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21)
1021화. 되찾아 가는 역사 (5)
“……!”
지급으로 온 서신들을 읽은 제갈문호의 낯빛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가 정보원들을 호출했다.
“이 정보가 사실이냐?”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니,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무림맹으로 오기까지의 정보 전달 과정도 되짚어 보도록 해라! 서둘러!”
그렇게 반나절의 시간이 지났다.
정보원들의 보고를 받은 제갈문호가 이를 악물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군사님.”
“맹주님을 모셔 오너라! 아니, 아니다. 내가 맹주부로 가야겠다!”
정신없이 각종 문서들과 서신들을 챙긴 제갈문호가 서둘러 맹주부로 향했다.
잠시 후.
“이게……?!”
공공대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당 사안을 몇 차례 검토해 보고, 정보가 오기까지의 과정도 되짚어 보았습니다.”
무림맹의 정보력은 개방에 필적한다. 애초에 정보부 조직 과정에 개방의 도움이 있었고, 지급으로 온 서신의 인장들은 절대로 복사(複寫)될 수 없는 물품이었다.
“전부 사실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허!”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개방 측에서도 그 정보가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황궁이 유독 잠잠했다는 정보부터 파견 무사들의 언행을 확인해 본 결과 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가만히 서신을 보던 공공대사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정황이 이렇게까지 급변할 줄이야.”
그들에게로 온 정보는 황궁 사태에 대한 것이었다.
신화교주가 병력의 일부를 끌고 황궁으로 온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신화교주는 중원 무림으로 이적하기 위해 온 것이었고, 실제로 현재 신화교는 소교주가 쥐고 휘두르고 있었단다.
심지어는 교주와 함께 온 호법이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것까지 적혀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신은 한 장이 아니었고, 그 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폐하께서 어찌 그런 엄청난……!”
황제의 자체 시해 조작.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가 직접 그것을 사실로 만들어 버리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냥저냥 놀래고 끝낼 일이 아니었다.
비록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제국의 주인이자 만민의 통치자가 스스로 죽음을 위장하겠다고 했다.
그 파급력은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당장 천자가 아니라 천자의 혈족이 죽어도 망국의 기운이 들었네, 하늘이 노했네,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판국에 황제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민심은 땅으로 추락할 것이다.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그것을 이용해 삼교의 빈틈을 노리고자 하시는 듯합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이것은 우리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일이오. 소문이 돌기만 해도 헤아릴 수 없는 민초들이 불안감에 잠들지 못할 것이오.”
“소문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군사는 군사다. 제갈문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 소문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서조차도 안 되는 일입니다. 철저하게 통제해야 합니다.”
“……?!”
“그러나, 일말의 틈은 보여 줘야겠지요.”
그제야 공공대사는 제갈문호의 말을 이해했다.
“삼교를 속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를 속여야 한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그리고 삼교 측 정보원들에게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시켜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외치려던 공공대사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소림의 방장에서 무림맹의 봉공, 나아가 맹주가 되기까지.
그는 평범한 불자이자 무인으로서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을 겪어 왔다.
대상이 황제라서 순간 정신을 못 차렸을 뿐, 실제로 이런 정보 공작은 수도 없이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공공대사는 싫은 내색을 보여 왔지만, 무림맹이라는 거대 단체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감정적으로 대응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끼리 결정할 사안이 아니구려. 폐하께서 직접 오실 수도 없으니, 폐하의 의지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과 파견원들, 그리고 흑도 대표도 모여야만 하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서신에 적혀 있다시피 이미 황궁 측에서는 정보 조작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파견원들, 연위와 팽무강은 물론 양천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황제가 죽었다면 황궁 전체가 비상이 걸리는 게 정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림 최고수들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이 돌아온다면 그 또한 문제다.
황궁을 지키고 있다는 인상을 줘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불안하구려.”
“예?”
공공대사가 눈을 감았다.
“세작으로 인해 농락을 당한 반흑파 무사들부터 황궁 사태, 그전에는 신마림의 문제도 있었소.”
“…….”
“그간 여러 사건을 겪었지만, 이렇게 큼직한 사건들이 줄지어 터진 적은 없었소.”
“그렇지요.”
다시 눈을 뜬 공공대사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점점 때가 다가오는 것인가.”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공공대사.
그 말을 들은 제갈문호는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공공대사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지식과 정보 분석력에 있어서는 제갈문호를 따라올 수 없지만, 큰 틀에서 보면 누구보다도 현명한 사람이 그였다.
나아가, 그는 무극에 오를 수 있음에도 스스로의 타락을 경계하여 그 강렬한 욕망조차 억누른 불자이기도 했다.
깨달음 깊은 불자이자 상단전 능력이 극에 이른 무인.
그런 공공대사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었다.
제갈문호는 공공대사의 예감을, 그 육감을 믿었다.
‘전쟁.’
공공대사는 전쟁의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져 온,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그림자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제갈문호는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맹주부로 오는 동안 후속 정보도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요?”
“소림의 권신, 무허대사님과 무당의 탁무자 어르신께서도 황궁에 계신다는 정보입니다.”
공공대사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겉보기에는 그리 놀라지 않은 듯했다.
“탁무 어르신은 몰라도 스승님께서…….”
“공식적으로는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무림맹 정보부에도 은밀히 전달된 듯합니다.”
“그랬구려.”
공공대사는 생각했다.
‘마귀를 떨쳐 내셨습니까.’
무허는 별호부터가 전설이었다.
하지만 공공대사에게 무허는 권신의 아성을 이룬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이 아니라 깨달음 깊은 불자요, 소림 경전에 능통한 평범한 승려였다.
평범했기에 오히려 비범한 분. 사내 누구보다도 깊은 깨달음을 얻고도 결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분.
공공대사는 무공이 아니라 그 성품과 도량, 깨달음 때문에 자신의 스승을 존경했다.
그런 스승께서 오랜 시간 폐관에 드셨다.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었다. 다만, ‘못된 마귀를 가져왔으니, 수미산을 기웃거리는 천신께서 눈을 뜨시기 전까지 내가 이놈의 머리통을 두들겨야겠다.’라는 말만 남기셨더랬다.
수년 전, 스승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동굴 앞에 이르렀을 때 실로 오랜만에 늙고 지친 스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귀가 고약하여 이곳에서 입적할 수도 있겠다. 만약 마귀를 떨쳐 내고 세상에 나가더라도, 내 삶은 그리 길지 못할 게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극한 슬픔을 느꼈을 뿐.
그러나 무극에 오른 지금의 공공대사는 느낄 수 있었다.
‘스승님. 정녕 제자 얼굴 한번 안 보시고 가시렵니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하가 권신으로 추앙하는 스승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는 모른다. 그저 그렇게 느낄 뿐이었다.
스승은 불자가 아닌 천하를 살아가는 한 명의 어른으로서 세상에 나오신 것이리라. 그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판단하에 움직이셨을 것이다.
“후우.”
혼란스러운 마음을 심호흡으로 가다듬은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서둘러 서신을 보냅시다. 황궁을, 아니 황제 폐하의 의지를 대변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고 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연 소부주는 아직도 뇌옥에 있소?”
“아닙니다. 거처에 있답니다.”
제갈문호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졌다.
공공대사의 눈이 반짝였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 하오?”
“그것이…….”
“말씀하시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소부주에게 직접 들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언질이라도 주시지 왜?”
결국 제갈문호는 제갈아연이 들려줬던 얘기를 공공대사에게 풀어놓았다.
공공대사의 턱이 툭 불거졌다.
“소부주에게 기별을 넣어야겠군.”
* * *
평상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호정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서일까? 진양과 강량은 물론 범오와 사마현 역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호정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잠깐 다녀오마.”
강량이 헛기침으로 잠긴 목을 풀며 말했다.
“어디 가시게요?”
“맹주님이 부르신다.”
“아, 그렇습니까.”
강량이 머리를 긁적이며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심심하면 같이 가 드려?”
“너 같으면 심심하겠냐.”
“하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강량이 눈을 말똥말똥 떴다.
연호정이 범오를 바라보았다.
“스님께서는 같이 가셔도 될 듯합니다. 어차피 보고는 드려야 하니까요.”
“아, 그럴까요?”
사마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뭘 하면 되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미친 척 시비 거는 놈들이 찾아오면 문 앞에 오기 전에 모가지 따 버려라.”
“그래도 되오?”
“안 될 건 또 뭐야.”
안 되지, 당연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킨 사마현이 툴툴거렸다.
“뭐 하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군.”
“쉬고 있어. 머리 좀 정리하고 술이나 한잔하자고.”
그렇게 연호정과 범오는 거처를 떠나 어느 숲으로 향했다.
숲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무사를 만났지만, 누구 하나 연호정과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한 번씩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숲에 이르렀을 때.
“날은 아직 밝은데 벌써 달의 형상이 보이는구먼.”
숲속, 널찍한 공터 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공공대사의 모습은 마치 합장을 하고 있는 돌부처를 연상케 했다.
공공대사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낮과 밤이 다르다고 생각한다네. 그러나 낮이 있어야 밤이 있고, 밤이 있어야 낮이 있는 법. 하물며 밤으로 넘어가기 전 달이 먼저 찾아와 저리 예고해 주는데, 어찌 낮과 밤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나.”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밤의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친숙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그 밤의 포근함을 알려 주기 위해, 자네라는 달이 찾아오지 않았나.”
“뿌리 깊은 혐오와 증오로 얼룩진 어둠이라면,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대낮을 사는 사람들에겐 공포만 불러일으키는 법입니다.”
“그 어둠에 화등을 걸어 주겠네.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그리하겠네.”
“어둠은 밤에만 있지 않습니다. 눈만 감아도 어둡지요.”
“감고 있는 눈들을 하나하나 뜨게 만듦세.”
“무림맹이 그래서야 쓰겠습니까.”
“무림맹이니까 더더욱 그래야지.”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렇게 하십시오.”
공공대사가 연호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답지 않게 충혈된 눈. 얼굴에는 격정이 깃들었다.
“떠날 거면, 나를 맹주직에서 끌어내리고 떠나게. 그럴 수 없다면 나도 자네를 보내지 않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