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22)
1022화. 되찾아 가는 역사 (6)
‘…….’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이 얘기가 공공대사의 귀에 들어가리란 건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 흑도 연맹의 작은 주인이 무림맹을 떠나겠다는데, 그걸 맹주에게 얘기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연호정조차 공공대사가 저리 강경한 말을 내뱉을 줄은 몰랐다.
단순히 말만 강경한 것이 아니었다.
후우우우웅.
안 그래도 서늘한 바람이 부는 숲속에 작은 회오리들이 일었다.
바닥에 쌓인 낙엽과 풀 쪼가리들이 허공을 돌며 하늘 위로 올라갔다.
공공대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는 진짜였다. 하기야, 그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진심이었으니 저런 기도를 발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경하고 뻣뻣한 기도는 처음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맹…….”
“내게 있어, 자네라는 사람은 언제나 신비 그 자체였지.”
공공대사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무겁고, 선명했다.
“어디 나에게만 그러할까. 그 젊은 연배에 불현듯 세상에 뛰쳐나와 불가능할 것 같은 위업을 달성해 내고, 기어이 성천에까지 이름을 올린 사람이 자네라네. 누구에게나 자네는 신비로 점철된,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야.”
“맹주님.”
“그러나 나는 깨달았네. 자네가 나를 맹주로 세우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몰랐지만, 번뇌를 벗겨 내고 현실을 마주하니 비로소 자네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단 말이네.”
“…….”
“내, 이 자리에서 감히 장담하건대 천하를 위하는 협사들이 많다지만 자네처럼 인생을 걸고 중원을 지키려는 자는 또 없을 것일세.”
“그렇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사람은 많아. 그러나 인생을 건 사람은 없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네.”
“…….”
“사람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야. 불자를 자처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긴 부끄럽지만, 사람은 그렇다네. 연약하고 불완전해. 나도, 모두도 그러하지.”
“…….”
“자네는 그렇지 않았네.”
“맹주님.”
“내 보기에 자네는 세상에 나선 순간 뜻을 세운 듯했네. 단순히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야. 자네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어. 그 목표는 다름 아닌 삼교를 멸하는 것이었지.”
“…….”
“그러나 성천에 이름을 올리고, 이후 흑도에 투신하여 묵룡부주의 제자가 되어 돌아온 자네를 봤을 때, 나는 깨달았네.”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삼교의 멸망을 위해서 삶을 불태우던 맹목적인 장군이,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인생을 송두리째 건 또 한 명의 제왕이 되었음을.”
“…….”
“흑도와 백도, 흑백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살리기 위해 인생을 건 남자로 성장했음을 깨달았네.”
날카로운 안목이었다.
공공대사는 연호정의 변화를 민감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황제와의 대화 이후 묵룡부로 가서 양천의 꿈을 포기시키고 묵룡부의 작은 주인이 되면서.
연호정은 바뀌어 갔다.
아니, 바뀌었다. 살인귀가 되어서라도 삼교를 멸하려는 사람에서, 중원의 평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귀신이 되었다.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네. 그 누구도 사람의 의지는 막을 수 없으니, 결과가 비슷하다면 오히려 증오와 분노가 아닌 동정과 자비로 살아가는 인생이 훨씬 더 값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네.”
“…….”
“하지만 내가 오해한 것 같네.”
“…….”
“동정과 자비, 이해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어. 만약 그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그는 타고난 불자요, 부처의 마음을 지닌 성자라고 할 수 있네.”
“…….”
“자네는 반쯤 부처가 되었네.”
“아닙니다.”
“하지만 난 그런 자네가 싫네.”
“맹주님.”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강제로 부처가 되어 버린 자네의 모습을, 나는 감당키 어렵다네.”
“떠밀려서 나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네의 의지였겠지. 그러나 그 과정은 떠밀린 것과 다를 바가 없어.”
“…….”
“나아가, 자네는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도 없었네. 수양을 쌓겠다는 의지도 없었어. 지금의 자네는 자신을 잃고 세상을 위해 녹아들어 버렸다네.”
불자가, 상대가 부처가 되어 버린 것이 싫다고 말한다.
이것은 질투가 아니었다. 증오는 더더욱 아니었다.
공공대사는 연호정을 잘 알고 있었다.
연위만큼, 제갈문호만큼 연호정과 많은 대화를 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더 깊게 연호정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공공대사였다.
더하여 이 발언 자체만으로도 공공대사는 자신이 불자보다 무인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승려가 아닌 강호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공공대사는 자신의 의지를 전했다. 옆에 범오가 있는데도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전한 것이다.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곳저곳 평지풍파를 어지간히 많이 일으켰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아주 잘못 살지는 않았나 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네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나 자신이 아닌 내 사람들을 위해 목숨 걸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전쟁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걸세.”
“그래도 제가 가야 합니다.”
“소부주.”
“맹주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 천금으로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여, 그런 말씀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지금 날아오를 것 같은 기쁨을 느낍니다.”
공공대사의 얼굴에 서글픔이 어렸다.
나이가 젊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비록 자신보다 삼십 년을 덜 산 청년이지만, 지금껏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살아왔던 남자가 눈앞에 있다.
그런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화를 내 주어서 고맙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얼마나 깊은 분노와, 얼마나 치열한 노력으로 저 삶을 일구었을까.
그런 열정으로 일군 삶을 중원을 위해 바친 저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저는 저 자신 또한 충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날 모른다면, 저 역시 이 경지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
“저도 사람인데 어찌 마음이 좋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정도야 하룻밤 술 한잔으로 털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하룻밤 술 한잔으로 불편한 마음을 털어 버려야 하는 쪽은 자네를 무시하고 욕했던 무림맹의 무사들이라네.”
“훗날 전쟁이 끝나면, 그때 되돌아봐도 늦지 않습니다.”
“그때가 되면 뉘라서 되돌아보겠는가.”
“맹주님이 그것을 가능케 해 주셔야지요.”
공공대사가 눈을 감았다.
“정녕, 이곳을 떠나겠다는 겐가.”
“제가 떠나야 무림맹의 힘을 집결시키는 게 수월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물론입니다.”
번쩍!
공공대사가 눈을 떴다.
신광(神光)이 이글거리는 눈동자. 그 눈빛이 얼마나 맑고 강렬했는지 연호정조차 움찔하고야 말았다.
“전쟁이 코앞이라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차가운 밤이 다가온다며 하던 식사를 마무리하지 않은 채 이부자리를 펴는 것과 다르지 않은 법.”
“…….”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 때와 장소를 가린다면 그 어찌 삶다운 삶이라 하겠는가.”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자네와 나의 생각 차이는 좁혀지지 않겠군.”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훅!
일순간 공공대사의 기도가 숲 전체를 에워쌌다.
그야말로 벼락과도 같은 진기 운용이었다. 연호정 역시 불가능한 기예는 아니었으나, 설마하니 공공대사가 벌써 이 정도 경지에 진입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단하다.’
연호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공공대사의 무상대능력은 자신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무학의 경지도 그러거니와 그것을 활용하는 공공대사의 깨달음 역시 지고하였다.
“이처럼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을 어찌 단순한 내기로 결정할 수 있겠는가.”
“…….”
“그래도 해야겠네. 나는 지금 불자가 아닌 무림맹주이기 때문이네.”
가만히 공공대사를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범오야.”
지금껏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범오가 고개를 숙였다.
“예, 방장 사백.”
“떨어져 있거라.”
“부디 다치지 마시길.”
차분하기 그지없는 범오의 목소리에 공공대사와 연호정의 기도가 한층 가라앉았다.
공공대사가 물었다.
“맨손으로 되겠는가?”
“생사결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승패에 따라 자네의 뜻이 꺾일 수도 있다네.”
“도끼를 들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면, 맹주님의 고집도 더 분명하게 꺾일 수 있겠지요.”
호전적인 답변이었다.
말은 그랬지만,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담겼다.
공공대사가 다시 눈을 감았다.
연호정의 그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연호정은 알 것이다. 자신의 비무 제안이 단순히 선택을 위한 내기에 그치는 게 아님을.
그것을 알기에, 그는 더더욱 연호정을 내보내기 싫어졌다.
“가네.”
웃음 짓던 연호정의 얼굴에 서서히 긴장이 차올랐다.
“오십시오.”
스륵.
순간 공공대사가 연호정의 일 장 거리 앞까지 다가왔다.
‘……!!’
간다고 말은 했지만 가히 기습과도 같은 움직임이다.
그야말로 한 줄기 벼락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벼락만큼 빠르면서도 벼락 같은 위압감은 없었다.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편안한 신색의 공공대사가 정직하게 손을 뻗었다.
연호정의 몸이 돌풍처럼 회전했다.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온 무형의 장력이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무시무시한 장력이었다. 일격에 집채만 한 바위도 고운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실로 파멸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무공이었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간 봐 왔던 대력금강장과는 뿌리부터 다른 무공처럼 보인다.
그처럼 막강한 힘을 담은 장력이, 허공에서 폭발하며 그 힘을 무(無)로 만들었다. 쓸데없이 외물을 파괴하지 않겠다는 공공대사의 의지였다.
회전하며 장력을 피한 연호정이 공공대사의 측방에서 나타났다.
쿵!
진각과 함께 휘둘러진 연호정의 주먹은 산악이라도 내리누를 것처럼 무겁고 강렬했다.
금룡진악권이었다. 꿈틀거리는 황룡기를 한껏 담아 내친 금룡진악권은 대력금강장 못지않은 위력을 담고 있었다.
공공대사의 왼손이 자연스레 휘둘러졌다.
퍼엉!
소리는 짧았지만, 공기는 뜨거웠다.
폭발하는 경력이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금룡진악권의 일권을 막은 무공, 대력금강장과 함께 소림칠십이절예(少林七十二絶藝)로 손꼽히는 전설의 수공(袖功) 반선수(盤禪袖)였다.
연호정의 허리가 부러질 듯 휘어졌다.
가볍게 내쳐 충격을 상쇄했지만, 남은 힘은 그대로 연호정이 받아 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척추가 꺾일 것 같은 중압감이 전해졌다.
“왜 이러나.”
퍼엉!
가볍게 품으로 들어온 공공대사의 손이 연호정의 가슴에 작렬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일장에 연호정의 신형이 십여 장이나 뒤로 밀려 나갔다.
“자네의 실력은 누구보다도 잘 알아. 결코 이 정도가 아닐 텐데.”
“…….”
“옳거니. 내가 진심이 되어야 자네 역시 진짜 힘을 보여 주는 것인가?”
연호정은 말없이 앞섶을 털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게.”
번쩍!
한 줄기 번갯불이 튄다 싶은 순간 공공대사의 주먹이 연호정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소림절기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평온했던 연호정의 눈에, 비로소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금룡진악권, 이전보다 두 배의 밀도를 지닌 발경술이 연호정의 주먹에 한가득 실렸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