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27)
1027화. 무제(武帝) (2)
마지막 아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마친 연호정은 맹주부 수뇌부들에게 인사 후 모용군과 함께 뇌옥으로 향했다.
뇌옥 최하층으로 내려가며, 모용군이 물었다.
“기분은 어떤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소.”
“그렇겠지. 자네 성격에 이 사람들 눈치 보면서 여기 쑤시랴, 저기 뭉개랴 하느라 오죽이나 힘들었겠나. 묵룡부로 가서 눈치 안 보고 날뛸 생각에 아주 짜릿하겠지.”
흔치 않은 모용군의 농담이었다.
농담이지만, 또한 사실이기도 했다. 연호정은 무림맹의 분위기에 맞춰 확 치고 나가야 할 때조차 억지로 힘을 숨기곤 했다.
적어도 묵룡부에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가주님.”
“말씀하시게.”
“잘 부탁드리겠소.”
여러 가지 의미가 섞인 말이었다.
모용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구먼.”
“나도 가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변하실 줄은 몰랐소.”
모용군은 침묵했다.
평소라면 이럴 바에야 내가 확 무림맹을 먹어 버려야겠다며 진심 섞인 농담이라도 할 텐데, 워낙 사태가 심각해서 그런 말도 안 나왔다.
그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맹주님은 강한 분이오. 가주께서 볼 때야 답답하고 지나치게 두루뭉술할 수 있지만, 그분이 잡아 주는 중심은…….”
“나도 아네.”
“그렇소?”
“물론 나라면 절대 그렇게 하진 않았을 거야. 그래서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지. 그러나 공공대사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엔 동의해.”
“…….”
“다만 내가 답답한 것은 봉공과 장로들이야.”
“……?”
“그조차도 공공대사가 틀어막고 있었겠지만, 봉공과 장로들도 일파의 주인들이네.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압도적인 집결력을 만들 수 있을 거야. 달리 생각이야 있겠지만, 가만 두고 보고 있자니 답답한 건 어쩔 수 없군.”
연호정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부분에서 두 사람은 참 닮았다. 일을 처리하는 세부적인 부분은 다를 수 있겠지만, 어디가 중요한지를 짚어 내는 눈만큼은 꼭 닮은 것이다.
“가주께서 많이 도와주시오.”
“나는 상무 연합으로 돌아가야지. 지금 내가 나서 봤자 맹주 정치에 해가 될 뿐이야.”
“…….”
“다만 떠나기 전에 들들 볶기는 해야겠지. 수용할 여유가 있다면 할 것이고, 아니라면 무시하겠지만 적어도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알아주겠지.”
가만히 모용군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돌연 크게 웃었다.
“정말이지, 혼자서 어떤 깨달음을 얻으신 거요?”
“착각하지 말게. 그 양반들이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모용군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삼교 놈들을 깡그리 날려 버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내가 대장이 아니라면, 대장 놈이 대장 노릇을 제대로 하도록 회초리라도 들어 줘야지 어쩌겠나.”
“그렇소?”
“나야 그렇다 치고, 자네는 어떤가?”
“……?”
“정말 아무런 아쉬움도 없나?”
“없소.”
철컹!
최하층 뇌옥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연호정은 아무 미련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무림맹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소. 그저 잠시 들를 곳이었지.”
“…….”
“말했듯, 나는 이단아요. 묵룡부에서도 이단아라 할 수 있겠지만, 묵룡부 내의 이단아는 나 하나가 아니오. 누구라도 들어와서 최고가 될 수 있는 곳이지. 차라리 나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환경이 아니겠소?”
“……그런가.”
“가주처럼, 나도 나에게 맞는 곳으로 찾아가 나만의 집을 만들면 그만이오.”
그렇지 않아.
모용군은 저도 모르게 그리 말할 뻔했다.
‘나야말로 너를 보고 상무 연합을 택했다.’
무림맹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연호정의 말이 이상할 정도로 심금을 울렸다.
모용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맹의 정점에 서고 싶었지만, 정작 지금의 무림맹은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전시가 아니었다면 제게 맞는 왕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교와의 전쟁을 목전에 둔 지금, 그것은 강호에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할 뿐이었다.
“묵룡부에서 상무 연합은 가깝지.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겠지만, 생각나면 한번 들르게.”
“그 말, 그대로 돌려주겠소.”
“한 마디를 안 지지.”
“하하하.”
그렇게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뇌옥 복도를 걸었다.
중간쯤 걸어갔을 때, 모용군은 쇠창살이 달린 어느 감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청년이 바닥에 앉아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넋이 빠져 버린 건지 얼굴은 창백했고 두 눈은 풀려 있었다.
남궁현이었다.
모용군의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어렸다.
그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가 반흑파나 남궁현 같은 사람이었다. 차라리 삼교 놈들은 야망이라도 있다. 무식하고 능력이 없으면 최소한 무엇이 옳은지라도 알아야 하는데, 저놈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 역시 저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용군은 그 가정이 사실이 될 수도 있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맹목적인 욕심은 사람을 파국에 치닫게 한다. 새삼스레 배우는 바가 컸다.
그렇게 복도를 계속 걷던 두 사람은 마침내 홍익천, 아니 이름 없는 삼사왕(三邪王)의 앞에 섰다.
마치 남궁현처럼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중얼거리고 있던 삼사왕이 움찔했다.
잠시 후.
“아직 떠나지 않으셨군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
혼자 중얼거리는 것 외에는 말할 일이 없었던 삼사왕의 목소리는 탁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여전히 감각은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안대로 눈까지 가렸는데, 이번에도 상대가 연호정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게다가 모용가주님까지.”
“더러운 혓바닥으로 내 성을 부르지 마라.”
모용군의 목소리는 냉혹했다.
삼사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구 하나 대화할 사람도 없는 이런 환경에서 며칠 동안 갇혀 있었건만, 용케도 정신이 마모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해서,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연호정이 쇠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제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물론 잠시나마 말동무가 생겨서 기분은 좋습니다만.”
“사음교의 정보력이 아주 일품이더군.”
“……?”
“물론 이곳 사정은 중원 토박이인 우리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지.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야. 게다가 중원은 넓어. 정보력을 최대한 끌어모아도, 이 넓은 땅 어딘가로 작정하고 숨어들려 하면 찾기가 쉽진 않겠지.”
“그렇겠지요.”
“너도 그랬고 신화교의 무장들도 그랬으며 광혈교의 마인들도 그러했다. 그간 정보력을 총동원해 중원 내에 삼교의 고수가 더 이상 없을 거라 보았고 세작들 역시 존재할지언정 활동하진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조차도 확신은 아니었다.”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해서, 듣고 싶은 답이 무엇입니까?”
“나아가, 너처럼 오랜 시간 중원에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면 사실상 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지. 고도로 훈련된 세작은 환경과 완전하게 동화되니까.”
“…….”
“사음교로 한정했을 때, 너 같은 놈이 이 중원에 또 있지는 않을 거다. 그렇지?”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요. 삼사왕이라고는 하나 제 권한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침투 후 교란 명령만 받았으니까요.”
연호정은 물끄러미 삼사왕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삼사왕이 툭 던지듯 말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연호정이 모용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뭔가가 또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연호정이 다시 삼사왕을 바라보았다.
삼사왕이 고소를 지었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는 힘들군요. 저도 그새 무뎌진 모양이에요.”
“그럴 리가. 무뎌진 게 아니라 더는 사음교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지.”
“그런가요? 그것까지는 모르겠군요.”
“너는 흑과 백을 찢어 놓으려 했다. 실제로 그렇게 해 놓았지. 내가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으니까.”
“제 인생 최대 업적이 그 정도에서 끝난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야. 동맹은 맺었지만, 우리는 한 번도 진정한 하나가 되지는 못했다. 그건 모두가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맹에서 내보내려 했지.”
“…….”
“너의 가장 큰 무기는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고 끌어내는 대인(對人) 능력이 아니야. 정확히는, 그 능력 속에 다른 칼을 숨겨 놓았어.”
“그게 무엇이지요?”
“의심암귀(疑心暗鬼).”
삼사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번 세작이 잡히면, 당분간은 누구라도 세작일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지.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나름의 확신이 있었으니까.”
“…….”
“그러나 이번 사태는 결이 달라. 너는 세작이면서도 남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조직을 뒤흔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안심하기보다 나와 가까운 사람마저도 세작에 홀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될 거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거야. 우두머리가 제대로 조직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시기의 문제일 뿐 그런 분위기쯤은 금방 바로잡힐 거다.”
“…….”
“즉, 뭔가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해. 어떤 우두머리도 조직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그렇지?”
“…….”
“그 계기가 무엇일까?”
삼사왕은 여전히 침묵했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 것 같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알아냈나?”
“알 것 같소.”
“이번만큼은 나도 감이 안 잡히는군.”
“저놈을 좀 알아서 그렇소. 제대로 부딪쳐 본 적이 없었다면 나도 몰랐을 거요.”
모용군이 삼사왕을 내려다보았다.
냉혹하기 그지없는 그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었다.
“아쉽구나. 네 능력이.”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아니라, 상무 연합의 맹주로서 조직을 이끌었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삼사왕이 입을 열었다.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저는 많은 씨앗을 뿌려 두었습니다. 그중 태반은 개화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한동안 심심하진 않으실 겁니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삼사왕의 저런 말이 오히려 그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삼사왕의 목소리와 말, 분위기에서 답을 얻은 연호정의 방법을 왠지 알 것도 같았다.
모용군이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
삼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용군의 한숨에는 많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에 혐오는 없었다. 오히려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그 기색이, 감정이 삼사왕의 기분을 확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기분이 왜 가라앉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지를 박살 내 놨더니만, 마지막 목은 가주께서 베어 냈군.”
“…….”
“너와는 한 번 만났으니 그걸로 족하다.”
지금이 아닌, 흑제성에서.
“내세에서도 다시 만나진 말자.”
연호정도 몸을 돌렸다.
그때, 삼사왕이 입을 열었다.
“역시 사형이군요.”
“물론이다.”
“……당신은 참 잔인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곧 죽을 사람 팔다리를 죄다 찢어 놓았어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그런 면은 다른 세작 놈들과 별다를 것도 없구먼.”
삼사왕이 벽에 등을 기대었다.
“내세가 있다면, 저는 당신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짝사랑까지는 못 막지. 걸리면 또 뒈질 거다.”
“하하.”
그렇게 연호정과 모용군이 뇌옥을 나섰다.
다음 날.
삼사왕은 벽에 뒤통수를 박아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