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28)
1028화. 무제(武帝) (3)
“연 공자.”
“왔나.”
청해성에서 함께 싸웠던 일행이 도착했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차분하고도 이지적인 묵비, 특유의 사납고 건들거리는 외양의 패율, 가을바람처럼 선선한 기도의 옥청.
그리고.
“형님.”
이 사태를 다 들었음에도 연지평의 얼굴에는 동요의 기색이 없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저희야 돌아왔으니 상관없지만, 형님은 다시 나가셔야 한다면서요.”
“그렇게 되었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바라보던 연지평 역시 미소를 지었다.
“참 쉽지 않네요.”
이런 사태 앞에서도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연호정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연지평이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차분해 보였다.
연호정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어쩌겠냐. 중간에서 난장 친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책임을 논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상황이었습니다.”
“강호에서의 책임이란 곧 죽음이다. 죽지도 않고 호통까지 쳐 가면서 돌아가는데, 이 정도면 선방한 것이지.”
연지평은 연호정을 이해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다.
연호정은 반흑파들에게 쏠릴 증오마저 삼교로 향하기를 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흑도를 향한 그들의 증오는 개인사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아니나,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인 연합체 내에서 그들의 행위는 분명 잘못되었다.
사실상 전시에 가까운 지금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은 내란죄로 참수형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과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그들까지 품에 안았다.
“군사님이 힘드시겠군요.”
“음?”
“군사님께서도 강하게 압박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네가 거기까지 보았구나?”
“예? 아, 보았다기보다는…… 그냥…….”
연호정이 감탄하자 오히려 연지평은 당황했다.
묘한 눈으로 동생을 보던 연호정이 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이놈. 이놈.”
“으어어.”
“그래도 일말의 걱정은 했다. 강호는 무공이 전부가 아니니까. 하지만…….”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그 정도 안목이면 충분하다. 너라면 괜찮아.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을 거다.”
제갈문호는 무림맹을 공포 정치에 가깝게 짓눌러 버릴 생각이었다.
그것은 반흑파 때문이었다. 중간에 남궁인이 죽고 반흑파의 발 빠른 행동으로 인해 당황했지만, 마음먹은 것을 반드시 밀어붙이겠다고 천명했다.
와중에 세작이 잡히고 연호정이 물러난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공공대사의 힘을 등에 업은 제갈문호의 무지막지한 압박 정치가 시작될 것이다.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무림맹의 무사들은 숨도 못 쉬고 칼을 갈아야 할 것이다.
연지평은 바로 그것을 본 것이었다. 그것도 이 사태를 직접 겪은 게 아니라 들었을 뿐인데도.
“본가를 잘 부탁한다.”
순간 연지평의 눈이 흔들렸다.
가문을 부탁한다는 형의 말.
소가주직을 거부한 형은 스스로 천하에 몸을 던져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문 생각이 아예 안 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버지의 역량이 누구보다 뛰어나기에 당장은 안심할 수 있지만, 세대가 교체되면 어떤 조직이든 뒤숭숭해질 수밖에 없다.
‘형님이 나를…….’
사랑해 마지않는 혈육이긴 했다. 하지만 강호인으로서 인정받지는 못했다.
청해로의 여정에서 무공을 인정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연지평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야.
무공만이 아니라 안목 또한 한 명의 강호인으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지평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찬사는 없을 것이다.
“천효락은?”
“신마림을 수습한 후 무림맹으로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곳엔 막원 선배님께서 남으셨습니다.”
“그렇군.”
광혈교의 잔당들이 다시 쳐들어올 가능성이 없진 않다. 그것을 위해 막원이 남았다는 것이다.
“사형.”
지금껏 묵묵히 있었던 부선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그렇게 됐어.”
부선이 서늘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무림맹의 무사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녀로서는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지평도 침착한 와중에 그녀가 사고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하실 건가요?”
“그래야지.”
“알겠습니다. 채비를 하겠습니다.”
“부선.”
“네?”
“여정에 고생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안면이 있지만 부선은 달랐다. 하물며 그녀는 생각보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연호정도 없이 이곳으로 오는 동안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부선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연지평이 말했다.
“나중에 또 뵈어요, 누님.”
“으응? 어…… 그래.”
피식 웃은 연호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가주님께서는?”
“군사님과 함께 가셨습니다.”
“그렇군.”
그 역시 당관의 기세를 느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한결 더 깊고 날카로워진 기도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무공 자체가 상단전을 기반으로 한 신공이라, 다른 무극수들보다 정신 연마를 잘해야 할 것이다.
“…….”
연호정이 고개를 돌려 묵비를 보았다.
묵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한 번만 더 말도 없이 자리 뜨면 연 끊을 거예요.”
“그러냐.”
“당하는 것도 한두 번이죠.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말 한마디 남길 시간도 없었나요?”
“있었지.”
“그럼 연 공자를 걱정하는 우리가 우스웠어요?”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면 결국 못된 버릇에 불과하군요.”
“그런가 보이.”
“그 정도 버릇도 못 고치는 남자와 강호를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을 부르짖을 때를 제외하면,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
묵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좋아요. 봐주죠.”
그녀가 몸을 돌렸다.
“어디 가?”
“바로 떠날 거잖아요? 씻고 채비를 해야지요.”
“어? 근데 너 손 다쳤냐?”
“하도 시위를 당겨 대서 그래요.”
“연약한 것.”
“뒤통수 조심해요.”
그 말을 끝으로 묵비는 파군각으로 향했다.
슬그머니 다가온 패율이 팔꿈치로 연호정을 툭툭 쳤다.
“나중에 잡혀 사는 거 아니냐?”
“예? 저요?”
“그럼 너지 누구야?”
“저랑 묵비를 말하는 겁니까?”
“이 새끼 이거 왜 이래? 부끄럽냐,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문제라서요.”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등을 돌린 채 걸어 나가는 묵비의 신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 많습니다. 저 녀석은 최고의 남자와 함께할 자격이 있어요.”
“크흠.”
어째 분위기가 말랑하길래 잔뜩 놀려 주려고 했는데 당황은커녕 멋쩍은 태도도 안 보여 주니 영 재미가 없다.
“그나저나.”
패율이 팔짱을 꼈다.
“그렇게 가는 거냐?”
“선배와의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습니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패율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지.”
“이해해 주시는 겁니까?”
“이걸 이해 못 하면 어쩌겠냐.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머저리들이 난리를 쳐 대는 통에 상황이 이렇게 된 건데.”
패율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괜찮다.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나도 잠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선배.”
“너도.”
그렇게 연호정은 한 사람, 한 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인연들을, 그는 그렇게 담백하게 정리했다.
* * *
일행의 숫자는 단출했다.
연호정을 주축으로 부선과 묵비, 강량과 진양이 있었다. 연호정과 함께하기로 한 사마현도 당연히 끼었다.
그렇게 여섯 명이다.
처음 무림맹으로 왔을 때는 모두가 성대하게 환영해 주었지만, 조촐하게 나가는 지금 그들을 배웅해 주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맹주님께서는 봉공회의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셨네.”
제갈문호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맹주님까지 오시겠습니까.”
“이해해 주어서 고맙네.”
제갈아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호정.”
연호정이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군사님 적당히 귀찮게 해라.”
“내가 뭘!”
“그 시간에 무공이나 연마하란 뜻이다.”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제갈문호를 바라보았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동생 때문에 일부러 무공을 멀리할 필요는 없다.”
“……!”
“네 재능은 이대로 썩히기엔 너무 아까워. 그 시간에 철저하게 무공을 갈고 닦아라. 그게 오히려 군사님과 우리 모두에게도 좋을 일이야.”
“……좋을 일이라니?”
“전쟁이 벌어지면 넌 어떠한 부대의 군사로 참여하게 될 거야. 현장에서 직접 싸우는 군사는 온 천하를 뒤져도 많지 않다.”
“…….”
“모든 족쇄를 풀고 달려 봐라. 너도 곧 무종을 돌파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조언이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올려다보던 제갈아연이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너나 잘해, 인마.”
이번 헤어짐은 자칫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사이에 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있으니까.
남녀 간의 감정을 떠나,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낸 사람이 떠난다고 하면 섭섭하고 허전할 수밖에 없다.
연호정이 쓰게 웃으며 범오를 바라보았다.
“스님.”
범오가 고개를 숙였다.
“방장 사형께서 좋은 경험이라며 다녀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당분간은 맹에 있을 생각입니다. 충분히 준비되었다 싶으면, 그때 찾아가도록 하지요.”
“스님께서 와 주신다면 천군만마가 따로 없을 겁니다.”
연호정이 마지막으로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몸조심해라.”
“맹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담백한 인사였지만, 가장 묵직한 인사이기도 했다.
연호정이 말에 올랐다.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지요.”
히히힝!
그렇게 연호정 일행은 호남으로 향했다.
피비린내 나는 거친 땅, 바로 흑도의 땅을 향해서였다.
한참을 달려 나가던 연호정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묵비.”
목소리부터가 다르다.
“말해요.”
연호정이 멀리 보이는 한 야산을 가리켰다.
“진양과 강량을 데리고 저곳으로 향해라. 최대한 천천히 갈 테니까, 나와 발을 맞춰서 오면 된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여유롭게 갈 거야.”
묵비의 눈이 번뜩였다.
그녀는 연호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과 목소리만으로도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좋아요.”
“따로 신호는 주지 않을 거야.”
“걱정 말아요. 한두 번도 아닌데.”
“좋아.”
강량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히히힝!
묵비가 곧장 말머리를 돌려 연호정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어엇! 누님!”
강량이 곧장 그녀의 뒤를 쫓았다. 당연히 진양도 함께 달렸다.
사마현이 물었다.
“뭔 일이오?”
“너는 반대쪽이다. 나를 보면서 따라오면 돼.”
“……?”
“네 실력을 보겠다.”
사마현이 투덜거렸다.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소.”
스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마현이 사라졌다.
부선은 내심 깜짝 놀랐다. 빤히 보고 있었는데도 신형을 놓쳤다. 그리고 신형을 놓친 순간 인기척까지도 놓쳐 버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은신술이었다.
“자, 그럼.”
연호정이 부선의 등을 툭 쳤다.
“체력 회복도 할 겸, 천천히 가면서 얘기나 할까?”
놀란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부선은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봤는데도 이 사람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좋아요.”
“사자신권은 어때?”
“하자는 얘기가 결국 무공이었어요?”
“뭘 더 바라?”
두 마리의 묵룡이 좁은 산길을 이동했다.
누가 봐도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