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23)
1023화. 되찾아 가는 역사 (7)
쿠궁!
저 머나먼 숲에서 울려 퍼지는 충격파는 초절정고수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
제갈문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맹주님.’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진기의 색은 불가 무공의 극의를 담고 있었다. 공공대사와 연호정이 비무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그렇게 되는 겁니까.’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갈아연이 물었다.
“아버지. 이것은 설마……?”
“그래.”
제갈아연의 얼굴이 흐려졌다.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요?”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느냐.”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 뜻이 있을 것이다. 물론 맹주님께서도 소부주를 그냥 보내 주기는…….”
말을 하던 제갈문호는 순간 흠칫했다.
“아연아, 설마 이 충격파를 느끼는 것이냐?”
“네? 아, 네! 물론이죠.”
“……?!”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충격파는 곧 진동이고, 진동이란 생각보다 미세해도 내공심법을 익혀 초월적인 감각을 지니게 된 무림인이라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지금 공공대사와 연호정이 부딪치며 자아내는 충격파는 보통의 충격파가 아니었다.
그만한 고수들의 충격파는 가까이서 보고 들으면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엄청나지만, 일정 거리만 벗어나도 진동이 극도로 줄어든다.
이유는 단순했다. 고수들 간의 기파가 역장을 만들어 일정 거리 밖으로 진동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렇게 되는, 말하자면 발경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산천을 흔들 정도로 막강한 충격파를 뿜어내는 경우는, 역장이 버티지 못하는 충격이 발생하거나 역장을 둘러싼 기운마저 소비할 만큼 극심한 내공 소모가 뒤따르는 경우다.
당연히 지금의 충격파는 초고수들 간의 일반적인 충돌, 그러니까 상대를 죽이기 위해 극심한 내공을 소모하는 무공의 충돌이 아니었다.
그것을 제갈아연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무종을 돌파하지 않았는데도.
‘대단하구나.’
비록 두뇌 쪽으로 특출나서 자신을 돕고 있지만, 제갈아연의 무재 역시 누구 못지않게 뛰어났다.
다만, 그녀가 무공보다는 이쪽에 더 뜻이 있기에 그것을 살려 주고자 했다.
‘이 정도 재능이었다면 진즉 비전을 알려 주는 게 좋았을까.’
단순히 무공을 빠르게 이해하고 체득하는 걸 넘어, 감각 자체가 예민하다. 이 정도 감각 재능은 소위 천재라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것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아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으며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일은 내가 다 맡아 할 것이니, 너는 이만 거처로 가서 쉬도록 해라.”
“아니에요. 저도…….”
“애비로서가 아닌 군사로서의 명령이다. 들어가서 쉬도록 하거라.”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딸이 나가자, 문서에서 시선을 뗀 제갈문호가 집무실 문을 바라보았다.
“……재능이라.”
* * *
퍼어어엉!
튕겨 나간 충격파가 제법 굵은 나뭇가지를 가루로 만들었다.
연호정이 낮은 자세로 돌진하며 내측으로 회전하는 일권을 질렀다.
쾅!
산천초목이 떠는 듯했다. 충격파가 말도 못 할 정도로 거세었다.
‘역시.’
용왕유권으로 연호정의 권력을 상쇄한 공공대사는 두 주먹이 뼛속까지 시려 오는 감각을 맛보았다.
‘역시나 대단하다.’
도끼를 들든 맨주먹이든, 연호정은 강하다.
도끼를 들면 전투력이 더 올라가면서 풀어 내는 무공의 종류가 훨씬 더 다양해지기에 자연스레 기량도 올라가지만, 맨손일 때도 도끼를 들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무력을 구사한다.
퍼퍼펑! 펑!
대력금강장, 관음청강수(觀音靑剛手), 아라한신권의 삼연격을 내치는 공공대사의 무공은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격렬하고 쾌속했다.
심지어 단순히 격렬하고 쾌속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위력은 연호정으로서도 몇 번 맛본 적 없는 수준이었다.
재빨리 번천장과 진악권의 연환기로 공세를 흐트러트리고, 남은 경파는 용형칠기보법으로 회피해 냈다.
쾅!
남은 경력이 땅을 뒤집었다.
살기가 없는 비무였지만, 아차 하는 순간 목숨이 날아갈 만큼 첨예한 비무였다.
연호정과는 달리 공공대사는 성천에 오른 이후 자신의 모든 기량을 발휘해 싸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전투력이 나온다. 인자하고 자비로운 무승의 가면 뒤로, 지옥 불처럼 격렬한 무공을 숨겨 두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파라라락!
공공대사의 권장을 피해 우측 하단 빈틈으로 파고든 연호정이 주먹을 휘둘렀다.
‘……!’
순간 연호정은 거대한 황금빛 거성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실재하는 듯 환상인 듯 미묘한 금빛 거성이었다. 화포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성벽은 웅장하면서도 예스럽고, 고풍스러우면서도 탄탄해 보였다.
일권으로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쌍장의 연환으로도 구멍 하나 내기 힘들 것 같았다.
연호정의 주먹이 자연스레 수도(手刀)로 변환, 맨손의 도끼가 되어 광풍구룡살을 구현했다.
쩌저저정!
엄청나다.
고아하고 예의 넘치던 공공대사의 자세 어디에서 그런 역동성이 나오는 것일까.
가사 자락을 걷고 왼발을 휘둘러 수도를 쳐 내는데, 그 탄력이 무시무시했다.
또 다른 소림의 절예, 관음십팔족(觀音十八足)이었다. 소림에서도 몇 없는 각법의 비기다. 나이 지긋한 고승들은 채신머리없다며 잘 쓰지도 않는 무공이, 공공대사의 역동적인 몸놀림에 맞물려 포탄 같은 위력을 자아냈다.
퍼엉!
연호정의 신형이 어지러워졌다.
광풍구룡살은 도끼로 펼쳐야 제 위력이 살아나는 무공이었다. 애초에 그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임기응변으로 수도 참격을 구사했으나, 위력의 절반도 살지 않은 공격으로는 관음십팔족을 막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파파팡!
공공대사의 무공은 예술 그 자체였다.
경지의 고저를 떠나,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내치는 권법과 장법은 춤사위 같으면서도 절도가 넘쳤고, 매서운 탄력이 살아 있는 각법은 연호정이 구사하는 부법(斧法)처럼 단호하고 날카로웠다.
‘정말이지.’
한번 수세에 몰리니 마음 잡고 치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더더욱 공공대사의 무공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권왕이라 불리는 소림의 차기 신권(神拳)의 무공은 보는 것만으로도 천금의 가치가 있었다.
‘이렇게나 다르구나.’
기질이라고 한다면야 범오의 무공이 훨씬 더 격렬하고 거세다. 범오의 무공은 과연 이것이 소림 본산의 무공이 맞는 건지 의아할 정도로 파괴력 넘치고 거칠었다.
공공대사는 다르다.
쓸데없는 동작 따위는 하나도 없어서, 절도가 넘치는 와중에도 묘하게 부드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격, 일격이 바위를 가루로 만들 법한 위력을 낸다. 마음먹고 내친 무공이 아니라, 그냥 진지하게 싸우기만 해도 그만한 위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오체에 가득 찬 투쟁 의지, 부처의 깨달음으로 분노한 명왕(明王)의 포효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천년소림(千年少林)의 진짜 무공!’
천하공부출소림.
천하의 모든 공부가 소림에서 나왔다는, 광오하면서도 위엄 넘치는 말이다.
공공대사의 무공은 그 전설과도 같은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깊고 대단한 무리를 담고 있었다. 정말이지 언제까지고 그 무공을 눈앞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했다.
그러나.
상대의 무공을 잠깐이나마 감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호정의 경지는 공공대사 이상이라 할 수 있었다.
소림에도 어쩌면 황룡신왕공에 비견될 만한 무공이 있을지 모른다. 그 전에, 이 정도 경지에 든 무인들에게 무학의 위대함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연호정의 경지는, 완벽으로 가다듬어진 공공대사를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퍼어어엉!
폭음과 함께 연호정의 모습이 사라졌다.
빤히 보고 있었는데도 한순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상대능력의 공능으로도, 잘 벼려진 무극의 감각으로도 놓쳐 버렸다.
‘어디?’
그 순간, 공공대사는 저 멀리 정면에서 자세를 낮추는 연호정을 볼 수 있었다.
‘……!!’
무공을 배운 이래, 이처럼 소름이 돋는 순간이 또 있었던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방위에서도 공격이 들어올 수 있다는 뜻과 상통한다. 좌우 측방, 혹은 후방이나 머리 위에서 공격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연호정은 그저 뒤로 물러나 버렸다. 공방의 상식을 깨 버린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 상식을 깬 움직임은 곧 상식을 깬 무공이 날아올 거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
땅을 박찬 연호정이 날아왔다.
날아오는데, 그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다만 연호정의 신형이 천천히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
공공대사의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파팡!
소림 최고의 보법, 연대구품(連帶九品)으로 물러난 공공대사는 순간 연호정이 코앞까지 도달했음을 보았다.
위기감을 느낌과 동시에 최속으로 물러났는데도 따라잡혔다. 연호정의 신법 속도가 연대구품의 속도를 뛰어넘었다는 뜻이었다.
공공대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 빠르지 않았는데 어느새 다가왔다. 소림의 금강부동도 저와 비슷하지만, 금강부동의 깨달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연호정의 주먹이 정직하게 뻗어 왔다.
공공대사의 양손이 그의 주먹을 휘감으려 했다. 자연스러운 대처였다.
퍼어어어어엉!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공공대사의 몸이 비틀거렸다.
“…….”
공공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은 주먹을 뻗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낮은 자세, 흡사 소림권법을 연상케 했다.
공공대사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양손으로 휘감는 경력,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을 펼쳐 보기도 전에 한 줄기 권력(拳力)이 가슴을 관통했다.
하지만 그것은 공공대사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가슴 앞섶, 승복과 가사가 동그랗게 뚫려 나이에 걸맞지 않은 탄탄한 흉근이 드러났지만, 붉게 달아오른 것을 제외하면 아무 상처도 없었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졌구먼.”
“예. 지셨습니다.”
“대단한 무공일세. 청해로 떠나기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네.”
“예. 그런 모양입니다.”
연호정은 굳이 겸양을 떨지 않았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무공은 검제나 도제에 비견될 만하네. 아니, 그 이상인 것처럼 보여. 나의 실력으론 자네의 진력을 다 끌어내지 못했지만, 필경 자네의 경지는 그 두 사람을 뛰어넘었을 걸세.”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공대사가 탄식했다.
“내 패배야 예감하고 있었네. 자네가 마음을 먹었는데 내 어찌 막겠는가. 다만 나는 자네에게 깨달음을 주고 싶었어. 이왕 그 거친 세상으로 가실 거라면, 소림의 방대한 깨달음 한 조각이라도 건네주고 싶어 이리 싸우자고 들었다네.”
“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공공대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가슴을 쓰다듬었다.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깨달음을 받았구먼.”
연호정의 이번 일권은, 굳이 따지자면 성천 중 제왕급의 깨달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아직 공공대사가 이르지 못한 무력의 깨달음. 공공대사는 방금 그 일격을 몸으로 받아 내며, 자신이 개척해 나갈 무도(武道)의 한 길을 볼 수 있었다.
도움을 주려 했는데 도움을 받아 버렸다. 이제 연호정은 무림맹주의 도움조차 필요치 않을 만큼 성장해 버린 것이다.
공공대사가 눈을 감았다.
“내가 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