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29)
1029화. 무제(武帝) (4)
“……!”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말을……?”
“그렇소.”
모용군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심란해 보였다.
“처음에는 그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
“여러 준비를 한 것 같더군.”
“……!”
뇌옥에서 삼사왕과의 대화를 제갈문호에게 들려준 그였다.
당시 모용군은 그들의 대화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유추할 수가 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그러나 조금은 이상한 연호정의 이른 탈맹이었다.
“이상하긴 했소. 반흑파가 선동을 일으키고 그에 휩쓸린 것은 큰 문제지만, 연호정 그놈이 끝까지 버티고 있겠다고 하면 그를 두고 나가라고 손가락질할 머저리는 없을 것이오.”
“하지만 나갔지요. 그 자신이 맹에서 나가는 게 모두를 위해 훨씬 더 나은 선택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렇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리고 이 그림은 세작 놈이 원하던 것이었소.”
알고도 걸릴 수밖에 없는 작전.
그것이야말로 일류의 작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부분에서 다소 의아했지. 흑과 백, 두 집단에 강한 불신을 일으켰지만 그렇다고 동맹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오. 만약 연호정 그놈이 여론에 당하거나 세작이 잡히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직면했겠지만, 그래도 동맹의 파기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오.”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작 놈은 크게 만족했소. 아니, 만족을 아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계략이 충분히 통했다고 자신하는 듯했소.”
“…….”
“동맹 관계는 유지되면서 연호정과 그 일행만 무림맹에서 나간다? 무림맹은 만만한 곳이 아니오. 연호정만 없으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오.”
“하지만.”
“…….”
“연 소부주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랬을 거요.”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즉, 세작 놈이 원했던 것은 연호정 ‘개인’의 이탈이오.”
“……!”
“이모저모 생각해 봐도 그것밖에 없소. 물론 이 사태로 인해 무림맹은 군대처럼 똘똘 뭉칠 것이며 그 과정을 보고 삼교도 나름의 대응을 하겠지만, 연호정이라는 이름 석 자는 삼교에서도 최중요 인물로 분류되어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제갈문호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연호정은 이런 말을 했소.”
“……?”
“의심암귀.”
의심이 곧 없는 귀신도 생기게 한다는 말이었다.
“세작 놈이 원하는 것은 무림의 혼란이오. 연호정은 그 중심에서 자의로 벗어났소. 설령 지금 그 녀석을 도우러 간다 한들, 오히려 그놈 작전에 피해를 줄 확률이 높소.”
“이, 이런!”
제갈문호가 탁자를 내리쳤다.
“왜 말하지 않았는가! 진즉 말했다면 무리해서라도 고수들을 붙여 주었을 텐데!”
당장 운용 가능한 전투 부대가 있다. 어느 정도 붙여 주었다면, 연호정은 그 병력까지 합산하여 계책을 짤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손보다는 열 손이 나은 법. 훨씬 더 쉬운 길을 두고 왜 연호정은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전투 부대가 부담스러웠다면 남궁승이나 종리백에게 부탁해도 되었을 일이다.
“자신감이 있으니까 녀석도 이대로 간 것이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군사에게 해 주는 이유는 녀석을 걱정하라는 것이 아니오.”
“……?”
“본인 할 일이나 잘하라고 이 말을 해 주는 거요.”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창밖을 보고 있던 모용군의 시선이 정확하게 제갈문호를 향했다.
“전투 부대? 성천? 그래, 전투 부대는 차치하고서라도 성천급 고수를 붙여 줬다면 훨씬 더 쉽게 일을 해결할 수 있었겠지. 그럼 무림맹은 뭐요?”
“무슨……?”
“그토록 대단한 전력을 모아 두고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냔 말이오.”
“……!!”
“지금부터 무림맹은 단 한 명의 낭비도 없이 전쟁 준비를 해야만 하오. 그 과정에서 도검의 제왕들은 절대적인 역할을 맡아야 할 터. 봉공과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요.”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군사께서는 지금 무림맹의 인원이 남아돈다고 생각하시오?”
“…….”
“남아돌았다면 그 반흑파의 기질을 진즉 눌러 버리지 그랬소? 준비만 완벽했다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안 그렇소?”
할 말이 없었다.
제갈문호는 너무나도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군사인 이상, 본인이 실수한 일에 대해 변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놈이 굳이 말을 하지 않고 간 것도 내 성격을 알기 때문이오. 내가 이 과정을 다 군사에게 전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을 거요.”
“…….”
“즉, 연호정은 이번 일로 반흑파뿐만이 아니라 군사인 당신에게도 경고한 것이오. 가지고 있는 보검 보도들을 똑바로 휘둘러 준비하라고.”
“…….”
“누굴 돕네 마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관두시오. 남 도울 시간에 무림맹 정비나 제대로 하란 말이오. 고작 세작 하나 때문에 흔들릴 정도로 연약한 집단이 아닌, 십만 대군이 공격해도 흔들리지 않는 정예로 만드시오.”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차분하고도 준엄한 일갈에 제갈문호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해 온 일에 대한 자부심은 있지만, 실수도 적지 않았다. 실수가 있었다면 다음부터는 안 해야 하는데, 똑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반복한 것인가.
바쁘고, 또 바빴다. 원정 준비에 타격이 갈 정도로.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면 그런 변명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연 소부주의 중요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또한 옳은 말이긴 하지. 질투는 나지만, 그 녀석의 존재감은 천하를 아우르고 있소. 만약 그놈이 적의 손에 죽는다면 우리는 십만 대군을 잃은 것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을 거요.”
“그러니까!”
“그걸! 그놈도 알고 있소. 그걸 자각하고도 무림맹의 도움 없이 갔다는 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오.”
모용군이 팔짱을 낀 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걱정되는 건 그 세작 놈이 처음 작전을 짤 때 연호정의 능력을 어느 정도로 잡았는가 하는 것이지.”
* * *
“함정이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부선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다독였다.
“감당할 자신이 있으신 거군요.”
“감당할 자신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 하나만 믿고 밀어붙일 만큼 바보가 아니야, 나는.”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부선의 불안감을 말끔하게 씻어 주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
“그런가요.”
“그래도 괜찮아. 우리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기가 하나 있거든.”
그게 무엇이냐고 부선은 묻지 않았다.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
연호정이 말의 속도를 늦췄다.
저 멀리, 좁은 협곡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보였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서 합공당하기가 쉬울 것이다.
좁다고는 하지만 초절정고수라도 충분히 날뛸 수 있을 만큼의 너비. 문제는 좌우 절벽과 후방이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지형도 지형이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감이 그의 상단전을 마구 자극하고 있었다.
우두둑.
천천히 목을 돌려 몸을 푸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화끈했다.
부선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오는 건가요?”
“이미 왔다.”
“신기하네요. 세작이 정말로 이걸 노린 거라면, 그 정도 병력을 항시 주둔시켜 놓을 수는 없었을 텐데요. 저들과 연동하는 정보책이라도 있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라고 봐.”
“왜죠?”
“세작 놈은 일을 벌이기 직전에 저들에게 연락을 취했을 거다.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최소한 보름 안에는 만나게 되겠지.”
보름.
주변 지형을 살피며 환경에 익숙해지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무림맹에서 호남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개다. 그중 하나를 택해 이동하려면 저들 역시 나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보름이란 시간은 딱 적당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지형은……?”
“그래.”
철컹!
어깨에 광룡부를 올려놓은 연호정의 얼굴에 은은한 투기가 일었다.
“내가 선택한 전장이다. 이쪽 일대는 빠삭하니까.”
부선은 묘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사매는 준비가 됐나?”
“물론이죠.”
“죽을 것 같으면 맞서 싸우지 말고 물러나도 돼. 원래 이 싸움은 나 혼자 끝내려고 했던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협곡의 입구까지 말을 몰았다.
“……!!”
부선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떠한 기척도 찾을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를 전의(戰意)가 느껴졌다. 그녀의 감각도 보통 날카로운 것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와라.”
나오라는 말 한마디에 정말 나올까?
“……!!”
부선의 눈이 흔들렸다.
협곡 안쪽 그림자에서 두 명의 남녀가 걸어 나왔다.
오싹!
두 남녀를 확인하자마자 부선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살벌한 기세를 풍기거나 연호정처럼 대단한 존재감을 드리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순간 목이 달아나는 환상을 보았다. 음험하고 사이한 이들이었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황룡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곁에 있던 부선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황룡기가 스며들며 중단전과 상단전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었다.
차분함 이후에는 투지다.
연호정의 마음을 담고 있는 황룡기는 부선의 공포를 없애고 잠들어 있던 투지까지 일깨웠다.
“뭐냐, 너희는.”
연호정의 심드렁한 질문에 남자가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참 길었다. 이제야 만나게 되니 외려 반갑구나.”
경박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경박했지만, 기도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놈보다 강해.’
과거 하은교와 만났을 때 겨루었던 호연종이라는 놈이 있었다.
저놈은 그놈보다 강하다. 한데도 그놈과 비슷한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음황무(陰荒武)!!’
음황무를 익혔다는 것은 호연종이란 녀석처럼 교주의 피가 섞인 놈이라는 뜻.
광룡부를 쥔 연호정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사음교냐.”
“호오, 그걸 한눈에 아나? 하기야 삼호법(三護法) 그 자식과 한판 붙었다고 했었지?”
삼호법이란 호연종을 뜻하는 것이리라.
음황사기(陰荒邪氣)를 익힌 자, 그리고 삼호법이라는 단어.
답은 간단했다.
“너도 사음교의 호법인지 뭔지 하는 애송이냐?”
“어린놈이 말버릇 보게. 애송이는 네놈이지, 이놈아.”
여유가 한껏 깃든 목소리였다.
실제로 남자의 나이는 오십이 훌쩍 넘었다. 나이로는 호연종이 훨씬 위지만, 실력으로 호연종을 누르고 두 번째 호법 직위를 얻은 고수가 그였다.
사음교 이호법(二護法) 호연광.
광룡부를 든 연호정처럼, 그 역시 어깨에 턱 하니 올려놓은 중병이 하나 있었다.
강철로 된 장봉(長棒) 위로 봉신(棒身)과 이어지는 철추(鐵椎)가 있다. 언월도의 칼날보다 긴 철추의 두께는 거의 성인 여성의 몸통 두께에 육박했다.
호연광이 웃으며 중병, 거룡추(巨龍椎)를 겨누었다.
“문답무용. 어디 소문 자자한 묵룡부 작은 주인의 실력 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