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14)
1014화. 개변된 역사 (4)
“허억! 허억!”
청년은 숨을 헐떡였다.
말 못 할 감정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은 천 근의 바위를 든 것처럼 덜덜 떨렸다.
덜덜 떨리는 손은 꽤 더러웠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피와 흙이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더러운 손끝에는 손톱 몇 개가 빠져서 벌건 속살이 드러났다. 왼손가락 소지는 부러져서 옆으로 꺾였다.
꽤 끔찍한 몰골이었다. 당연히 고통도 심할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됐다.’
청년은 신기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흔한 잡것이라고 생각했다. 뇌물이랍시고 슬그머니 비단 주머니 하나를 건네길래, 그 소박한 크기에 저도 모르게 혀까지 찰 뻔했다.
하지만 비단 주머니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순간, 청년은 ‘그’가 흔한 잡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주 흡족했고, 술 한잔하자는 약속도 잡았다.
다음날 곧장 술자리가 열렸다.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눈부신 미녀들이 청년의 수발을 들었다. 처음에는 제법 점잔을 떨었지만, 술이 들어가니 이성이 사라졌다.
‘그’는 사람 기분을 맞출 줄 알았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질펀하게 논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환락으로 가득한 밤을 보냈다.
그 하루로 끝이었다. 청년에게 ‘그’는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청년은 ‘그’에게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 고작 며칠 만난 것이 전부인데도 ‘그’는 오랜 지음(知音)처럼 청년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그리고 깨닫게 해 주었다.
자신이 죽어서도 패배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형의 그늘, 아비의 그늘.
나아가 조부의 그늘까지 겹겹이 드리워진 이 가문에서, 청년의 세상은 도래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 주었다.
청년은 한 번도 자신의 세상을 꿈꾼 적이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최고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가문을 벗어나면 최고가 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가문 밖 세상에 온갖 괴물들이 득실거렸다. 성천까지 갈 필요도 없이, 출중한 후기지수라는 청년을 눈 아래로 보는 동년배들이 수두룩했다.
‘그’는 그 사실을 알려 주었고, 청년은 외면해 왔던 진실을 목도하며 극한의 절망에 빠졌다.
최고가 될 수 없는 인생.
그 이외의 것은 한 번도 염두에 둬 본 적 없었던 올바르게 어긋난 인생.
다만 그런 그의 인생에도 한 줄기 빛이 내려온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만났을 때였다.
그녀에게서는 빛이 났다.
가문이 주는 중압감,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에서 자유로운 그녀는 아름다웠고 당찼으며, 그 누구보다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청년은 단숨에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단순히 피 끓는 청춘이라서가 아니었다. 청년에게 있어 그녀는 연심을 품은 대상 이상이었다.
짤막하게나마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깨에 드리워진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두 눈은 밤하늘의 별빛보다 초롱초롱하고 휘영청 뜬 달보다 아름다워서, 차마 똑바로 마주할 수 없는 태양과 같았다.
그때부터 청년은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 노력 덕분에 유명한 후기지수가 될 수 있었고, 가문 내에서는 그전에 없었던 기대도 받아 보았다.
청년은 세상을 공부했으며, 세상이 가문을 어떻게 보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최고가 되기 위해 가문과 자신의 위명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도 깨달았다.
하지만 청년의 성장만큼이나, 아니 청년의 성장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그녀는 높게 올라갔다.
아니, 원래부터 높이 있었다. 청년은 그렇게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새로웠다. 나아가 나이가 차니, 성숙한 여인의 자태를 보여 주기까지 했다.
청년은 생각했다. 내가 과연 그녀에게 어울리는가?
가문의 명성은 이쪽이 더 높았다. 그러나 청년은 자신이 없었다.
해서 그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언젠가 그녀와 같은 위치에 올라서게 되면, 그때야말로 당당하게 청혼하리라. 청년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녀가 혼인을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그녀의 혼처를 막아 달라고. 그녀가 속한 가문의 힘을 빼앗아서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달라고.
아버지는 청년의 연심에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그녀의 가문이 지닌 힘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청년의 연심을 ‘허락’했고, 이후 그녀의 가문은 조금씩 빛을 잃어 갔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높게 올라가면, 그녀와 당당하게 마주 서면, 해서 그녀와 혼인하게 되면 두 가문 모두 강호의 위대한 세도가로 역사에 이름을 새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때, ‘그놈’이 나타났다.
안휘와 인접한 강소 땅에서 세(勢)도 작은 가문의 장자로 태어난 재능 없는 머저리.
그 재능 없는 놈은 어느새 고루거각이 되었고, 산봉우리가 되었으며, 지금은 하늘에 이르렀다.
호사가들은 그를 백 년, 아니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고 불렀다. 불쾌하기 그지없는 호칭이었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존재라고 했다.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녀’가 문제였다.
그녀가 그 머저리 같은 놈과 붙어 다니고부터 청년의 마음속에 드리워졌던 무언가는 뒤틀리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질투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살의를 느꼈다.
첫 무림맹 창립 문제로 오던 길에 마주쳤을 때, 칼을 뽑아 목을 베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얼마나 꾹꾹 눌렀는지 모른다.
심지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그 살기 때문에 한차례 난리가 나기도 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아버지는 자신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했다. 폐관에 들었던 형이 돌아왔으니, 능력도 없고 주제도 모르는 차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 같았다.
청년은 망가져 갔다.
조부에게 끌려가 상념을 잊고 단련을 받아 성장했지만 그뿐이었다. 무공은 성장했으되 청년의 속은 예전보다 훨씬 더 비틀려 있었다.
그리고 지음이 된 ‘그’는, 청년에게 현실을 보여 주었다.
가문에서도, 무림맹에서도, 중원 무림 전체에서도 청년이 설 자리는 없다는 걸 보여 주었다.
이미 패배자가 되었음을, 한 번뿐인 인생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음을 상기시켰다.
청년은 죽음을 떠올릴 정도의 절망을 느꼈다.
지음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실패자였다. 패배자였고, 무능력한 병신이었다.
그때, 지음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한 번뿐인 인생, 가문의 이름값에 짓눌려 평생 그리 살 텐가?’
‘자네가 내 마음을 다 알아도, 내가 느끼는 무게감은 알 수 없을 걸세.’
‘모르지. 자네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을 지고 있거든.’
‘그게 뭐지?’
‘중요한 건 내가 아니야. 그렇게 계속 실패하면서 살 속셈이라면, 인생의 마지막 한 방을 노려 보는 것이 사내의 의기 아니겠나.’
‘한 방이라니? 내게 기회라는 것이 남아 있나?’
‘그녀와 도망치면 돼.’
‘불가능해.’
‘가능하네. 강서 땅은 우리 상무 연합이 꽉 쥐고 있거든. 그곳에 신방을 차려 줄 테니, 그녀를 데려가 함께 살게.’
‘그럴 수 없네. 가문, 나아가 이 세상이 나를 잡으려 들 걸세.’
‘세상이 자네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네가 세상을 무너트리고 홀로 고고히 살아가면 그뿐이야.’
‘세상을 무너트리다니?’
‘자네에게는 무공도, 학식도, 가문도 다 필요 없네.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녀뿐이야.’
‘……맞아.’
‘가문이 자네의 어깨를 짓누른다면, 가문을 날려 버리게. 무림맹이 자네의 머리를 무겁게 한다면, 무림맹을 쳐 내게.’
‘어떻게?’
‘자네는 형님의 폐관 도중 부친과 많은 일을 벌이지 않았나? 부친과 공유하는 가문의 여러 비밀이 있을 거야. 그것을 두고 담판을 지으면 되지 않겠나.’
‘내 가문의 치부들을 갖고 아버지를 협박하라고?’
‘그 아버지는 자네를 버렸어.’
‘……!’
‘인생의 마지막 기회야. 나는 세상이 어찌 되든 상관없네. 그저 내 꿈을 위해 목숨을 걸 뿐. 그럼 자네는, 자네가 품은 꿈을 이대로 포기할 건가?’
‘내 꿈…….’
‘자네의 꿈은 무엇인가?’
‘내 꿈은…….’
‘이대로 가다간 그녀가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길 걸세. 그 사내가 연가의 장남이 될 확률이 몹시 높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안 돼!!’
‘자네가 결단을 내린다면 내가 도와주지. 자네가 그녀를 데리고 종적을 감춰도 무림맹이 절대 자네를 찾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네. 물론 자네도 나름의 역할을 맡아야겠지만.’
‘……그 방법이 뭐지?’
‘우선, 자네 아버지와 만나게 해 주게.’
‘만나서 어쩌게?’
‘자네 대신, 자네를 포기하게 만들 것이야.’
‘어떻게?’
‘자네가 내게 알려 줘야 해. 자네 아버지를 밀어붙일 수 있는 정보들을.’
지음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끝냈다.
‘내게도 목숨을 건 한판 승부가 되겠지만, 친구 좋다는 게 어딘가? 만약 자네 부친 손에 내가 죽으면, 그때는 다른 방법을 모색도록 하게.’
‘그’는 진실로 지음이었다. 구제할 길 없는 자신의 삶에도 희망이 있음을 알려 준 은인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버지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그 많은 것을 가능케 해 주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청년은 강력한 희망과 몽상에 가까웠던 꿈을 거머쥘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리고 지금.
친구가 친구의 역할을 했듯, 자신은 자신의 역할을 마쳤다.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다고. 나는 내 삶을 되찾을 거야. 그녀를 찾을 것이다.”
혹여 내공 경파를 느끼고 찾아오는 고수가 있을까 봐 맨손으로 땅을 팠다.
손가락 하나가 부러지고 손톱 몇 개가 빠졌지만, 그래도 괜찮다.
넘치는 긴장은 환희가 되었다. 그 몇몇 땅에 묻어 둔 물건으로 인해, 무림맹은 절대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죽은 아버지는 말할 것도…….
‘……!!’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새삼스레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이 그의 정신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동시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자신은 자신의 일을 마쳤다.
남은 것은 그녀 하나뿐이다.
“기다려라, 아연아. 잠시, 아주 잠시는 불안할 수 있어. 하지만 괜찮을 거다. 내, 누구보다도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청년은 품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아버지와 담판을 짓고 돌아온 지음이 건네준 물건으로, 강력한 화기(火氣)가 뭉친 영약이라 했다.
일순간 내공을 두 배로 증폭해 주는 물건이지만, 반 시진 후에 모든 내공이 소모되어 이틀 동안 운기가 안 되는 물건이라 했다.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위험 없이 이득만 챙길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자신의 두 배 되는 내공이라면, 그 양만으로 구대문파의 장문인급을 상회할 수 있다. 그 정도 힘이라면 그녀를 데리고 오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다.
“내가 행복하게 해 주마. 나를 위해서, 그리고 너를 위해서 이게 낫다는 걸 똑똑한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청년은 비틀거리며 땅속에서 나왔다.
흙투성이라 모양이 조금 빠지지만, 단장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청년, 남궁현은 숲길을 통해 군사부 쪽으로 향했다.
반흑파 무사들이 광장에 집결했다가 공공대사의 단호한 대처에 흩어지기 시작한 바로 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