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19)
1019화. 되찾아 가는 역사 (3)
제갈아연은 기겁했다.
흑과 백의 연합을 공식적으로 끊어 버리겠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연호정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심유한 눈으로 홍익천을 바라볼 뿐.
홍익천이 또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무림맹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짐작하시다시피 처음 중원으로 파견 나왔을 때부터 그런 걸 노리진 않았습니다만.”
“그건 나도 알아.”
“그러시겠지요. 대단하다는 말이 당신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그조차도 대단합니다. 당신은 의심해야 할 순간과 아닌 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모두에게 그 정도 능력은 있어.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나 정도는 한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게 힘든 것이지요.”
제갈아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호정, 그게 무슨 말이야? 흑백 연합을 공식적으로 파기하다니? 정말이야?”
이번에도 연호정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홍익천이 말했다.
“처음부터 알았다면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고, 마음을 정했는데도 그리 담담하다는 건 나름의 대처를 세웠다는 뜻이 되겠군요.”
“아니.”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대처 따위는 없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
“그저 인정에 호소나 해 볼까 생각 중이다. 아직 정해진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어.”
홍익천은 말없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안대가 씌워져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마치 보이는 것처럼 얼굴이 정확히 연호정을 향해 있다. 정말로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홍익천이 입을 연 것은 반 각이 지나서였다.
“모르겠군요.”
“…….”
“처음 당신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멋대로인 사람이란 걸. 속내를 알기가 참 힘들구나 싶었습니다.”
“그런가.”
“지금은 또 달라요. 정말이지, 당신처럼 모호한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사신(邪神)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사신이란 곧 사음교주를 뜻한다.
연호정에게는 잊을 수 없는 호칭이요, 대화 중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도 그것만으로 하루 내내 분노에 사로잡힐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연호정은 냉철했다. 황룡을 깨달은 이후, 삼교를 향한 지나치게 과격한 마음을 잘 다스리게 된 그였다.
“그간 당신의 행적을 보다 보면,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건 한복판에 떨어져도 언제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었지요.”
“…….”
“물론 개중에는 당신조차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있어, 즉석에서 일을 헤쳐 나간 순간도 있었을 겁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암담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예측할 수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이 중구난방이에요.”
“그래?”
“대단한 사람은 맞는데, 또 달리 보면 지나치게 황당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점점 당신을 알아 간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고 난 이후 더 모호해져 버렸습니다.”
“이제 그런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나. 너는 여기서 죽을 텐데.”
홍익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저 일평생 그런 것만 생각해 온 사람의 집착 정도로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네가 나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내가 복잡해서가 아니야.”
“삼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뻔뻔스럽게 가르침이라고까지 말한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는 나를 분석하려 들었기 때문에 그런 거다.”
“분석이 아니면 그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공감과 이해.”
“그런 것은 저도 합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요.”
“아니, 그런 척을 하는 것뿐이지.”
“……?”
“내 부모 형제도 마음 깊이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오랜 시간이 든다. 하물며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타인이야 말해 뭐 할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내가 너에게 있어서 독특한 사람은 맞겠지.”
“…….”
“분석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보고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면 그뿐이다. 너는 필요한 만큼만 타인을 공감하려 했어. 대부분은 그걸로 충분했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
“내가 독특해서가 아니라, 네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이 많아.”
“이해할 수 없군요.”
“그래, 그러한 태도를 죽을 때까지 고수할 것이 분명하기에 너는 절대로 나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할 거다.”
홍익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닐 것이다. 표정과 분위기만 봐도 그렇다.
다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연호정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사실 깊이 생각해 보고 자시고도 없었다.
연호정의 파격적인 전략 전술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많지만, 그의 행동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적어도 친한 사람 중엔 하나도 없었다.
연호정은 일생을 삼교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산 사람이다. 하여 그의 전략 전술은 곧 그가 살아온 인생과 성격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만약 회귀 전 연호정을 보았다면, 홍익천 역시 그를 분석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은 증오뿐이었던 인생을 하늘의 배려로 다시 조각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사랑을 배웠고, 형제간의 우애를 나누었다.
삼교를 향한 맹목적인 증오가 얼마나 좋지 못한 것인지, 자신의 증오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깨달은 그는 서서히 자신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그 변화, 그 성장이 홍익천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다.
동시에, 그렇게 변하고 그렇게 성장했기 때문에 연호정은 연호정일 수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을 거듭하던 홍익천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모르겠군요.”
당연히 모르겠지.
홍익천은 인간적인 공감보다 이성을 발달시킨 사람이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논리적으로 사고하지 않아도 느낌만으로 사람의 분위기를 읽는 것 또한 인간의 능력이다.
홍익천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부족했다. 다만 그 부족한 것을 압도하는 재능을 갖고 태어났을 뿐이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제게 따로 물어보실 것이 있다면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이미 목적을 다 이뤘다는 생각 때문일까.
홍익천은 조사를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허심탄회한 말투를 썼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가정을 해 보자.”
“무슨 가정 말입니까?”
“만약 본가가 무너졌다면……이라는 가정부터 시작해 볼까?”
“……?”
“본가가 무너졌고, 나는 홀로 세상에 나아가 운 좋게 기인을 만나 무공을 익혔어. 그 힘을 갖고 흑도에 투신했다가 휩쓸리듯 흑도인으로 살았다고 가정해 보자고.”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호정은 담담한 어조로 회귀 전의 과거를 가정 삼아 얘기했다.
벽산연가의 몰락, 구주명가의 몰락, 이후 흑도에 투신한 연호정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나아가 묵비와 강량, 진양과 소정광을 만나고 홍익천까지 만난 것.
양천과의 싸움에서 그를 죽이고 흑제성을 세운 것은 물론, 시간이 흘러 삼교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의 과정까지.
연호정의 말은 평온했고 막힘이 없었다. 실제로 과거의 얘기를 들려주는 것인 만큼, 숨겨진 역사를 알려 주는 것처럼 흥미를 유발했다. 제갈아연조차 넋을 잃고 연호정의 얘기에 몰입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나는 무림맹주인 모용군, 부맹주인 당관과 힘을 합쳐 사음교주와 싸웠지. 사음교주는 죽었고, 우리 셋도 사실상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었어.”
“…….”
“흥미진진한가?”
홍익천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연호정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연호정에게 어떠한 의도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 염두에 두고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려는 생각은 없었다. 이미 자신의 임무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연호정은 끈기 있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모호하군요.”
“뭐가?”
“당신과 내가 동료로 만났고, 나는 여전히 사신의 휘하에 있던 사람이다…….”
“그래.”
홍익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자면 당신의 눈을 속이고 동료가 되었다는 건데.”
“그렇지.”
“흑제성이라는 곳을 세우는 것이야 도울 수 있겠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사신의 목적은 무림의 교란이었고, 양천을 죽였다면 흑도의 총수가 된 당신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 했을 테니 저에게도 그런 명령이 떨어졌을 겁니다.”
확실히 홍익천의 분석력은 뛰어났다.
이미 양천이 사음교와 접점이 있다는 사실을 연호정이 안 것까지도 가정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도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저였다면, 그리고 당신의 성격이 그러했다면…… 중간에서 또 한 번 속이고 사음과 선을 댔을 텐데요.”
“한 번 더 속인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사음교 출신이었다든가 등의 사실을 말함으로써 말입니다.”
홍익천은 연호정이 삼교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연호정이 들려준 이 ‘가정’ 속 연호정에게는 삼교에 대한 증오가 없었다. 즉, 함께할 수 있는 집단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성격이었다면 절대 손을 잡지 않았을 텐데.”
“그럴 확률이 높지요. 다만 시도 정도는 해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사음과 손을 잡지 않는다 한들 당신이 나를 내치진 않았을 것 같군요.”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흑제성에도 자살 사건은 있었다. 총 세 건인데, 그중 하나는 네가 가장 아끼고 가까이하던 부하야.”
“…….”
“그 자살 사건도 네가 획책했을 확률이 높겠지?”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런 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들리는군요.”
홍익천이 묶인 양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물론 제가 했겠지요. 다만, 고작 세 건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굳이…… 내 손발이나 다름없는 수하를 그리 만들 필요는 없었겠지요. 그 수하가 나의 비밀을 알아챘다면 모를까.”
홍익천의 대답을 들으며, 연호정은 확신했다.
‘이놈은 감정적인 공감과 이해가 너무 결여되어 있어.’
지금의 홍익천은 그렇다.
하지만 과거, 자신과 만나고 동료가 되었던 홍익천은 그렇지 않았다.
이 분석, 이 대답만으로 거의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홍익천, 아니 함무헌은 어느새 흑제성의 생활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공감을 알았고 이해를 깨달았으며, 나아가 정(情)을 받아들였음이 분명했다.
홍익천이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거기에 있다.
동시에, 연호정이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눈과 직감을 믿기 때문이었다.
함무헌은 첩자로서 흑제성에 들어왔고 배신도 했지만, 어느새 흑제성의 오대신장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함무헌이 눈에 띄게 활약하지 못한 이유였다. 물론 사음교의 세작으로서 말이다.
연호정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말하다 보니 흥미롭군요. 제가 먼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홍익천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은 철저히 소설이지요.”
“물론 그렇다.”
“상당히 자세하고 그럴듯한 소설이군요. 당신이 사음교주와 싸우다 죽었다고요?”
“내 끝은 그렇지.”
“사음교주에게 직접 죽었다, 이 말이지요?”
“그건…… 모르지.”
“흐음.”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나?”
“걸린다기보다는…….”
홍익천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제가 그 ‘공감’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주저했대도, 어떻게든 임무는 완수했을 텐데요.”
“……?”
“내 손으로 죽이긴 힘드니, 남의 손에 죽도록 어떻게든 조장하려 들었을 것 같습니다만.”
“……!!”
“이거 재미있군요. 그래, 이런 가정을 기반으로 한 인간 분석도 상당히 뜻깊은 공부가 된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홍익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연호정은 웃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