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15)
1015화. 개변된 역사 (5)
“그것이었군요.”
광룡부를 보는 홍익천의 동공이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놀라운 마병(魔兵)입니다. 천하의 장인이 제련한 신병(神兵)이 피와 살기로 다시 제련되었어요. 탄생한 지 일백 년도 되지 않은 병기가, 마치 고대의 마병처럼 무시무시한 사기(死氣)를 품고 있군요.”
담담하려 노력했고 실제로 담담해졌지만, 홍익천의 말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흐트러졌다.
광룡부 얘기 때문이 아니었다. 홍익천의 저 말투를 듣고 있자면, 정말이지 흑제성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묵비, 강량, 진양, 소정광과는 또 달랐다.
남수활의, 마지막 오대신장 중 하나이자 자신의 벗이었던 자가 사실은 적의 간자였다는 사실에 더더욱 큰 영향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쿵!
광룡부가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창봉 끝이 한 자 정도 파묻혔다. 워낙 날이 무거워서 기울어질 듯했는데, 딱히 그런 기색은 없었다. 놀라운 균형이었다.
홍익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흉악한 마병을 휘두르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휘둘러야지. 하지만 이 도끼날에 네 피가 묻는 시기는 우리가 정한다. 네가 정할 것이 아니야.”
“……역시.”
홍익천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입가의 미소는 그대로지만, 눈빛이 바뀌니 표정 전체가 달라진 듯했다.
“역시 당신은 어렵습니다. 그간 조사한 당신 성격이라면 일단 팔 하나부터 날리고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정말 예상을 벗어나는군요.”
“그러는 너도 확실히 비범하다면 비범하구나.”
연호정의 목소리는 유독 차가웠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 같지 않아.”
“그렇습니까?”
“뭔가 대단한 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야.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군.”
“글쎄요. 두려워는 합니다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홍익천의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갔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명백한 사실을 잊고 삽니다. 잊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재미있고 치열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치열한 건 몰라도 재미있진 않군. 네놈의 짓거리 말이다.”
연호정이 아무 빈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이자에 대해 알고 있는가?”
연호정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그간 함께 조직을 만들었던 동료이자 멋진 후배라고 여겼던 홍익천에게 ‘이자’라고 하였다.
충격은 충격일 뿐이다. 모용군은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미 그에게 홍익천은 적이었다. 충격이나 일말의 아쉬움 따위는 사치에 불과한 것. 흔들리던 그의 정신은 어느새 강철처럼 완강하게 변모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연호정의 대답 역시 모용군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연호정이 아는 사람은 함무헌이지 홍익천이 아니다.
물론 홍익천을 보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그것을 수습하는 속도는 빨랐다. 충격의 흔적은 남았으나 그건 그거고 현실은 현실이다.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고, 무림맹이 마비되고 있으며, 자신이 누명까지 썼다. 냉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차분한 눈빛을 보며, 홍익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이 참 닮았…….”
“수룡신침도를 알고 있는 듯했네.”
모용군은 홍익천의 말을 끊고 연호정에게 말했다. 마치 홍익천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듯했다.
분명 필요한 행동이었다. 홍익천은 무서운 언변으로 사람을 자살까지 하게 만든 이였다. 굳이 말을 섞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홍익천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다른 어떤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이전과 같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수룡신침공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게 그거지만요.”
“이자는 조금 전 함무헌이라는 자가 수룡신침도의 마지막 전인이라고 했네. 그리고 자네는 함무헌이라는 이름을 먼저 언급했어.”
“얘기가 깁니다. 달리 설명하기도 애매하고요. 중요한 것은 제가 수룡신침공, 아니 신침도를 알고 있다는 것이며.”
연호정이 홍익천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자는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홍익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 수룡신침도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연호정은 모용군과 달리 홍익천과의 대화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알고 있지.”
“수룡신침도에는 많은 비기가 있습니다.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비기들도 많지요.”
“그랬지.”
그랬다는 말은 참으로 묘한 대답이었다.
연호정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남수활의 함무헌을 동료로 삼을 생각을 하기 전, 이미 수룡신침공에 대한 온갖 정보를 흑도의 정보력을 동원해 알아냈다.
홍익천 말마따나 수룡신침도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여러 비기가 있었다. 그 비기들은 지극히 위험한 순간에나 쓸 수 있는 것으로, 제대로 쓰기만 한다면 어떤 위험 상황도 헤쳐 나올 수 있는 놀라운 기술들이었다.
이후 함무헌이 동료가 되었으나, 함무헌은 자신의 그 많은 비기 중 절반도 연호정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수룡신침도 역시 일인비전이다. 아무리 친해도 사제지간이 아닌 이상 함부로 외부에 유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모든 진실을 깨우친 연호정은, 일인비전이라 감춘 게 아니라 그저 함무헌 본인이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때의 함무헌과 지금 이놈은 다르다.’
연호정의 눈도 옹이눈은 아니다.
선천적인 면도 있지만, 살벌한 흑도에서 정점을 찍은 남자답게 그 누구보다도 눈치와 머리 회전이 빨랐다.
흑제성 시절 함무헌은 믿을 만한 남자였다.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속내를 진심으로 토해 내는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연호정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시의 함무헌은 분명 세작이었으나, 함께 지내면서 흑제성에 어느 정도 감화된 부분도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임무와 우의(友誼) 사이에서 몇 번이나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연호정은 분명 그랬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지금의 그는 흑제성 때의 그와 다르다.
과거의 정보는 연호정에게 경각심과 대처 능력을 떠올리게 했을 뿐, 그에 대한 미련을 되살려 주진 못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연호정 당신에게는 쓸데없는 허세 따위 통하지 않을 겁니다. 수룡신침도의 여러 비기 중, 지금 당장 두 분에게서 벗어나 도망칠 방법이 있다고 말한들 믿지 않으실 테지요.”
“아니, 믿는다.”
“…….”
“너는 여러 방법을 알고 있어. 너에게 허세는 그냥 허세가 아니야. 상대를 방심시키려는 의도 따위로 허세를 부리지도 않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너는 그저 타인의 반응을 보고 분석하며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 인생의 재미를 느끼는 변태일 뿐이다.”
홍익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연호정의 말에 충격을 받았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놀라움이었다. 이 연호정이라는 사내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진면목을, 무려 첫 만남에서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 사신조차도 그러했다.
“당신은 정말이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당신과 같지 않아요.”
“누구도 나와 같지 않다면 뭐 하러 연구를 하나. 네가 아는 세상에서 배제하면 그뿐인데. 그렇지 않나?”
“…….”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홍익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게도 볼 수 있군요. 하지만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또 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당신에 관한 연구 자료는 아주 소중합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벗어나 보시게?”
“모호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이 내 비기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한데, 이상하게 써 볼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네 세 치 혀에 당한 사람들 모두가 그처럼 막막한 감정을 느꼈겠지.”
홍익천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 이런 경험이 최초는 아닙니다. 충격받으라고 하는 말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충격받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신기할 뿐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너는 인간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
“그저 죽음이 두렵지 않을 뿐이야.”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너는 두렵지 않아.”
“어디를 봐서…….”
“그조차 흥미로울 뿐이지.”
순간 홍익천의 입이 다물어졌다.
자신의 죽음조차도 흥미의 일부로 여긴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하겠지만, 홍익천은 다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는지 홍익천이 탄성을 질렀다.
“……그렇군요.”
“…….”
“당신 말이 맞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에요.”
“칭찬 고맙군.”
“해서, 이제 저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모용군이 차갑게 말했다.
“당연히 죽여야지. 물론 모든 전말을 밝히고 나서.”
“모용가주께서는 이리 말씀하시는군요. 연호정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전말을 밝히는 건 중요하지. 다만 죽이고 말고는 우리 소관이 아니야. 여러 사람과 대화부터 나눠 봐야겠지.”
“냉철하시군요. 이런 상황에서조차.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 말로 띄워 줘 봤자 끝까지 냉정을 고수하느라 실수하는 머저리는 아니다. 네 말마따나 눈 돌아가면 나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거든.”
한 치의 빈틈도 없구나.
홍익천은 생각했다. 연호정이란 사람은 정말 걸물이라고.
그 누구도 이런 반응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얼핏 들으면 가볍게 툭툭 내뱉는 듯하지만, 파고들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길을 모조리 차단하는 말뿐이었다.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 광룡부를 들었을 때는 연호정이 또렷하게 보였다면, 지금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본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악마가 따로 없군.’
사람의 사고 능력이 아니다.
연호정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비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말 그대로 악마나 다름이 없었다.
“당장 죽일 생각이 없다면 저를 잡아가겠다는 뜻입니까?”
“그래야겠지.”
홍익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일각만 더 참아 주시겠습니까? 이 차, 맛이 아주 좋거든요. 향과 맛을 다 안고 가고 싶습니다.”
모용군이 입을 열려 할 때.
“좋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고맙습니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연 소부주. 어쩌자고 그러는가? 이놈이 뭔가 또 술수를 부렸을지도 모르잖나.”
“다 이긴 판입니다. 이런 놈은 또 없어요. 찻잔을 비울 시간 정도는 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모용군이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연호정은 말없이 팔짱을 낀 채 홍익천을 바라보았다.
홍익천은 천천히 차를 홀짝였다. 정말 맛과 향을 음미하는 듯했다.
이런 순간에서조차 저런 여유를 부린다는 것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괴하게 태어났든 어쨌든, 저런 부분만큼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각이 다 되어 갈 즈음.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어나라.”
“옷 좀 입겠습니다. 날이 서늘해서…….”
“더 기다려도 폭발은 없어.”
순간 홍익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 그걸 어떻게?”
“너는 실수했다.”
“어떤 실수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누구와도 똑같이 반응할 거라고 생각한 점이 네 실수다.”
“……!”
“설마하니, 그냥 두고만 볼 줄 알았더냐?”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검제 선배를 만나러 갈 거라며 남궁인의 입으로 말을 하면, 자연스레 나의 선택지는 그쪽과 멀어지기 마련이지.”
“……!!”
“네 최대 실수는 내가 고자질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는 거다. 오히려 그럴 때, 나는 끝까지 가거든.”
* * *
남궁현이 군사부 건물 뒤, 작은 숲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딜 그리 분주하게 가느냐?”
깜짝 놀란 남궁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순간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은 남궁승의 얼굴은 피로로 가득했다.
“왜? 군사부에 볼일이 있었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