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30)
1030화. 무제(武帝) (5)
‘…….’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호연광은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이상하군.’
연호정의 실력에 대해서는 보고를 충분히 받아 왔다.
벽산호장을 넘어 패왕이라 불리는 연호정의 실력은 능히 성천에 이름을 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물론 거의 절대다수의 삼교인들은 연호정의 실력이 다소 부풀려졌다고 말한다. 그중에는 똑똑한 사람도 많았다.
사실은 그게 상식이었다. 애초에 연호정은 단독으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고수가 있으며, 심지어 같은 성천과도 인연이 있어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 도움을 받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전과(戰果)는 확실하다. 하지만 실력은 최고가 아니다.
호연광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연호정의 기도를 살펴본 그는 상대가 대륙의 신선제왕급으로 불리기에는 아주 약간의 하자가 있음을 깨달았다.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미묘하다.
무극에 오른 자들에게도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방심하는 순간 목이 달아나는 것은 다른 영역의 고수들과 비슷하다. 아니, 오히려 더 위험하다.
그래서 한참 아래인 실력으로도 몇 수 위의 고수를 죽이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물론, 그 경지까지 오른 고수 자체가 많지 않지만.
다만, 그래도 수준 차이라는 걸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당연히 경지가 높으면 승률도 올라간다.
‘이상하게 손이 안 움직여.’
연호정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분명 자신과 비슷하거나 아주 미세하게 떨어진다.
저 정도면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왜?
‘저 계집이야 볼 필요도 없고.’
연호정 뒤로 물러난 계집이야 쓸 만하기는 하나, 괴력난신의 다툼에 낄 수준은 아니었다.
달리 술수를 쓸 무력도 아니고, 그런 기색도 없다.
‘피 터지게 싸워 보고 싶긴 하지만.’
호적수를 만나기란 어렵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임무였다.
호연광이 입을 열었다.
“안 되겠군. 저놈 영 찝찝해. 너도 한칼 도와라.”
말없이 서 있던 여인이 호연광 옆으로 다가와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갑을 스치는 검날 소리가 무척이나 음험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익숙한걸?’
겉으로는 사십 대 정도로 보였지만, 실제로 여인의 나이는 그보다 더 먹었을 것이다.
여인 역시 사음교의 무공을 익힌 것 같았다. 어떤 무공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질이 그렇다. 중원 무맥(武脈)에 드리워진 친숙한 냄새가 아닌, 이질적이고 황량한 모래 냄새가 났다.
그런데도 어딘가 익숙하다.
사음교의 무공이라서가 아니라, 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검기(劍氣) 자체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흐음.’
가만히 여인을 보던 연호정이 말에서 내려왔다.
“부딪치는 수밖에 없나.”
움찔.
호연광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말에서 내리는 동작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자세가 흐트러졌으니, 그 순간에 공격을 감행하면 먹혀들었을 것이다.
한데 공격하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나가려는 거룡추를 의식적으로 막았다.
호연광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 대체 무슨 술수를 쓰고 있는 거냐?”
적 앞에서 공격해야 할 순간을 놓친 적은 없었다. 그것도 본능의 영역에서.
필시 상대가 자신이 모르는 술수를 쓴다고 생각했다.
우웅.
광룡부가 울음을 토해 냈다.
널찍한 도끼날 때문에 거룡추보다 더 큰 위용을 자랑하는 병기가 광룡부였다. 애초에 사람이 쥐고 휘두르기 수월하게 제작된 병기가 아니라서, 도끼날의 두께도 손가락 두 마디 이상 정도로 두꺼웠다.
절단이 아닌 파괴를 위한 병기였다. 거룡추와 부딪쳐도 날 하나 상하지 않을 것이다.
“술수 따위는 없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까딱였다.
“와 봐. 날 죽이기 위해 노숙까지 하면서 기다린 시간을 생각하면 당장 치고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거 아냐?”
호연광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주둥이만큼 실력도 괜찮은지 봐 주마.”
훅.
기다리고 기다렸던 첫 돌격.
땅을 박차는 소리도, 공기를 찢고 나아가는 굉음도 없다.
허깨비처럼 달려든 호연광은 힘차게 거룡추를 내리쳤다.
쩌어어어어엉!!
광룡부의 창대가 비명을 질렀다.
‘어허, 이놈 봐라.’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무겁다.
병기 자체도 길고 무거운 중병인 데다, 그 무게감을 제대로 살린 일격이었다.
땅을 딛은 두 발 주위로 실금이 갔다. 그만큼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선공을 날린 그 동작 자체는 단순했지만, 사방으로 진기를 퍼트려 상대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막으려 든다.
한 수만으로도 호연광의 실력이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겠지.’
호연광이 양손으로 거룡추를 잡았다.
동시에, 제대로 된 공격이 시작되었다.
콰콰콰쾅!
그 무거운 중병이 바람을 가르며 연호정을 공격한다.
연호정 입장에서는 이 정도 거병을 쓰는 자가 성천급의 힘으로 퍼붓는 공격을 처음으로 받아 보는 것이었다.
‘그렇군.’
쩌저저정! 쾅! 콰쾅!
첫 일격 이후, 곧바로 연환기로 전환해 후려친다.
그야말로 파도처럼 몰아친다. 몸도 안 풀고 최상의 타격기를 구사하는 호연광, 일격 일격이 뼈마디가 저릿해질 정도로 굉장했다.
연호정은 연신 후방으로 움직이며 거룡추의 위력을 상쇄했다. 광룡부의 창대가 휘어질 듯 움직였다.
‘이런 느낌이었어.’
거대한 중병으로 상대방을 공격했을 때, 상대가 받는 중압감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 알겠다.
화포가 날아와도 이보다는 괜찮았을 것 같다. 성천에 이른 힘으로 저 무거운 중병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압박감이 실로 엄청났다.
그 압박감까지 더하여 병기의 파괴력을 극대화한다. 무극수도 무공을 익힌 무사인바, 자신이 갈고 닦은 무공과 병기의 활용을 최대치로 구사하는 것이 그들의 주전법이라 할 수 있다.
호연광은 제대로 연마된, 그리고 많은 실전을 겪어 본 진짜 고수였다.
하지만.
스륵!
연호정의 발이 땅을 밀어 냈다.
쾅!
짧고 굵직한 한 방.
광룡부가 아니라 금룡진악권이었다. 소림의 칠십이절예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 무공에, 호연광의 기세가 일순간 확 꺾여 버렸다.
연호정이 양손으로 광룡부를 쥐었다.
콰앙!
횡격으로 휘둘러 호연광을 날려 버린다.
연호정을 밀어붙인 거리만큼 다시 밀려 나간 호연광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어렸다. 연환기를 써서 몰아붙인 자신과 달리, 짧고 위력적인 단타 한 방으로 자신을 밀어 낸 상대의 실력에 깜짝 놀란 것이다.
“이 힘만 센 어린놈이!”
파아아악!
호연광의 좌장이 불을 뿜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력이지만, 발출 자체가 폭발적이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음황신장!’
음황무, 음황신장이다.
사음교주에 비할 바는 아니나, 호연종의 음황신장보다는 한참 강력한 일격이었다.
연호정의 우장이 금룡번천장의 경력을 뿜었다.
콰앙!
호연광의 눈이 흔들렸다.
‘상쇄?!’
음황신장은 침투경에 능하다.
외부부터 파괴해 내부에 도달하는 망치 같은 무공이 아니라, 외부를 찢고 들어가 내부에서 폭발하는 암경(暗勁)이었다.
그 뾰족함은 어지간히 강한 무공이라도 다 뚫고 들어간다. 동등의 힘이라면 정면으로 막을 수 없다. 최소한 한 수 위의 발경이라야 상쇄가 가능한 것이다.
‘설마 저놈의 무공이?’
화아악!
마침내 연호정의 제대로 된 반격이 시작되었다.
용형칠기보(龍形七技步)는 천고의 보법임이 분명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 보에 호연광의 측방 일 장 거리까지 진입했다.
눈으로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속도가 그리 빠르지도 않은데, 어느새 공간을 선점했다.
경악한 호연광이 우수 거룡추, 좌수 음황신장으로 대응했다.
콰콰쾅!
호연광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뭐야.’
거대한 도끼날이 음황신장의 장력을 분쇄하고 거룡추까지 튕겨 냈다.
‘분명 이놈의 기도는……?!’
아무리 완력이 강해도 내공 수준에 별 차이가 없는 이상 이 정도로 밀릴 수가 없는데?
번쩍!
호연광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어느새 공중에 뜬 연호정의 등 뒤로 반투명한 황금빛 신룡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광풍구룡살 일초, 무참.
광룡부가 태풍을 일으켰다.
콰콰콰쾅!!
대지를 박살 낸 경풍이 단숨에 협곡의 좌측 절벽 중앙부까지 기다란 홈을 새겼다.
“미친!”
순간적으로 내공을 퍼부어 음황신보(陰荒神步)를 최대 속도로 펼쳤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번 일격으로 승부가 났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막강한 일격이었다.
“어라? 피했나?”
쩍!
땅을 찍은 광룡부의 도끼날을 뽑아 어깨에 걸친 연호정이 씩 웃었다.
여유만만이다. 강자의 여유였다.
“피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제법이군.”
“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 분노보다도 경계심과 의아함이 앞섰다.
‘엄청난 위력이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특히 자신의 몸을 옭아매는 그 끈적하고 팽팽한 기운이 더 위협적이었다.
자신의 기운으로 상대를 옭아매는 것. 허공섭물의 기예를 쓸 줄 알면 강하게든 약하게든 가능한 일이지만, 상대 역시 그와 같은 술수에 능하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짓이다.
‘그런데도 왜!’
연호정의 황금빛 진기가 자신의 음황사기를 물리치고 사지를 무겁게 했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상대의 힘이 자신보다 한참 우위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방심 따위만 하지 않는다면, 순수 전투력으로는 메우기 쉽지 않은 차이였다.
‘내가 귀신에라도 홀린 건가?!’
그때였다.
“만승기공법(卍繩氣功法).”
차분하면서도 어딘지 우울한 음성.
호연광이 소리쳤다.
“너! 왜 참전하지 않는 거냐!”
“만승기공법과 유사하군요.”
“뭐?”
여인이 호연광의 옆에 섰다.
여인은 호연광을 돕지 않은 게 아니었다. 도울 수가 없었다.
호연광의 무공을 전부 받아 내면서도 끝까지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연호정의 기운은, 이 대 일의 격전을 철저하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족쇄가 이제야 풀렸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본 문에서도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기공법이에요. 오로지 의지만으로 기도의 양과 질을 조절, 순간적인 출력을 높이는 술수죠. 지극히 섬세한 내공 조절을 통해 진기의 밀도 자체를 상승시키는 데에 목적을 둔, 아직 누구도 익혀 본 적 없는 전설상의 공부입니다.”
“뭐?”
“저 남자, 엄청나요. 우리가 읽은 실력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어요. 그저 우리가 착각하도록 적당한 기도만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무극에 오른 이들이 읽는 것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진기의 핵 그 자체다.
나아가, 기도 역시 단순히 조절만으로 경지를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세상에 암살자들이 판을 쳤을 것이다.
여인의 눈이 깊어졌다.
“상단전 능력이 극한까지 발달됐군요. 그걸로 기의 핵마저 조절하다니, 저는 지금껏 그와 같은 고수가 세상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
“당신은 누구죠? 우리가 아는 그 패왕이 맞나요?”
“보타암.”
“……?!”
연호정이 광룡부로 여인을 겨누었다.
“그랬군. 그 익숙함은 다른 게 아니었어. 보타암의 검기(劍氣)였다.”
여인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나는군. 보타암의 연화문은 묵룡부로 갔고, 천안문의 후계자는 나와 연이 있다. 이후 마지막 일파인 천이문이 사음교로 향했다고 했는데, 네가 바로 그 천이문의 수장인가 보군.”
“……!!”
“보타암의 무공을 버리고 사음의 무학을 전수했나? 참 재미있는 인생을 사는군.”
“닥쳐요.”
“안 그래도 닥칠 생각이다.”
부웅!
아무렇게나 광룡부를 휘둘러 본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보타암이든 뭐든, 결과는 변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