈앞에 있었다.
“……함무헌(含貿獻).”
남수활의(藍手活醫) 함무헌.
흑제성 오대신장의 일인이자 흑암제 연호정의 호위대장이며, 흑도제일의(黑道第一醫)로 불렸던 거물.
쪽빛 마의(麻衣)를 좋아해서 언제나 백마의를 직접 염색해 입었기에 손끝이 항상 은은한 쪽빛으로 물들어 있어 별호도 남수(藍手)로 불렸던 남자.
아직 찾지 못했던 오대신장의 마지막 동료는.
믿을 수 없게도 적(敵)으로 나타났다.
“함무헌…… 신기하군요. 당신이 어떻게 수룡신침도의 마지막 전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겁니까?”
순수하게 놀랐는지 홍익천의 눈도 살짝 커졌다.
그게 전부였다. 입가에 떠오른 그려 놓은 듯한 미소는 여전했다. 죽어서도 바뀌지 않을 표정이었다.
순간 연호정은 함무헌이 과거 특유의 여유로운 목소리로 지저귀듯 토해 내던 말들을 떠올렸다.
‘저는 싸움이 싫습니다. 그냥 사람을 관찰하는 게 좋죠.’
‘행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가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그저 따를 뿐이지요.’
‘침 맞으실 시간입니다. 언제나처럼 팔을 걷어…… 으갸갹!’
‘……저 때문입니다. 저 때문에, 환야가 죽었습니다.’
웃었고, 진지했고, 웃겼고, 슬펐던 그의 목소리.
그리고 습관처럼 자주 내뱉던, 그러나 한 번도 흘려들을 수 없었던 그 말.
‘사람이 미쳐 버리는 건 하루, 아니 한 번의 사건으로 족해요. 성주님도, 저도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연호정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함무헌!”
“설마 수룡신기를 느끼신 겁니까? 그거 대단하군요. 일반 수기와 수룡신기의 차이는 성천의 강자라도 느끼기 힘들 텐데…….”
홍익천이 미소를 지었다.
“과연 패왕. 고금 제일의 재능을 타고난 희대의 풍운아라 불릴 만합니다.”
“너는…….”
“다만, 수룡신침도를 알지 못하면 애초에 수룡신기도 알 수 없을 텐데.”
홍익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바로 선 그가 조금은 진지한 눈으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수룡신침도를 알고 있는 겁니까?”
모를 수가 없지.
“어떻게 수룡신침도의 마지막 전인 이름까지 알고 계십니까?”
네 이름은 거짓이었군.
“왜 저를 함무헌이라고 하시지요?”
네 거짓이 우리에겐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저를 아십니까?”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
“물론 저는 당신을 잘 압니다. 당신이야말로…….”
홍익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와 저를 만들어 준 사신(邪神)보다 더한 악마입니다.”
“……틀렸다.”
“그렇습니까?”
“악마는 너였다.”
이제야 깨달았다.
연호정은, 이제야 진정 깨달을 수 있었다.
부하들의 석연치 않은 죽음의 이유를.
백도 정파와의 연합이 결정적인 순간에 몇 번이고 무산되어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흑제성 역사의 이면에 존재하던 그림자를.
사음교주를 잡으러 가던 날 새벽, 부상당한 진양과 소정광을 대피시킨 함무헌은 묵비와 강량을 데리고 첩보로 받은 사음교의 보급선을 끊어 버리겠다며 처음으로 먼저 나섰다.
그렇게 연호정은 모용군과 당관, 셋이서 함께 사음교주와 싸웠다.
그리고 그 시각에 신궁과 검왕, 남수활의는 흑제성의 타격대를 이끌고 사음교의 보급선을 끊으러 갔다.
과연, 그때의 묵비와 강량은 살았을까?
그들과 함께했던 타격대, 충파흑표대(衝破黑彪隊)도 죽지 않고 살았을까?
그들은 정녕, 보급선을 끊으러 간 것이었을까?
알 수 없다.
연호정은 진정 알 수가 없었다.
역사란 무엇인가. 회귀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또 무엇인가.
회귀를 함으로써 정녕 모든 역사가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똑같은 두 개의 세상이 있어, 그 자신만 과거로 돌아오고 기존의 세상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 시간대의 세상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 세상에서 내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세상은 어떤 꼴이 되어 버렸을까.
“사신(邪神)이라 했더냐.”
연호정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분해졌다.
들끓는 기도도, 충혈된 눈도, 뿜어져 나오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도 완전히 차분해졌다.
모용군은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꼈다.
홍익천의 정체보다, 연호정의 엄청난 변화가 더 큰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이보게, 연 소부주.”
“사신이라 함은 사이하고 사악한 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사신은 호사가들이 말하는 그런 사신과 달라.”
홍익천의 눈이 깊어졌다.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군요. 당신은 정말이지, 참으로 독특한 사람입니다.”
“당당히 스스로를 드러냈으니, 네놈의 소속도 말해 보아라.”
“이미 짐작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소속이 어디냐.”
홍익천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짐작을 넘어 확신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러고도 확인차 다시 묻는 그 모습은, 어째 평범한 사람들과 별다른 것도 없군요.”
“…….”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
“저는 영음산(影陰山)의 산주이자 신(神)의 혈족을 퍼트릴 의무를 지닌 신성한 제사처(祭司處)를 관장하는 자의 씨앗에서 발화했습니다.”
“…….”
“사왕(邪王) 중 유일하게 중원 땅에서 그 호칭을 얻은 자, 최초로 대교전(大敎殿)에서 사신을 영접한 삼십팔 대(三十八代) 무간지수(無間之秀).”
“…….”
“이름 없이 그저 제삼사왕(第三邪王)이라 불리는 사람이 중원의 절대자를 뵙습니다.”
보란 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홍익천.
그의 모습을 보며, 연호정은 또 하나 깨닫는다.
역사는 바뀌었지만, 진실은 바뀌지 않았음을.
사람은 바뀌었지만, 악마는 바뀌지 않았음을.
이놈이 악마였음을, 그리고 악마가 자신더러 악마라고 부른다면 능히 그리 살아 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콰드드득!
저 멀리 강량의 손에 들려 있던 광룡부가 돌풍을 일으키며 날아와 연호정의 손에 잡혔다.
“질 나쁜 것들끼리의 개싸움, 어디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