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18)
1018화. 되찾아 가는 역사 (2)
형당 뇌옥으로 가는 길.
아무 말 없이 길을 걷던 제갈아연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사부에서 형당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워낙 상황이 상황인지라 꽤 많은 무사가 주위를 오갔다.
맹 내 무사들이라 상부의 명령을 받지만, 속으로 흑도를 증오하고 혐오하던 이들이 많았다. 그중엔 온건파도, 급진파도 있었으며 와중에 흑도와의 연합에 아무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오가는 무사 중 삼 할 이상이 애써 연호정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신분이 신분이라 반흑파와 행동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내심 흑도 배제를 지지하던 이들이었다.
오히려 그들로서는 다행이었다. 만약 반흑파와 함께 행동했다면 피 말리는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을 것이다.
그래도 껄끄러움이 있어, 차마 연호정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제갈아연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알까? 네가 흑도로 전향한 게 모두의 미래를 위한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는 걸.”
제갈아연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가는 무사들 모두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같이 일류의 내공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 없다. 그런 걸 알아주길 바라서 이적한 건 아니지만.”
“그걸 안다면…….”
“사람은 이성보다 감성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하지 않냐.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느끼는 게 중요하지.”
“그래, 그렇지.”
“내 이름이 진창에 뒹굴어도 상관없다. 훗날 삼교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해.”
“넌 너무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어.”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니라 목표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이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야. 무림맹 안에서도 많은 사람이 나처럼, 혹은 나 이상의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그래?”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대단한 거다. 나 정도는 별것도 아니야.”
무사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연호정 말마따나 그들은 연가의 장남이 빛나는 명예를 내려놓고 묵룡부에 투신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 자체가 배신이라고 했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목소리는 없었다. 삼교가 본격적으로 공포를 뿌려 대고 중원 곳곳에 워낙 많은 사건이 터지는 상황이었던지라, 오죽하면 그러겠냐며 외려 연호정의 결정을 용기 있는 희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같은 사실을 두고도 시간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면 해석도 달라지는 법이다.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었다.
“세상 참 쉽네.”
자조적인 말이었다.
단순히 연호정의 흑도 이적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사람들의 마음. 자신의 주관이 없고, 올바름을 구분하는 눈이 있어도 약한 마음에 진실을 외면하는 이 세상에 대한 실망이었다.
“그래서 세상은 발전하는 거다.”
“응?”
“같은 상황이라 하여 언제나 똑같은 의견만이 진실이자 진리라고 평가받는다면, 그 사회는 쉽게 성장하지 않지.”
“이번 건은 경우가 다르잖아.”
“크게 보면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대의라는 것도 결국 강요할 수 없는 문제야. 각자가 품은 대의가 다르니까.”
“절대적으로 공유되는 대의라는 것도 있어.”
“그래, 맞는 말이지.”
전쟁은 한쪽의 일방적인 악랄함 때문에 벌어지기도 하지만, 대의와 대의가 부딪치면서 벌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과거 연호정은 모용군과 같았다. 삼교 멸망이야말로 절대적인 가치였으며, 그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중원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이 선택이라면, 죽음도 선택이다.’
이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적과 아군, 둘밖에 없다.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그저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최대한 아군 병력을 늘리고 또한 보존해야 하며, 이후 무수히 많은 작전을 짜야 한다.
다만, 이미 무림맹에 속해 있다면 맹법에 의해 다스려지기 때문에 적과의 내통은 처벌받을 수밖에 없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적과 아군밖에 없지만, 적과 아군이 나뉘기 전까지 헤아릴 수 없는 가치와 대의를 상대로 이겨 나가야 한다.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에 불과하다. 누가 어떤 생각을 하든,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쪽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결국, 연호정이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하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공유하는 정의대로 사는 것이다.
죽음마저 받아들일 수 있다면, 타인의 대의 역시 존중받아 마땅하다.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선 그러했다.
그리고.
‘나도 결정을 내려야겠지.’
그렇게 두 사람은 형당 뇌옥으로 들어갔다.
* * *
군사 대리로 온 제갈아연과 공공대사에게 직접 명패를 받은 연호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형당 뇌옥 최하층으로 내려갔다.
‘……!’
제갈아연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뇌옥 최하층에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죄인이 갇혀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의식을 잃은 채였고, 의식을 잃지 않은 사람은 대다수가 벽에 기대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음습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생각보다 습도도 높지 않고 환경도 깔끔했지만, 그래서 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이 연상하는 뇌옥과 달리 너무나도 잘 관리되어 있는 모습이 외려 알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홍익천이 갇힌 곳으로 걸어가던 제갈아연은 순간 깜짝 놀랐다.
“……남궁현.”
뇌옥 한 곳에 남궁현이 쇠사슬에 묶인 채 갇혀 있었다.
의식은 깨어 있지만, 넋은 빠져 버렸다. 멍하니 앉아 침을 질질 흘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제갈아연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직시해.”
연호정의 단단한 목소리가 제갈아연의 마음을 흔들었다.
“너는 군사부 소속이다. 앞으로도 전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아.”
“…….”
“오랜 시간 알고 지냈지만, 결국 너를 납치하려 했던 놈이다. 당당하게 보고, 차라리 혐오해라. 눈을 마주치지 못할 사람은 저놈이지 네가 아니야.”
“호정.”
짧게 숨을 내쉬고 생각을 정리한 제갈아연이 남궁현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던 남궁현이 제갈아연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썩은 생선 눈알처럼 생기가 없던 남궁현의 눈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아연아!”
철컹!
양손, 양발이 쇠사슬에 묶였는데도 기어이 창살 앞까지 기어와 외친다.
“아연아! 나다! 나야! 남궁 오라비다!”
“…….”
“무슨 오해 때문에 이곳에 갇혔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아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미친 사람들의 헛소리를 듣지 마!”
당황과 측은함, 두려움과 서글픔으로 가득했던 제갈아연의 눈빛이 서서히 차분해졌다. 오히려 남궁현의 그러한 모습이 평정심을 되찾아 준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강철처럼 단단해질 수도, 구름처럼 연약해질 수도 있다고.
적어도 처음 남궁현을 봤을 때만 해도, 그는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하여, 저렇게까지 선을 넘는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연아!”
“죄수 삼백칠십구 호.”
제갈아연의 딱딱한 목소리에 남궁현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굳어졌다.
제갈아연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에게 남은 일은, 그대가 행한 죄가 가문과는 아무 연관이 없음을 간곡하게 호소하는 것뿐이야.”
“……아연아?”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것이 성인이라 했어. 그대 때문에 그대의 아비가 죽고, 그대의 조부는 씻을 수 없는 충격에 몸져누웠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반성이나 해.”
냉혹함보다는 안쓰러움이 더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남궁현 입장에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일 것이다. 안 그래도 수척했던 남궁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때, 남궁현의 눈이 연호정에게 닿았다.
뒷짐을 진 연호정은 그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저 제갈아연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이다.
남궁현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너 이 새끼!”
퍼억!
남궁현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두 사람과 함께 온 간수장이 창살 사이로 목봉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간수장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죄수와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쓰러진 남궁현, 부들부들 떠는 그를 보던 제갈아연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없어요. 아무것도.”
“알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걸어 나갔다.
연호정이 물었다.
“별것 아니지?”
“그래.”
제갈아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별것 아니네.”
연호정이 왜 굳이 자신을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고작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 때문에 마음 불편하게 있지 말길 바라서였다.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한테는 맨날 빚을 지는 느낌이야.”
“빚은 갚으면 그만이지. 나중에 술이나 사.”
“네가 시간이 되어야 말이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각 잡고 여유 낼 시간은 없을 것 같다.”
스륵.
연호정의 걸음이 멈추었다.
뇌옥의 맨 끝, 유독 굵은 쇠창살이 인상적인 감옥에는 한 명의 청년이 다리를 뻗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다른 죄수들처럼 양손과 양발이 쇠사슬로 봉해졌다. 하지만 그 쇠사슬의 질이 다른 죄수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공 봉쇄를 위해 전문적으로 만들어진 사슬이었다.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저 쇠사슬 안쪽에는 팔목과 발목의 혈을 뚫는 미세한 바늘도 달려 있었다.
상단전을 주단전으로 삼는다지만, 온몸에 내기가 돌지 않는 이상 수룡신침도의 구현은 불가능하다. 순수한 술법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시커먼 천으로 눈까지 가려진 상태니, 홍익천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익천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은 듯했다.
“연호정, 당신이군요.”
눈이 보이지 않고 기감도 사라졌지만, 귀까지 먹지는 않았다.
“한 번은 꼭 찾아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연호정이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가부좌를 틀었다.
간수장이 물었다.
“칠까요?”
고문은 없다지만, 필요하다면 폭행 정도야 대수로울 것도 없다. 뇌옥 최하층의 죄수들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한마디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젓자, 간수장이 고개를 숙이며 복도 끝으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기묘한 물건으로 귀를 가렸다. 대화를 듣지 않기 위함이었다.
홍익천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런 몸이라도 아픈 건 아프거든요.”
“네게 물어볼 게 있다.”
“제가 한 일이 끝인지에 대해서 말입니까?”
“아니, 네 일은 끝났어.”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네가 원했던 것은 무림맹의 혼란 유도가 끝이 아니었으니까.”
“…….”
“네 목적은 끝까지 나였다.”
“…….”
“그렇지?”
홍익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벌써 거기까지 닿으셨습니까?”
“처음부터 알았다.”
“……대단하십니다. 그걸 알고도 그리 담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제갈아연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호정?”
“무슨 말이긴요.”
대답은 홍익천에게서 나왔다.
“흑백 연합의 상징인 소부주께서 무림맹과의 연합을 공식적으로 끊어 버리겠다고 하시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