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31)
1031화. 무제(武帝) (6)
“…….”
항오의 눈이 번뜩였다.
협곡 우측 절벽 위, 거대한 나무 뒤에서 격전지를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스르륵.
그의 손짓에 따라 은신해 있던 오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검고 묵직한 쇠봉을 어깨에 멨다.
가만히 보면 쇠봉이 아니라 안에 구멍이 난 쇳덩이였다. 언뜻 화포와 비슷해 보였는데, 사람의 어깨에 얹을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된 물건이었다.
항오가 두 손의 손가락들을 교묘히 겹쳐 보였다.
그러자 복면인들이 포구의 방향을 미세하게 조절했다.
‘화망(火網)은 형성되었다.’
오십 개의 포구에서 쏘아진 ‘그것’은 그대로 격전지에 떨어질 것이다. 너비도 삼십여 장을 상정했으니 세 명 모두가 그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호법님과 호법부관의 실력이라면 탄에 맞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 일을 지시한 사람이 이호법이었다. 실제로 그만한 실력이 있으니 이호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테지.
‘아직은 때가 아닌가.’
항오는 은근히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이 물건들은 사음교가 아주 오랫동안 개발한 것이었다. 이곳 중원인들은 모르는 서역의 상인들과 화약 병기를 제조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을 납치하여 만든 것으로, 지금은 서역 놈들의 것보다 훨씬 더 발전한 형태로 개량되었다.
그리고 항오는, 이 병기의 개발자로 이십 년 동안 살아온 병기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아쉽구나. 극사경의 고수와 정면으로 상대하는 광경을 상상했는데.’
극사경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반신의 경지를 넘보는 이들이었다. 병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써 보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법, 반신들과 대치하게 되면 목숨을 잃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숨어서 암습을 가한다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호만 오면.’
항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연호정을 우리가 잡을 수 있다.’
그때였다.
스륵.
어디선가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움찔한 항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
인기척은 없었다.
아마도 바람에 나뭇가지라도 흔들린 모양이었다. 한참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항오는 다시 괴력난신들의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주변을 탐색해 보는 게 좋았을 것이다.
한참 멀리 떨어진 수풀 속에서, 고요하게 시위가 당겨지고 있었다.
* * *
쩌어어엉!
광룡부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콰쾅!
폭발적으로 치고 들어간 장력에 호연광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강하다.’
강하고, 묵직하다.
호연광은 배에 칼을 맞고,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져 시야가 붉게 물든 와중에도 두 눈을 부릅뜬 채 적을 죽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고통이나 충격 따위로 기가 죽지도 않으며, 당연히 그것으로는 걸음조차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연호정의 일격, 일격은 도무지 참고 반격에 들어갈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무어냐, 이 무공은?’
으드득 이를 간 호연광이 음황사기를 극한까지 피워 올렸다.
화아아아아악!
싯누런 모래바람이 용권풍을 일으키는 듯했다.
사방을 휩쓸고 지나가는 사기의 폭풍이었다. 그 폭풍 속에 있는 호연광의 분노 가득한 의지는 흔들리는 다리에 무서운 신력(神力)을 부여했다.
파아앙!
돌진하며 거룡추를 휘두른다.
음황무는 교주가 그에게 직접 하사한 무공이었다. 음황무만으로도 능히 천하 정점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호연광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음황무는 그의 몸을 치장해 주는 무공일 뿐이었다. 음황무는 근본적으로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내공심법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지만, 그것을 발경으로 운용하는 것은 호연광의 깨달음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에게는 오직 이 강철의 병기만이 전부였다.
“이놈!”
쾅!
진각과 함께 내리치는 거룡추.
마치 산사태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쏟아지는 산의 잔해 너머로 거대한 파도까지 밀어닥치는 듯했다. 위세가 엄청났다.
이것이 바로 호연광의 독문무공인 붕산광철무해(崩山洸轍武解)였다.
처음 무극에 올라 전대(前代) 삼호법을 일격에 패사(敗死)시킨 사음교 최고 절학 중 하나.
연호정의 광룡부가 승천하는 용과 같이 움직였다.
쩌어어어어엉!!
호연광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허리가 통째로 꺾이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반쯤은 그랬다. 부러질 것처럼 휘어진 허리를 강력한 내공과 다릿심으로 겨우 지탱했지만, 그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이럴 수가.’
붕산광철무해는 단순히 철봉을 휘두르는 봉술이나 곤법, 철퇴술 따위가 아니었다. 장병이자 중병을 다루는 모든 병기의 궁극에 이른 무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강한 완력을 타고나야 하며, 완력만큼이나 뛰어난 지구력도 요구되기에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입문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 무공을, 고작 도끼질 한 방으로 튕겨 냈다.
그것도 내리치는 게 아니라 올려 치는 일격으로.
‘어떻게 평범한 도끼질로 이런 힘을…….’
콰드드득!
서둘러 몸을 회전해 물러나는데, 어느새 두 발이 땅에 기다란 고랑을 만들었다.
호연광이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여인, 천이문의 문주 공여가 빛살처럼 빠르고 날카로운 검격으로 연호정을 공격하고 있었다.
쩌저저저저정!
검날이 창대를 때리는 소리가 청아하다 못해 화려했다.
놀랍게도 연호정은 공여의 환검(幻劍)을 한 손으로 다 막고 있었다. 그 무거운 광룡부를 한 손으로만 쥐고, 짧게 짧게 휘둘러 검격을 튕겨 내고 있는 것이다.
‘저……!’
요(要)는 반사 신경도 아니고 완력도 아니다.
‘엄청난 공력!’
일격의 위력은 연호정이나 호연광에 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속도로 메운 것이 바로 공여의 검법이었다. 게다가 그녀 역시 무극수이니, 힘이 떨어진다고는 한들 바위도 두부처럼 가를 공격을 구사했다.
그만한 검격을 수도 없이 받아 내면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는다. 아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의 무공을 살피기라도 하는 듯, 입을 꾹 닫고 공여의 눈빛과 검술, 보법을 상대하는 연호정의 모습은 여유가 넘쳤다.
‘여유?!’
아니다. 단순한 여유가 아니었다.
지금 연호정의 눈빛은 까마득히 높이 올라 있는 고수가 하수들의 무공을 봐줄 때나 보여 줄 법한 눈빛이었다.
단 하나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다음 공격이 어딜 어떻게 노릴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미리 도끼를 움직이고 있었다.
‘미친!’
파아앙!
재차 전권으로 진입한 호연광이 붕산광철무해를 펼쳤다.
중단으로 찌르고 들어가 힘으로 적을 꿰뚫어 분쇄하는 술수, 일점파산(一點破山)이었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실력 차가 난다지만 무극수 둘과의 싸움이었다. 제아무리 그라도 방심할 수가 없는 승부였다.
스륵.
호연광과 공여의 눈이 흔들렸다.
한 걸음 움직인다 싶더니, 어느새 연호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연호정이 사라진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검과 철퇴뿐.
‘이익!’
파아악!
병기의 중량이 가볍고 경쾌한 공여는 한순간에 검로를 틀었지만, 호연광은 달랐다.
가능은 하지만, 속도가 느리고 몸에 부담도 컸다. 그만큼 거룡추가 중병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피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 상황을 유도했다면 놈의 다음 공격은……!’
쩌어어어엉!
척추가 부러질 듯 몸을 비틀어 거룡추를 휘둘렀지만, 광룡부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쾅!
호연광의 무릎이 땅을 찍었다.
회전하며 휘둘렀으니 거룡추에 실린 힘도 엄청났을 것이다. 한데 광룡부는 가볍게 그 힘을 짓눌러 버리고 병기의 주인인 호연광까지 무릎 꿇게 만들었다.
호연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서산으로 지는 해.
그 앞에, 시커먼 전포를 날개처럼 휘날리며 잡티 하나 없는 금빛 마안(魔眼)으로 자신을 굽어보는 절대고수가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잔화를 등에 업은 연호정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설상에나 나오는 악신(惡神) 그 자체였다.
“이노옴!!”
티이잉!
무릎 꿇은 채로 몸을 비틀어 거룡추를 놓고 쌍장을 내질렀다. 음황신장이었다.
그때였다.
연호정의 좌수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기묘한 움직임 속, 소매 속에서 튀어나온 흑회색 교룡쇄가 음황신장의 장력을 휘감았다.
치링!
연호정의 뒤를 노리던 공여는 기겁했다. 어느새 한 줄기 철쇄를 따라 휘어져 들어온 사이한 장력이 코앞까지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파바바바박!
공여의 검술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지고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마치 거대하게 만개한 꽃을 검이라는 붓으로 그려 내는 듯했다. 환상처럼 휘둘러지는 환검 속에서 음황신장의 쌍장 공력이 과일 껍질처럼 깎여 나갔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치리리링!
벼락처럼 쏘아진 교룡쇄가 공여의 검날을 휘감았다.
티이이이잉!
기교로는 연호정보다도 앞섰지만, 힘과 속도는 연호정을 따를 수 없다.
교룡쇄로 공여의 검을 봉쇄한 연호정이 광룡부를 치켜들었다.
“천검(天劍)을 노릴 수 있는 무공을 내려놓고 속세의 지검(地劍) 따위나 익혔으니, 네년이 내게 패배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야.”
공여의 눈이 부릅떠졌다.
콰아앙!
“으윽!”
튕겨 나간 공여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흉부와 뱃가죽 사이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
공여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든 검은 자루 위부터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검을 놓는 편이 더 나았겠지만, 그녀의 본능이 그것을 거부했다. 차라리 검신을 강제적으로 부러트려 몸을 내뺀 것이다.
퍼어엉!
빈틈을 노린 호연광이 또 한 번 거룡추를 휘둘렀지만, 연호정의 신들린 보법은 단숨에 공격을 회피해 내는 동시에 포탄 같은 각법으로 호연광을 튕겨 냈다.
후우우우웅.
바람이 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선 채 광룡부와 교룡쇄를 각기 한 손에 쥐고 있는 연호정의 자태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이런…….’
공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원해서 익힌 무공이 아니라고는 하나, 그래도 빛의 경지로 올랐으니 자신의 무력에 대한 자신감은 차고 넘치는 그녀였다.
호연광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사음교주의 수많은 자식 중 한 줌에 속한 재능으로 단숨에 이호법이 된 그의 무력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으로도 안 된다. 몰아붙이기는커녕 제대로 된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오히려 두 사람을 압도하는 연호정의 무공은 비상식적으로 신비롭고 기괴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보타암 역사상 다시 없을 기재라던 연심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도대체 저 청년은 얼마나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났기에……!’
‘그자 말이 옳았어. 정보나 소문 따위로는 잴 수 없는 무력이라고 하더니.’
두 남녀는 허망함을 느꼈다.
상대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족히 이십 년은 덜 산 청년이었다. 무림인의 전성기가 중년부터 시작이라고 하니, 젊다는 표현보다는 어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나이다.
한데도 압도적이다.
하늘 아래 최강을 논할 만한 무력은 아니라고 하나, 바로 그 아래에서 노니는 절대고수 둘을 장난치듯 다뤄 버리는 무력이었다.
“……이놈!”
번쩍!
호연광의 두 눈이 단색으로 물들었다.
흰자위까지도 온통 황색으로 물든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연호정과 닮아 있었다.
“인정할 수 없다! 네놈은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호연광이 손을 쳐들고, 공여가 맨손 수도로 연호정을 공격했다.
그 순간, 저 멀리 협곡 절벽 위에서 폭음이 터졌다.