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26)
1026화. 무제(武帝) (1)
“…….”
차례로 서신을 돌려 본 사람들의 표정은 지극히 어두웠다.
“그럴 만하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기천웅이었다.
“사음교주의 음험함은 상상 이상이야. 내 부덕이 낳은 결과라고는 하나, 부자지간을 이간질하여 권력까지 한 곳으로 몰아 버린 놈인데 이 정도는 우습지.”
목소리가 씁쓸했다.
팽무강이 착잡한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가주.”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소. 호정이 걱정이지.”
“…….”
“호정은 그간 애비인 나조차 상상 못 할 일들을 당연한 듯 성공시켜 왔소. 부자지간이라고는 하나, 나도 내 아들이 하는 일을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의 안목이 없소.”
“이것은 능력과 다른 문제라고 보오.”
“물론 그렇소만.”
연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아, 괜찮은 것이냐.’
연호정이 무림맹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였다.
정확히는 삼교와 싸울 전우들이기에 소중히 대해 준 것이지만, 사람이 어찌 필요에만 의지하여 관계를 쌓겠는가. 무림맹에는 연호정을 위해 주는 사람이 많았고, 연호정 역시 그들을 제 사람처럼 생각했다.
당연히 아들내미의 마음은 썩어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네가 얼마나 답답해하고 서글퍼했을지, 안 봐도 훤하구나.’
그래도 이겨 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드시 이겨 낼 것이고, 실제로 서신에는 연호정의 대처가 무척이나 훌륭했다고 적혀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남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감정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을 아들이 안쓰럽고 걱정되었다.
“정말이지.”
심란했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목소리.
“앞뒤 생각 못 하는 머저리들이로고.”
흔치 않은 양천의 분노였다.
뭉클뭉클 새어 나오는 양천의 기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살기를 내보이진 않지만, 눈앞에 반흑파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그 젊은 놈이 무엇을 위해 목숨 걸고 중원을 횡단했는지, 정녕 몰랐단 말인가.”
놀랍게도 양천은 그들이 흑도를 향해 증오를 내세워서가 아니라 연호정을 걱정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달리 생각하면, 허울뿐인 사제지간이라고는 하나 두 사람은 우애에 가까운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더 깊게 말하자면 양천에게 있어 연호정은 제 사람이다. 그래서 화를 내는 것이다.
“흑도가 그렇게 싫고 증오스러웠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요만큼도 하지 못했단 말인가. 실로 답답하구나!”
양천의 분노 섞인 일갈에 연위와 팽무강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면목이 없습니다.”
연위의 말에도 양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큼 화가 난 것이다.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닐 터인데.”
모두가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기천웅이 턱으로 서신을 가리켰다.
“황제의 의지를 대변할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였어. 당장 연가주나 팽가주는 움직이기 힘든 판국이고, 묵룡부주가 간다면 괜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이 또한 안 되겠군.”
“그렇군요.”
“그렇다고 곡경에게 말하면 절대 불가라고 외칠 게 뻔하거늘.”
황제가 스스로 죽음을 위장했다는 것은 천지가 들썩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지 신화교 측에서 따로 알아보려 들 수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만에 하나 사고가 벌어진다면 그 또한 큰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가겠소.”
양천이 서슴없이 나섰다.
기천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판 싸우기라도 할 작정인가?”
“그럴 리가. 내가 먼저 묵룡부로 가겠다는 거요.”
“묵룡부로?”
“제자 놈이 무림맹을 떠나 묵룡부로 향한다면, 필시 묵룡부 내에서도 혼란이 일 것이오. 무림맹에서의 일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건 그렇지만.”
“삼교는 황제 암살까지 진행했소. 전쟁이 코앞이란 뜻이오.”
“…….”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소. 늘그막에 일이 많은 거야 환영할 일이지만, 내가 가서 제자 놈의 뒤를 확실하게 봐주고 돌아와야 두 발 뻗고 잘 것 같소.”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한 것 같았다.
연호정의 마음을 다독이고, 자신이 황궁에 있으니 묵룡부의 전권을 대리하여 맡기겠다는 의도다.
아닌 게 아니라 양천으로선 당장 연호정에게 힘을 제대로 실어 줘야 저 물러 터진 무림맹 놈들도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이는 비단 무림맹이 미워서만이 아니라 차후 전쟁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행위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부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면, 그때 곡경을 보내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가 함께 폐하를 지킨다면 위험한 사태는 터지지 않을 것이오.”
와중에 곡경까지도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기천웅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팽무강이 양천을 향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보니 엄청나게 똑똑하십니다.”
“시끄럽네.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무림맹 놈들하고는 당분간 말도 섞기 싫다네.”
진짜 말을 섞기 싫었다면 그런 말조차 안 했을 것이다. 근래 들어 부쩍 친해져서 그런지, 팽무강의 농에 농으로 대응해 주는 그였다.
그때였다.
“그럴 필요 없소.”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곡경이었다.
그리고 곡경 뒤에는 무허대사와 탁무자가 있었다.
곡경이 지친 듯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곧장 무림맹으로 갈 거요. 그러니 양 부주께서는 묵룡부 찍고, 바로 맹으로 오시오.”
평소라면 이놈이 웬일로 말투가 이리 담담한가 했겠지만, 사태가 심각해서 그런 말도 안 나왔다.
양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웬일로?”
곡경이 손으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무허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폐하의 곁을 지키기로 하였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연위가 조심스레 말했다.
“검선 노선배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탁무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해서, 내가 벌써 반쭉정이가 된 것 같은가?”
“아,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흔치 않은 연위의 당황이었다.
탁무자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땡중이 없었다면 쭉정이가 맞지. 내 주치의(主治醫)가 옆에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것이야.”
“두 분께서 폐하 곁에 계셔 주신다면 이보다 더 든든한 호위는 없을 것입니다.”
연위가 곡경을 바라보았다.
피로한 안색이지만, 그 역시 천하를 논하는 인물이었다. 급박해진 사태에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탁상공론을 해 봐야 별 의미는 없을 것이오. 나는 오늘 밤에라도 곧바로 움직일 생각이오.”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지금 당장 떠나도록 함세.”
그때, 기천웅이 손을 들었다.
“나도 가도록 하지.”
순간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탁무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장난하러 갈 생각인가, 자네?”
기천웅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말이 그게 뭔가? 그래도 대륙에서 첫째를 다툰다는 늙은이가.”
“그거야 중요한 건 아니지. 한데 자네는 왜 가려고?”
“당연한 것 아닌가? 내 머저리 같은 아들놈은 지금쯤 황제가 죽었을 거라는 보고를 듣고 있을 게야. 그런 상황에서 내가 여기에 남아 있으면 어떻게 생각하겠나?”
“흐음.”
“나도 꺼져 주는 게 낫지. 이미 황제와는 거래를 끝냈어. 그렇다고 중원 아무 곳에나 있을 순 없으니 소문 자자한 이 패왕이라는 아해를 만나 봐야겠네.”
“무림맹으로 가지 왜?”
기천웅이 서신을 흔들었다.
“이따위 말 같지도 않은 사태가 난 곳으로 가라는 건가? 세작의 혀가 달콤했다 한들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혔다면 일이 이 지경으로 번지지 않았어.”
“…….”
“맹주 놈이 확실하게 맹도들을 휘어잡았다면 모를까, 내가 가 봤자 제이의 반흑파 사태가 터질 것이네.”
기천웅이 양천을 보며 물었다.
“안 그런가?”
양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동의였다.
무허대사가 웃으며 물었다.
“여기 말코가 알려 준 상단전 수련법은 몸에 좀 맞으시는가?”
기천웅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효능이 없었다면 없다고 딱 잘라 말했을 사람이었다.
그렇게, 황궁 측에서도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진득하게 남아 보세.”
* * *
새로운 인연, 새로운 발자취를 그리려 할 때면 그에 맞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장소를 찾아가기 마련이었다.
연호정이 광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
마치 약속처럼 청해에서의 일을 마무리한 일행들도 돌아왔다.
단숨에 외성을 통과해 내성을 눈앞에 둔 그들은 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들의 입맹을 확인한 정보원들은 곧장 제갈문호에게 연락을 취했고, 제갈문호는 홀로 외성으로 나가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이런 찢어 죽일 놈들이!!”
당관의 분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무극에 오른 기쁨을 단숨에 밑창까지 처박아 버리는 사태였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 차마 살기를 드리우진 않았지만, 눈빛만 보면 반흑파 무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독공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그따위 개 같은 짓을 벌였단 말인가!”
당관이 내성으로 이어지는 성문을 지키는 수문위사들에게 외쳤다.
“당장 문을 열어라! 내 그놈들을 하나하나 만나 칠 일 밤낮 동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리라!”
화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평소 그의 성격을 감안해도 과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만큼 연호정을 위하고 천하의 안위를 생각한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분노가 과했다.
제갈문호가 양손을 들었다.
“진정하시오, 당가주.”
“이게 진정할 일이오?! 도대체 당신들은 뭘 했소! 그 망할 놈의 자식들이 그렇게 설치고 있는 동안에……!”
그때, 묵비가 말했다.
“가주님.”
당관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를 듣곤 말을 멈추고 그저 씩씩댔다.
옥청이 조심스레 말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잘 다스리지 않으면…….”
“안다.”
짤막하게 대답한 당관이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치솟는 울화를 애써 다스리는 기색이었다.
담담히 당관을 지켜보던 제갈문호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극에 오른 걸 축하드립니다.”
“…….”
“앞으로 더 잘해 봅시다.”
한참을 씩씩대던 당관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왜 이리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는 건지. 무극에 오르면 다들 이러는 건가.”
자신이 이룩한 경지에 대한 자부심은 있으나, 한 번씩 스스로를 잃는 데에 대한 불안감이 엿보이기도 했다.
당관이 착잡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놈은 어디 있소? 아니, 알겠군. 내성 맹주부 인근에 있어.”
“그렇습니다. 무사들도 곧 해산할 겁니다.”
“반흑파에 속했던 놈들, 꼭 불러다가 나와 대면시켜 주시오.”
“가주께서 손을 쓰지 않겠다는 확답만 해 주신다면야 어려울 것 없지요.”
“그리고…….”
당관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놈 상태는……?”
그때, 연지평이 대답했다.
“형님은 괜찮을 겁니다.”
제갈문호가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연지평의 얼굴에도 걱정과 아픔이 묻어났지만, 출맹 전보다 훨씬 더 무던해진 듯 보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군사님?”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자네 형이 어디 보통 사람인가? 오히려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맹 내 무사들을 하나로 만들었으니, 과연 걸물은 걸물이라 하겠네.”
“다행입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말을 더 해 봐야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묵비가 담담한, 그러나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연 공자에게 데려다주세요, 군사님.”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을 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