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25)
1025화. 되찾아 가는 역사 (9)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던 광장에 침묵이 어렸다.
광장과 맹주부 사이, 무림맹주 공공대사와 봉공들 그리고 장로들과 정예 무력 조직들이 도열해 있었다.
광장 주위로는 수많은 문파원들과 맹 직속 무사들, 그리고 일꾼들이 저 멀리 외성에 이르도록 빽빽하게 서 있었다.
그중 반흑파에 몸을 담았던 이들은 광장 중앙 부근에 어두운 신색으로 서 있었다. 반흑파와 활동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흑도를 향한 증오가 유독 강했던 무사들도 가까이 있었다.
제갈문호의 배려였다. 모두의 위치를 정해 주진 않았으나, 반흑파에 가까운 이들은 연호정과 가까이 서도록 미리 언질을 준 것이다.
연호정이 맹주와 봉공들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공공대사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봉공과 장로들 대부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 사태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 애초에 봉공 중 하나가 세작으로 활동했던 전례가 있었기에, 맹주부 측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들 중에는 세작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맹주부의 이번 조치를 충분히 이해했다.
나아가, 그들 대부분은 연호정과 친분이 있었다.
아직도 연호정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삼교를 상대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이렇게 흑과 백이 손을 잡은 것 역시 연호정이 밤낮으로 뛰어다니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연호정의 존재가 대단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인사를 마친 연호정은 문득 저 멀리 있는 야산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고수들도 보이지 않을 거리. 그곳에 남궁승과 종리백이 있었다.
‘노사님.’
남궁승의 마음이 얼마나 피폐할지는 안 봐도 훤했다.
이번에도 연호정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거리가 멀었지만, 분명 자신의 인사를 받아 주었을 것이다.
“…….”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공공대사를 보았다.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지, 공공대사의 눈빛은 깊고 맑았다. 다만 세대가 다른 선후배가 아니라 함께 싸워 온 동지로서, 공공대사는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 걱정 말라는, 우리는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실린 미소였다.
공공대사의 옆에는 함께 나온 맹주 후보들이 있었다.
당상아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팽대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갈준은 애써 무표정을 고수했지만, 그 역시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구문은 머리를 긁적였다. 연호정과는 큰 인연이 없지만, 빈말로도 악연은 아닌 사이였다. 아무래도 이런 자리가 처음이니만큼 불편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
남궁표는 그 며칠 사이에 살이 쪽 빠져 있었다.
연호정을 보는 그의 눈빛은 복잡했다.
연호정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에 대한 질투도 내려놓은 그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었고 그 사태에 연호정이 어떤 형식으로든 끼어들었으니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연호정은 남궁표를 향해 예의를 다해 포권을 취했다.
“…….”
광장에 모인 모두가 놀라서 남궁표를 보았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남궁표가 한숨을 쉬며 마주 포권을 취했다.
연호정이 입을 꾹 다물고 전음을 보냈다.
[미안하오. 내, 달리 할 말이 없소.]포권을 하던 자세 그대로 멈칫했던 남궁표가 이내 자세를 풀고 전음을 보냈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 아버지의 묘 앞에서 같이 술 한잔만 합시다.] [그리 말해 주어 고맙소. 고맙고, 또 미안하오.] [그간 고생이 많았소.] [꼭 다시 보도록 합시다.]담백한 인사를 나눈 연호정은 곧장 광장에 마련된 단상으로 향했다.
단상에 오른 연호정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이 보였다.
불편해하는 사람, 미안해하는 사람, 안타까워하는 사람, 면목 없어 하는 사람.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 혼란스러워하는 사람, 서글퍼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소수지만 내심 안도하는 사람, 통쾌함을 내비치는 사람, 득의양양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림맹에 속한 모든 무사가 모인 게 아닌데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저들 모두가 한데 뭉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가는 게 맞았다.
새삼 연호정은 깨달았다. 저렇게나 성격이 다르고, 천품이 다르고, 개성이 다른 이들을 한데 묶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다른 의미로 남수활의에게 고마워졌다.
결과적으로 연호정은 세상을 또 한 번 배웠다. 앞으로는 실수할지언정 절대 실패하지 않을 이 한 번의 경험은 그에게 있어 크나큰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똘똘 뭉쳐 삼교를 상대해야만 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기분이 참 나빴습니다.”
첫마디부터 파격적이다.
깊은 내공이 실린 그의 목소리는 담담함을 유지한 채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무사들의 얼굴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사람은 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최선을 다한 일이 어그러지면, 누구나 허탈하고 힘이 빠집니다. 다들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
“하지만 저는 그냥 기분이 나빴습니다. 왜 그럴까 고민을 해 보니, 답은 무척 단순했습니다.”
“…….”
“그냥 제 성질머리가 더러웠던 탓입니다.”
불편해졌던 무사들의 얼굴에 실소가 묻어 나왔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저를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꽤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빈말로도 그렇다고 답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
“누구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삽니다. 그렇게 아등바등 노력해도 뭐 하나 이루기 힘든 세상이라는 게 서글플 뿐이지요. 그것은 힘이 강한 문파 출신도, 명성 높은 절대고수도, 변두리 작은 문파의 문주도 다 똑같습니다.”
“…….”
“어쩌면 저는, 이 몇 년간 많이 오만해진 것 같습니다. 치열하게는 살아왔지만, 치열하게 산다고 모두가 원하는 걸 이루는 게 아닌데 저는 운이 좋게도 손을 댄 많은 일을 성공시켰습니다.”
“…….”
“그리고 지금, 아주 오랜만에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제 생각과는 달리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기란 결코 쉽지 않았지요.”
연호정이 반흑파의 무사들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들 대다수가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아마 그들조차도 인지하진 못했을 것이다.
“제가 실패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타인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익숙해진 것인지, 모두가 나와 같을 거라는 마음에 조금은 무리하게 일을 진행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
“무리하게 일을 벌여 많은 분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점,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연호정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묵룡부의 작은 주인, 이곳에 모인 무사들 대다수보다 훨씬 더 막강한 권력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불편해했던 사람들, 연호정의 출맹에 내심 안심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크게 일렁였다.
적어도 이곳에 모인 사람 중 누구도 연호정의 위업을 모르지 않는다. 그가 벌인 일 중 절반만 진실이래도 수백 년 무림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자연히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사과하십시오.”
어느새 고개를 든 연호정의 두 눈은 뜨거운 용암을 담고 있었다.
사과를 했던 사람이 너희도 사과하라고 말한다.
무사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저에게 사과하라는 말은 않겠습니다. 이곳에 계신 무림맹 수뇌부분들께, 그리고 삼교와 대항하기 위해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목숨 걸고 일했던 분들께 사과하십시오.”
“……!”
“저는 언제나 이단아였습니다. 가문에서도, 무림맹에서도, 심지어는 묵룡부에서도 이단아입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저는 정석을 모르는 사람이고 언제나 꾀를 내어 파격적이라는 말보다 무례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흉악한 놈입니다.”
“…….”
“그러나 제 뒤에 계신 분들은 다릅니다. 빈말로도 착하다고 하기 힘든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시고, 문 내 혹은 맹 내에 거센 반발이 일 것을 아는데도 묵묵히 전쟁 준비를 하신 분들입니다.”
“…….”
“제가 아니라 이분들이 대단한 겁니다. 이분들이 안 계셨다면, 이미 무림맹은 삼교에 잠식되어 불바다가 되었을 겁니다.”
무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언제 들어도 전쟁이라는 말은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나만 죽으면 호기라도 부려 보겠지만, 내 사람들이 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껏 제가 했던 일들은 여러분들 역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러나 맹의 수뇌부분들께서 하시는 일들은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들이 아닙니다.”
“…….”
“그분들이 바라는 것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별 게 아닙니다. 당장 이곳에 모인 무사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피 흘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무탈하게 사는 것이 평화입니다.”
“…….”
“전쟁이 벌어지면, 그 한 가정과 집단의 평화가 산산조각이 날 겁니다.”
무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지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던 연호정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저는 질 것 같단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
“힘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이런 위기를 맞닥뜨려 왔습니다. 삼백 년 전에도, 그 전에도, 또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결국 우리는 이 땅을 지켜 냈습니다.”
“…….”
“이제는 우리 차롑니다.”
“……!!”
“한 분, 한 분이 목숨 걸고 적과 대항하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것만으로도 이 전쟁의 승률이 올라갑니다. 절반이 믿으면 절반의 승률이 오를 것이요, 모두가 믿으면 승리가 명확해집니다. 우리에게 적어도 그 정도 잠재력은 있다고 봅니다.”
무사들의 눈이 빛났다.
연호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후세가 편히 살 수 있도록, 힘들고 지치고 화가 날지언정 조금만 더 버텼으면 합니다. 우리가 일 년을 참으면 후세들이 일 년을 더 행복하게 살고, 십 년을 참으면 후세들 역시 십 년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
“저는 이제 또 다른 동맹인 흑도 무림으로 가서 그들을 하나로 만들 겁니다. 지금 제 앞에서 용기 어린 눈빛을 보내 주신 무사들과 같은 결기를 품을 수 있도록 목숨 걸고 휘저어 보겠습니다.”
“…….”
“조금이라도 허튼 생각을 한다거나 목표를 잊고 방황한다면 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겁니다. 그 정도 각오를 하고 가는 길입니다.”
연호정이 허리를 숙였다.
“부디 여러분들도 함께 목숨을 걸어 주십시오.”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눈을 감고 한참 동안 허리를 숙였던 연호정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
순간 연호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가장 앞 반흑파 무사들부터 저 멀리 외성 성문까지 빽빽이 찬 무사들까지.
모두가 이곳을 향해 포권지례를 하고 있었다.
연호정을 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맹주부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신(神)께 드리는 맹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군중심리에 휩싸인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짧게나마 한 번이라도 하나가 된 사람들은, 또 한 번 하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연호정은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